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훈 감독은 <도둑들>과 관련한 어느 인터뷰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 “‘1급 오락 영화’라는 평이 제일 기뻤다. 난 지금까지 계속 오락 영화를 찍어 왔다.” 그렇다, 데뷔작 <범죄의 재구성>(2004)부터 <타짜>(2006) <전우치>(2009), 그리고 <도둑들>까지 그의 영화는 상업성이 전면에 나섰고, 무엇보다 모두 흥행에 성공했다. 데뷔작부터 내리 4편의 영화가 흥행에서 모두 성공한 경우는 충무로에서 최동훈이 유일무이하다.
흔히 최동훈은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 등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으로 언급되고는 하는데 사실 이들과는 추구하는 영화세계가 다른 편에 속한다. B급 영화 취향을 공유하고 자기 영화 색깔이 뚜렷하다는 공통점을 갖지만 이들에 비해 좀 더 대중의 취향에 영합하는 쪽에 가깝다. 작가주의라는 칭호가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 등에게 자연스러운 반면 최동훈에게 낯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굳이 구분하자면, 최동훈은 <국가대표>(2009)의 김용화 감독, <해운대>(2009)의 윤제균 감독, <써니>(2011)의 강형철 감독 등과 함께 오락영화 감독 군(群)에 속한다. (모든 감독들이 세간의 평가와 상관없이 자신들은 상업영화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오락영화 감독 군’이라는 표현은 어폐가 있지만 편의상 이 기사에서만큼은 이렇게 부르기로 한다.)
확실히 이들은 앞서 언급한 작가주의 계열의 감독들이나 그 앞선 세대, 즉 장선우(<거짓말>(1999) <우묵배미의 사랑>(1990)), 박광수(<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 <칠수와 만수>(1988)) 여균동(<세상 밖으로>(1994)) 등 운동권 정서에 기반을 둔 감독들과는 지향하는 영화적 세계가 다르다. 이는 충무로의 변화한 제작 환경의 궤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어서 흥미롭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충무로는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감독들에게 호의적이었다. 오락성으로 철저히 무장한 할리우드 영화와는 달리 충무로는 사회고발적인 작품 제작에 열을 올렸다. 이 같은 풍토에 변화가 찾아온 건 1990년 중반 유입된 대기업 자본이었다. 그에 맞춰 ‘사회파’ 선배들과는 선을 긋는, 전혀 새로운 감독으로 무장한 ‘신세대’ 감독들이 대거 등장했다. 작가주의 감독이었다.
이들은 감독의 창작력을 절대적으로 인정하는 환경에서 작가적 개성이 뚜렷한 영화를 만들었다. 할리우드의 장르를 받아들이되 한국형으로 비틀기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조용한 가족>(1998) <살인의 추억>(2003) <지구를 지켜라!>(2003) <올드보이>(2003) 등과 같은 걸작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들어 대기업 자본이 충무로를 잠식한 지금은 작품성보다 흥행의 가치를 우선하는 이른바 오락영화 감독 군들이 각광받는 추세다.
대기업의 제작 공정 방식을 그대로 이식한 듯한 작금의 시스템에서 더 이상 감독은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아니다. 투자자를 상대로 해당 시나리오가 얼마만큼의 투자 가치가 있는지 조목조목 설명해야 하고 제작자와는 더 많은 관객을 불러 모을 수 있는 이야기의 디테일과 연출방식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 그래서 감독과 제작자, 감독과 프로듀서 간의 관계는 과거에 비해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격상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제작자는 감독의 창작권을 최대한 보장해주며 흥행에 상관없이 전에 없던 결과물을 만들어낼 때에야 비로소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 풍토에서 감독의 비전과 대중의 취향 사이에 접점을 찾아 감독에게 조언해야 할 프로듀서의 역할은 그저 보좌하는 수준으로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최근 영화계를 시끄럽게 만들었던 ‘미스터 K’ 사태는 영화를 바라보는 세대 간의 인식 차가 얼마나 컸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개그맨>(1988)을 통해 데뷔한 이명세는 영화를 예술로 인식해온 감독이다. 그에 반해 제작자로 나섰던 윤제균은 <해운대>로 천만 관객을 동원하는 등 산업적인 논리로 영화를 만들어온 감독이다. 그런 이명세 감독에게 연출 방향에 의문을 제기한 제작자의 마인드가 월권으로 비춰졌을 테고, 그런 윤제균 감독에게 흥행에 대한 고려 없이 무조건적으로 예술을 지향하는 감독의 마인드가 시대착오적이라고 느껴졌을 테다.
결국 이 사태는 세대간의 ‘소통 부재’가 낳은 해프닝이었지만 작금의 제작환경이란 것이 감독들에게 주변과의 협업이 더없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려준 교훈격의 사건이었다 할 만하다. 아닌 게 아니라, 최동훈, 강형철, 김용화, 윤제균 등 지금 가장 각광받고 있는 감독들은 지금의 제작환경이 요구하는 바, 그러니까 ‘하이 콘셉트 high concept’에 가장 부합하게 영화를 만드는 연출자로 유명하다.
