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위의 미장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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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위의 미장센’이라는 게 있다. 흔히 ‘베드신’이라 불리는 정사 장면에 부여된 의미라고 설명하면 될 것 같다. 단순한 눈요깃감이 아닌 왜 이 장면이 필요했는지 체위를 통해 정당성을 부여하는 개념이라고 할까. 공식화된 것은 아니지만 예술과 외설 논란이 벌어질 때 체위의 미장센은 그 여부를 따지는 중요한 잣대가 될 수 있다. 아니, 되고는 했다. 19금이 예능코드로 각광받는 지금, 예술과 외설을 따진다는 것 자체가 이미 구시대적 산물이 된 지 오래지 않나.

다만 이 시점에 체위의 미장센을 언급하는 건 파격의 정사 장면이 등장하는 영화가 심심찮게 개봉하는 까닭이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2013)는 두 명의 아름다운 여성이 펼치는 과감한 연기가 화제를 모으며 대작영화의 틈바구니 속에서 3만 명이 넘는 관객 동원력을 보여줬다. <호수의 이방인>(2013)과 <님포마니악>(2013)은 아직 개봉 전이지만 ‘극강’의 정사 수위로 벌써부터 많은 영화 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

근데 이 ‘기대감’의 정체에 대해서는 좀 더 부연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단순히 자극적인 정사 장면이라면 굳이 극장을 찾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좋은 연출자를 구분하는 방법 중 하나가 정사 장면의 묘사라고 생각한다. 좋은 연출자는 섹스 묘사에 반드시 체위의 미장센을 작동시켜 왜 이 장면이 필요했는지를 설득해낸다. 위에서 언급한 영화 들이 하나같이 유수의 국제영화제를 통해 좋은 성과를 얻은 것은 물론이요, 만든 이들이 세계가 주목하는 감독이라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들 영화의 감독은 포르노와는 전혀 다른 차원과 의미에서 섹스를 바라본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에서 압델라티프 케시시 감독이 바라보는 섹스는 허기진 욕망을 채우기 위해 벌이는 투쟁에 가깝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아델(아델 엑사르코풀로스)은 이성과의 관계에서 성적 욕망을 충족하지 못한다. 여자라면 남자를 사랑하는 게 정상인줄 알았지만 그녀가 사랑하는 대상은 여자였기 때문이다. 남자와의 관계에서 성적 욕망을 채운다고 한들 포만감을 느꼈을 리 만무하다.

그래서 파란 머리를 한 매력적인 여자 엠마(레아 세이두)를 보자마자 가슴이 뛰고 흥분되기 시작한다. 엠마의 눈에 띄기 위해 자주 가는 카페를 부러 찾고 주소를 알아내 집까지 찾아간 끝에야 아델은 그녀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델과 엠마의 섹스. 압델라티프 케시시 감독은 이들의 섹스를 아름답게 묘사하는 대신 성적 욕망에 고플 대로 고픈 아델의 심정을 고스란히 담는 쪽으로 장면을 가져간다.

아델의 섹스는 게걸스럽다. 엠마를 침대 밖으로 밀어낼 기세로 그녀의 성기에 자신의 성기를 밀어붙여 (이를 전문용어로 ‘트리바디즘 Tribadisme’이라고 한다!) 격렬하게 몰아붙인다. 반면 전부터 사귀는 여자가 있었던 엠마는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아델을 노련하게 받아준다. 이해할 수 있다. 처음으로 만난 진정한 사랑이자 성적 대상인 만큼 아델은 체면을 차릴 여유가 없다. 그 정도면 욕망이 채워질 법도 한데 쉬이 멈출 생각이 없다. 이를 반영하려는 목적으로 케시시 감독은 이들의 섹스 장면을 10분 넘게 이어간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만 보여줘도 되지 싶지만 지겹다 싶을 정도로 길게 묘사하는 것이다.  

