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비스>와 <범죄와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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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사회적으로 총을 한 자루씩 가지고 태어난다. 그게 꼭 성기를 말하는 것은 아니고, 야망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그래서 남자의 야망을 주제로 한 작품을 보면 총을 이용한 경우가 꽤 많다. 그 야망이라는 것이 특정 사회의 불특정 다수의 욕망을 대변하다보니 현실에 대해 발언하는 예술가들의 더듬이를 자극하는 것이리라. 지금 한국 사회의 욕망을 조롱하고 비웃는 한 편의 영화가 관객몰이에 한창이다. 바로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이하 ‘<범죄와의 전쟁>’)다.

윤종빈 감독은 데뷔작부터 한국 남자 특유의 ‘호모 패거리쿠스’ 문화를 집중 조명해왔다. <용서받지 못한 자>(2005)의 군대와 <비스트 보이스>(2008)의 유흥업소에 이어 <범죄와의 전쟁>에서는 ‘나쁜 놈들’의 대명사 조직 폭력배 세계로 잠입한다. 다만 이 영화가 다루는 조폭 문화는 특별하기보다 한국의 아버지 세대 일반으로 확장된다는 점에서 풍자적이다. 일개 비리 세관원에서 거물 로비스트로 전향하는 최익현(최민식)이 대표적인 인물인데 돈과 출세라면 친인척을 총동원하는 그의 욕망은 노골적이고 뻔뻔하다. 하지만 최익현의 욕망에 대한 태도를 그만의 것이라고 알리바이를 주장할 수 있는 한국 남자는 얼마나 될까.

앤디 워홀은 대중 문화의 아이콘을 재료삼아 대량 생산/복제를 통해 팝아트를 확립하며 20세기를 대표하는 예술가의 위치에 올랐다. 배트맨, 딕 트레이시, 뽀빠이 등 만화 캐릭터부터 엘비스 프레슬리, 마릴린 먼로, 존 F. 케네디와 같은 유명 인사까지, 주로 미국인들이 열광하는 스타 이미지로 미국의 ‘어떤’ 욕망을 드러냈다. 그중 <엘비스 Duble Elvis>(1963)는 엘비스 프레슬리가 총을 뽑아드는 순간을 실크 스크린에 이중 인화한 것으로, 서부극 <플레이밍 스타 Flaming Star>(1960)의 광고 스틸에서 가져온 것이다.

서부의 총잡이는 미국이 자신들의 개척자 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전략적으로 이용해온 이미지 중 하나였다. 게다가 당시 인기 절정의 록 스타 엘비스 프레슬리는 미국인들이 닮고 싶어 했던 롤 모델 그 자체였다. ‘엘비스 스타일’로 불렸던 특유의 올백 머리는 젊은이들이 경쟁적으로 따라했던 로망이었고, ‘엉덩이의 마술사’로 불리는 섹시한 제스처의 무대 매너는 소녀들을 열광케 했다. 그렇게 엘비스 프레슬리를 욕망했던 이들을 겨냥해 ‘펑’하고 총을 쏘아대는 포즈는 미국의 야망의 총합을 압축적으로 드러냈다.

<엘비스>는 팝 아트를 대표하는 작품이지만 그 속에는 미국의 욕망을 간파한 앤디 워홀의 다큐멘터리적인 시선이 기저에 도도히 흐른다.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 외에, 서부극이 인디언을 학살해 영토를 넓힌 백인의 행위를 정당화한 장르이고, 화려한 록 스타의 이면에서 약물에 절어 살았던 엘비스의 전력을 감안하면 <엘비스>가 다루는 주제는 다름 아닌 ‘허상’에 바탕을 둔다. 실제로 앤디 워홀의 작품을 평가하는 비평가들의 관점은 허상적인 것으로 모아진다. 장르(상품) 숭배와 스타라는 기호의 매혹 뒤에는 이렇게 고통과 죽음이라는 현실이 총구를 들이민다.