하이 콘셉트란 한국에서는 흔히 ‘기획영화’로 통하는데 한 줄로 요약이 가능한 이야기에, 스타와 마케팅 가능성을 결합, 막대한 수익이 가능토록 기획하는 영화를 말한다. 예컨대, <도둑들>은 10명의 도둑들이 다이아몬드를 훔치는 이야기다. 관객들이 쉽게 이해할 만한 이야기다. 여기에 김윤석, 김혜수, 이정재, 전지현, 김수현 등 스타들이 대거 등장하니 관객의 기대감은 더 한층 상승된다. 포인트가 다양하다보니 마케팅적으로도 수월하고 그 결과 흥행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도둑들> 외에 올해 흥행한 한국영화들만 해도 하이 콘셉트의 조건에 부합한 작품들이 대다수였다. 이용주 감독의 <건축학개론>은 ’15년 만에 찾아온 첫사랑과의 재회’라는 한줄 요약이 가능한 이야기에 엄태웅, 한가인, 이제훈, 수지라는 스타가 출연했다. 또한 예상외의 흥행으로 관심을 모았던 박정우 감독의 <연가시>도 ‘치사율 100%의 변종 연가시가 한국사회를 초토화시킨다’는 내용에 더해 김명민, 김동완 등의 스타 캐스팅으로 재미를 본 경우라 하겠다.
그러다보니 이들 감독들 중 몇몇은 ‘흥행 불패’라는 신화 아닌 신화로 수많은 제작사로부터 뜨거운 러브콜을 받기도 한다. 최동훈은 이미 언급한 그대로고 <과속 스캔들>(2008)과 <써니>로 각각 824만과 736만 관객을 동원한 강형철은 2013년 9월 개봉예정인 <타짜2>로 3연속 흥행을 노리고 있고, <오! 브라더스>(2003) <미녀는 괴로워>(2006) <국가대표>로 3연속 흥행에 성공한 김용화는 허영만 화백의 인기 만화 <제7구단>을 원작으로 한 <미스터 고>(2013)로 4연속 흥행에 도전한다.
그렇다고 한 줄로 요약 가능한 이야기에 스타를 캐스팅한 하이 콘셉트 영화를 만든다고 흥행에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하이 콘셉트로 성공한 감독들에게는 대중의 욕망을 미리 헤아려 영화 속에 반영하는 특별한 감식안이 존재한다. 최동훈은 <도둑들>에서 한국영화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초특급 스타의 대거 캐스팅을 통해 배우들의 ‘어벤저스’를 실현했고, 강형철과 이용주는 각각 <써니>와 <건축학개론>을 통해 1980년대와 1990년대를 한국문화의 중심으로 끌어들였다.
하나, 흥행과 작품성은 전혀 별개다. 흥행은 작품성을 담보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들 감독들의 고민은 이거다. 산업이 요구하는 영화 만들기에 충실하되 어떻게 하면 그 안에서 그들 각자의 개성과 새로움을 새겨 넣느냐, 이다. 여기서 방점은 그 내용보다 ‘고민’ 그 자체에 있다. 산업 환경의 변화에 따른 고민의 결과로 감독들의 세대는 진화해왔다. 사회파에 속하는 감독들은 무겁고 진지한 소재를 어떻게 하면 좀 더 대중 친화적으로 만들까 장고를 거듭했다. 그에 따른 고민의 결과로 등장한 세대가 바로 작가주의 군이다.
이들은 대중에게 익숙한 장르에 현실 문제를 대입하며 한국영화를 세계에 알리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다만 산업이 되어버린 시장은 한국영화의 명예나 명성보다 수치로 환산 가능한 흥행에 더욱 열을 올렸고 상업적인 마인드로 무장한 감독들이 각광받는 풍토를 조성했다. <미쓰 홍당무>(2008)로 평단의 지지를 얻었지만 흥행에서는 별 재미를 못 본 이경미 감독은 현재 차기작 <여교사>(가제)의 시나리오 작업에 한창이다. 그녀 왈, “이미 정해져 있는 플롯 구조 안에서 어떻게 하면 새로움을 줄 수 있을지 치열하게 고민 중”이란다.
유행은 필연적으로 결핍을 내재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결핍이 새로운 유행과 세대를 만들어낸다. 지금 충무로는 작금의 제작 시스템에 최적화된 오락영화 감독들이 대세다. 하지만 또 다른 새로움으로 무장한 감독들이 그 뒤를 이어받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 유행은 그렇게 돌고 도는 법. 감독들의 세대교체는 충무로 제작 환경의 변화를 의미한다. 그래서 세대를 살피는 건 충무로의 현재를 파악하는 가장 중요한 지표인 것이다.
ARENA
2012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