<호수의 이방인>에는 남자들의 동성애가 전면에 나선다. 살인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스릴러의 문법을 따른다. 다만 사랑하는 이를 얻기 위해 살인까지 불사하는 캐릭터의 등장은 <가장 따뜻한 색, 블루>의 아델이 보여주는 욕망의 적극성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이 영화가 보여주는 섹스도 거칠 것이 없다. 다르다면, <가장 따뜻한 색, 블루>의 정사 장면이 개인의 심정을 반영하는 쪽이었다면 <호수의 이방인>의 섹스 묘사는 동성애에 대한 저변의 편견을 깨는 쪽으로 가져간다.  

제목에도 언급이 되는 극 중 배경의 호수는 놀랍게도 뻥 뚫린 공간이다. 심지어 햇빛 찬란한 날에 벌거벗은 남성들이 섹스 파트너를 찾겠다며 이 호수로 몰려든다. 즉, 이들에게 동성을 사랑하는 건 숨기고 가려야하는 종류의 욕망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섹스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는 이치다. 동성애가 뭐 그리 다르고 특별한 사랑인가. 사랑하는 대상이 동성이라는 사실 하나만 이성애와 다를 뿐이지. 이는 <호수의 이방인>의 연출자인 알랭 기로디 본인이 동성애자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호수의 이방인>에서 묘사되는 섹스는 도무지 가리는 것이 없다. 서로에게 오럴 하는 장면이 그대로 노출되고 사정하는 순간도 여과 없이 카메라에 담긴다. 배우들이 상영 시간 내내 전라로 등장함에도 그것이 파격으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인 것이다. 이런 정도의 수위가 가능했던 건 이 영화의 국적이 프랑스라는 사실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문화에 있어서 그 어떤 예외도 두지 않는 프랑스에서도 개봉과 관련해 논란이 벌어질 정도로 이 영화의 수위는 압도적인 것이었다.

다행히 한국에 수입이 되었지만 온전한 형태로 보기는 힘들 전망이다. 수위가 높은 장면에 대해서는 모자이크 혹은 삭제하는 방식으로 개봉이 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나는 국내 등급이 적용받지 않는 국제영화제를 통해 이 영화를 무삭제로 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동성애를 대하는 프랑스와 한국의 창작자의 시선은 양국 간의 입장 차이를 그대로 반영한다. 예전과 다르게 한국에서도 동성애를 언급하는 것이 자유롭지만 표현 수위에 있어서는 여전히 보수적인 게 사실이다. 가령, 한국 영화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2012)에서 묘사되는 동성의 정사 장면은 전혀 야하지 않은 데다가 귀엽고 코믹한 방식으로 이뤄진다. 거부감을 덜 느끼게끔 전략적인 묘사를 통해 동성애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유도하는 것이다.  

어쩌다보니, 동성애만 가지고 체위의 미장센을 설명했지만 범위를 넓혀도 그 예는 무궁무진하다. 억압된 욕망은 이성애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여성이 남성에 비해 자신의 욕망을 솔직히 드러내는 것이 과하다는 저변의 인식이 강한 한국에서 이는 종종 흥미로운 체위의 미장센을 만들어내고는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박찬욱 감독의 <박쥐>(2009)다. 성과 담을 쌓고 지내야하는 신부 상현(송강호)이 피를 잘못 수혈 받아 흡혈귀가 되면서 겪는 직업적 윤리와 개인적 욕망 사이의 딜레마에 초점을 맞춘 영화다.

그와 다르게 태주(김옥빈)는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다. 성적 능력이 떨어지는 남편과의 잠자리에 늘 만족하지 못했던 태주는 상현을 만나면서 그동안 억눌렸던 욕망을 해소하기에 바쁘다. 사랑은 나누고 싶지만 신부라는 정체성 때문에 머뭇거리는 상현이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는 것에 반해 태주는 바닥에 누운 그의 몸에 올라탄 자세로 섹스를 리드한다. 욕망의 발현에 있어서는 자신이 상위라는 것을 시위하듯 전시하는 것이다. 이 장면이 주는 쾌감은 여자가 욕망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손해라는 우리 사회의 금기 아닌 금기를 위반하는 데서 나온다.  

