카메라 뒤로 가는 배우들

사용자 삽입 이미지지난여름으로 기억한다. 당시 재직 중이던 극장에서 <봄날은 간다>(2001)의 개봉 10주년 기념 상영을 마친 후 허진호 감독, 유지태 배우와 함께 근처 식당에서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다. 둘은 막역한 사이로 유명하지만 그날의 술자리는 오랜만의 조우였던지 술잔히 한 바퀴 돌기도 전에 서로의 안부를 묻느라 부산스러운 분위기였다. 중국에서 장동건, 장즈이, 장백지와 <위험한 관계>(국내 개봉 하반기 예정) 촬영을 준비 중이던 허진호 감독은 잠깐 짬을 내어 한국에 들어온 상황이었지만 화제는 연출 데뷔를 앞둔 유지태 배우에게로 모아졌다. 그때 허진호 감독은 이런 얘기를 꺼내며 화제를 이어갔다. “한국에는 배우 출신의 감독이 너무 없어.”

그의 말처럼 한국과 달리 해외영화들을 살펴보면 한창 유명세를 얻고 있는 배우들이 연출가로 활동하는 예가 적지 않다. 최근만 해도, 조지 클루니 ‘감독’이 <컨페션>(2002) <굿나잇 앤 굿럭>(2005) <레더헤즈>(2008)에 이은 네 번째 연출작 <킹메이커>(2011)를 발표했다. 또한 프랑스를 대표하는 배우라 할 만한 마티유 아말릭이 <온 투어>(2010)로 연출 데뷔하며 2011년 칸영화제 경쟁부문의 감독상을 수상, 신선한 충격을 전해주었다. 혹자는 마티유 아말릭의 감독상을 두고 칸영화제가 자국의 감독에게 프리미엄을 적용했다며 수상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온 투어>에 대한 영화평들은 대체적으로 아말릭의 연출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좋은 배우가 좋은 연출가가 될 수 있다’는 사례는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그것의 극명한 예는 단연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차지가 될 터다. <황야의 무법자>(1964) <더티 해리>(1971) 등 젊을 적 연기자 생활만 해도 마초 액션 배우의 대명사로 통했던 그가 <용서받지 못한 자>(1992) <미스틱 리버>(2003) <그랜 토리노>(2008) 등을 연출한 거장 감독의 위치에 오를 줄 그 누가 예상이라도 했단 말인가. 살아있는 전설로 추앙받는 장 뤽 고다르는 <탐정>(1985)이라는 영화에서 존 카사베츠와 더불어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미국의 위대한 영화감독으로 언급하며 부러 존경을 표했을 정도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극적인 변신에 대해 많은 영화 팬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결과다. 이스트우드가 배우로서 함께 했던 감독들, 세르지오 레오네(<무법자> 시리즈), 돈 시겔(<더티 해리> 시리즈), 마이클 치미노(<대도적>(1974)) 등은 하나같이 세계영화사에서 중요한 페이지를 장식한 이들이다. 이스트우드는 그들의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했지만 종종 카메라 뒤로 다가와 연출력을 훔치는(?) 데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그가 종종 자신의 멘토로 언급하는 돈 시겔 감독의 지도 아래 영화를 배우며 <더티 해리>의 출연 이후 곧바로 연출 데뷔작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1971)를 발표한 건 유명하다.

실제로 배우 출신의 연출자는 여러 모에서 유리한 점이 많다. 감독에게 직접 연출력을 하사받기 가장 좋은 위치를 점하고 있고, 또한 그 자신이 배우이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 연기자의 예민한 감정을 통제하기에 이로운 조건을 가졌다. (실용적으로는 연출과 연기를 병행함으로써 제작비를 아낄 수 있다는 점도 무시 못한다!) 다만 그날 술자리에서 허진호 감독이 의문을 표한 건 감독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영화 현장을 체험하고 느끼는 이가 배우인데 유독 충무로에는 연출자로 이어지는 경우가 희박하다는 것이었다. 국내 배우들에게 충무로라는 한국영화의 풍토는 할리우드와는 달리 연출을 겸하기에 물리적, 정신적 파이가 크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결과다.