돈과 출세에의 욕망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범죄와의 전쟁>의 최익현에게는 죽음이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충렬공파 최 씨 가문임을 내세워 조직의 보스 최형배(하정우)의 마음을 산 뒤 대부 행세를 하면서 그의 욕망은 급기야 선을 넘기에 이른다. 이처럼 한국 사회에서 혈연은 법과 도덕을 뛰어넘는 무소불위의 권력이다. 그래서 개인의 욕망이 혈연과 결합하면 마치 대량 생산/복제의 형태처럼 대대손손 가문의 단위로 덩어리를 이루게 된다. 예컨대, 종친의 위력을 확인한 최익현이 족보를 파헤쳐 최 씨 가문의 경찰과 변호사와 검사를 포섭, 월권을 행사하며 재산을 불리는 한국 사회의 교망 투기의 메커니즘이 형성되는 것이다.

앤디 워홀의 대량 생산/복제는 인간 욕망의 획일화, 즉 집단 욕망을 상징한다. “미래에는 모든 사람이 15분간의 명성을 누릴 것이다.”라는 그의 유명한 말처럼 모두의 욕망이 거미줄로 분산되지 못하고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스타가 되고 싶다는 하나의 점으로 모아지다 보면 그 부작용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욕망을 쟁취하기 위해 뛰는 놈보다 나는 놈이, 나쁜 놈보다 더 나쁜 놈이 돼야 하는 이 더러운 세상. 경우는 다르지만 최익현 또한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그 누구보다 더 많은 돈으로 배를 불리겠다며 조직의 계급 구조를 흔들었다가 최형배의 화를 불러 평생을 악몽에 시달리게 된다.

최익현이 총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래서다. 그의 야망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보잘 것없는 그의 힘을 표상하는 기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총에는 총알이 장전되어 있지 않다. 대신 총알이 장전되어 있는 양 궤변과 허세를 늘어놓는데 그때 총알의 은유로 동원되는 것이 검사가 된 아들 부분의 돌잔치다. 지금까지 그랬듯 최익현은 검사 아들의 비호 속에 허상의 권력을 유지할 것이고 그 손자는 다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터놓은 가문의 욕망을 이어갈 것임이 자명하다. 그것이 특수한 경우일까. 우리는 최익현의 실제 모델로 추측되는 그분(?)에게 지지를 모아줘 검은 욕망에 면죄부를 준 적이 있다. 그 같은 선택은 그분처럼 불법을 저질러서라도 많은 돈을 벌고 싶다는 집단 욕망의 발현이었다.

집단적으로 환호하는 욕망(의 대상)은 종종 비극을 불러온다. 앤디 워홀의 <엘비스>가 나왔던 1963년의 엘비스 프레슬리는 한물간 스타였다. 군복무로 인한 공백 기간 동안 대중은 지미 헨드릭스, 도어즈와 같은 새로운 록 스타에 열광했고 특히 비틀스의 인기는 이미 엘비스를 훌쩍 뛰어넘은 뒤였다. 그때부터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예전의 이미지를 반복(복제)하며 안간힘을 썼던 엘비스는 각성제를 과다복용하기 시작했고 결국 1977년 약물 남용 의심 속에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엘비스>의 겹쳐있는 두 명의 엘비스의 모습은 그의 죽음과 겹쳐 묘한 해석을 불러일으킨다. 인기로 충만했던 과거 록 스타의 영혼이 이탈하는 엘비스의 당시 상태를 암시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그림 속 엘비스가 쥐고 있던 총에는 총알이 장전되어 있던 걸까. 이것만은 확실하다. 당시의 엘비스는 하나둘씩 빠져나가는 인기의 총알을 채워 넣기 위해 영화 출연과 음악 공연을 병행하며 무리하게 몸을 혹사시키다 끝내 모든 걸 잃고 말았다. 거울 앞에서 총을 든 자신을 비춰보는 <범죄와의 전쟁>의 최익현의 처지가 <엘비스>와 닮아 있는 것은 꼭 착시현상만은 아니다. 추악한 욕망이 투영된 총을 쥐고 거울을 비추는 모습이 꼭 미래의 자신에게 위태롭게 총을 겨누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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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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