박찬욱 감독은 <박쥐> 외에도 흥미로운 체위의 미장센을 통해 미학적인 충격을 선사하고는 했다. <복수는 나의 것>(2012)의 영미 캐릭터는 재벌해체를 주장하고 혁명사회를 꿈꾸는 비밀 테러집단의 일원이다. 과격한(?) 주장을 펼치는 인물인 만큼 여성상위의 섹스를 구사할 뿐 아니라 이를 연기한 배두나는 톱의 위치에 올라선 여배우답지 않은 가슴노출로 캐릭터의 파격을 몸소 실천했다. <친절한 금자씨>(2005)에서는 아이를 유괴해 몸값을 받고 살해하는 ‘냉혈한’ 백선생(최민식)이 식사 도중 아내와 급작스럽게 관계를 갖는 섹스 묘사가 등장한다.  

이 장면의 체위는 다름 아닌 후배위다. 남성이 여성의 뒤에서 관계를 맺는 후배위는 종종 여성을 향한 남성의 폭력성을 드러낼 때 사용된다. 백선생은 애무와 같은 전희 단계를 거치지 않고 서둘러 벨트만 푼 채 바지를 무릎에 걸쳐 놓고는 곧장 후배위로 자신의 욕망만 채운다. 그런 후 만신창이가 된 아내를 앞에 앉히고 다시 밥을 먹기 시작하는 그의 모습에서는 성욕과 식욕 같은 원초적인 욕망만 남은 짐승의 실루엣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영화 속 체위는 다양한 인간의 심리와 상황을 은유하고 상징하는 유용한 미장센이다. 봉준호 감독이 연출한 <마더>(2009)의 예를 하나 더 든다면, 극 중 주인공인 엄마(김혜자)가 직접 섹스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엄마를 섹스하지 않는 존재로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에 도발을 가하려는 목적으로 섹스 장면이 활용된다. 엄마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이 섹스는 남녀가 합의 하에 하나둘 옷을 벗고 나체 상황에서 애무 단계를 거친 후 삽입에 이르기까지 단계별로 묘사된다. 그럼으로써 엄마를 여자로 인식하는 대신 ‘엄마’라는 성역에 가둬놓고 숭고한 존재로 바라보는 시선에서 관객들을 탈피하게끔 유도한다.

이처럼 체위의 미장센을 살피는 건 성에 대한 경직성을 깨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체위의 미장센에 대한 안목을 기를 때 섹스를 좀 더 너그러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 서두에서 예술과 외설 논란은 고릿적 시대에나 벌어졌던 일이라고 말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지난해 김기덕 감독의 <뫼비우스>(2013)는 모자간의 성관계가 등장한다는 이유로 영상물등급위원회로부터 일반상영관에서는 영화를 상영할 수 없는 제한상영가 등급을 받아 논란의 중심에 선 적이 있다.  

최근에는 이런 일도 벌어졌다. <신기한 TV 서프라이즈>(MBC)가 르네상스 시대를 풍미했던 화가 산드로 보티첼리를 소개하면서 그의 대표작 ‘비너스의 탄생’ 속 여인의 가슴을 모자이크로 처리해 시청자들의 비웃음을 샀다. 이 그림 속 여인은 보티첼리가 짝사랑했던 여인 시모네타가 모델로, 문제의 모자이크 장면이 나갈 때 제작진은 화면 하단에 이런 자막을 띄웠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표현하고자 누드로 그렸던 것’ 여기에 체위의 미장센을 대입한다면 핵심은 ‘순수’다. 그런데 가슴에 모자이크 처리를 했다? 노출이나 섹스면 무조건 외설이라 생각하는 이 해프닝의 당사자는 그냥 문화적 안목이 없었던 거다. 어쩌면 체위의 미장센은 알게 모르게 교양과 비(非)교양을 가르는 기준으로 이미 작동 중인지도 모르겠다.


ARENA
2014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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