한창 주가를 올리는 배우는 밀려드는 차기작 주문과 광고 요청으로 바쁜 스케줄 탓에 눈을 돌릴 수가 없는 처지다. 몇몇 A급 배우의 경우, 이미지가 곧 돈과 연결되는 상황에서 신비주의 연연하며 동료배우와 스태프를 등한시하니 현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리가 없다. 또한 극히 일부의 연기자들에게 주인공 자리가 독점되는 상황에서 넉넉히 출연료를 챙길 수 없는 배우들은 잦은 작품 출연으로 부족분을 메우다보니 연출로의 한눈팔기(?)는 언감생심이다. 어렵게 영화를 만들겠다는 결심을 해도 배우의 인지도는 물론 연출력이 검증되지 않은 점도 배우 출신의 연기자 데뷔를 저해하는 요소다. 그런 이에게 쉽게 투자를 결정해줄 제작사를 찾기에 한국영화계가 순수(?)를 잃어버린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그 같은 이유가 아니더라도, 우리의 인식 속에 배우가 연출한 영화는 다소 질이 떨어진다는 뿌리 깊은 선입견이 박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감독=지식인, 배우=딴따라라는 인식이 여전히 지배적인 한국에서 배우 출신 감독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기에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은 것이다. 다만 언급한 여러 제약에 상관없이 연출을 배우 생활의 전환점으로 삼는 시도는 한 번 생각해 볼 만하다. 일례로, 할리우드에서는 배우들이 자신의 신념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혹은 추락하는 배우 생활의 돌파구를 찾을 목적으로 연출에 뜻을 두어 성공적인 전환을 맞은 사례가 종종 있어왔기 때문이다.

안젤리나 졸리는 ‘여전사’ 이미지로 자신의 연기 경력을 디자인해왔지만 처음으로 메가폰을 잡은 <인 더 랜드 오브 블러드 앤 허니>(2011)에서는 배우 때와는 전혀 딴판인 면모를 선보인다. 특히 전쟁과 내전으로 고통 받는 이들의 인권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직접 연출하는 영화에서만큼은 여전사 이미지일랑 안녕을 고한다. 보스니아 내전 당시 이슬람 여성과 그를 성폭행한 세르비아 남성의 사랑이야기를 통해 세계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졸리와 다른 경우이지만 벤 에플렉은 출연작은 많았지만 대표작은 없는 배우 생활의 슬럼프를 극복하기 위해 연출로 눈을 돌려 (주인공까지 연기해가며) <가라, 아이야, 가라>(2007) <타운>(2010)과 같은 느와르 영화를 통해 극적으로 재기에 성공한 사례다.

“근데 (유)지태야, 어떤 영화를 만드는 거야?” 허진호 감독의 질문 속에는 충무로에서 배우 출신 장편 영화감독의 포문을 열 유지태에 대한 기대감이 잔뜩 녹아있었다. 유지태는 지금껏 4편의 단편을 만들었는데 캐릭터와 배경에 대한 꾸밈없는 연출력이 허진호 감독의 영화와 닮았다는 평가를 지배적으로 받아오던 터였다. 하지만 “자본의 논리를 탈피한 의미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던 유지태 ‘감독’은 한국영화의 주변 풍경에 머물렀던 필리핀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산세베리아>(2012년 하반기 개봉 예정)라는 성장물을 연출할 계획이라고 했다. <봄날은 간다>의 사랑에 미숙한 연하남, <심야의 FM>(2010)의 사이코패스 등 다양한 장르에서 다종한 캐릭터를 연기했던 유지태는 말하자면 한국의 안젤리나 졸리처럼 연출에서만큼은 그 자신의 신념에 충실한 영화를 만들 생각인 것이다.  

유지태뿐만이 아니다. 앞으로 충무로에도 배우 출신의 영화감독 데뷔가 러시를 이룰 전망이다. 이미 구혜선 ‘감독’은 연출데뷔작 <요술>(2010)을 발표한 데 이어 조승우, 남상미 주연의 <복숭아나무>(2012)를 올 상반기 중에 개봉할 예정이고 오래 전부터 감독의 꿈을 숨기지 않았던 정우성 역시 “올해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감독 데뷔할 것”이라는 포부를 드러내기도 했다. 박중훈도 올해 촬영을 목표로 한창 시나리오 작업 중인 것으로 알려진다. 그가 직접 밝힌 바에 따르면, “몇 년 사이에 세상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겼다. 배우는 아무래도 기획이나 이야기를 일차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나. 감독이 되면 일차적으로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연출을 준비하고 있다.” 다음에 다시 만나게 되면 허진호 감독은 이런 얘기를 할지도 모르겠다.  “충무로의 배우 출신 영화감독들의 활약이 대단하더라.” 카메라 뒤로 간 배우들의 영화를 어서 빨리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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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ENA
2012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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