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은 푸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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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같아선 청춘(靑春)이 푸르다는 말은 서민 경제가 살아난다는 말보다 더 허망하게 들린다. 봄날의 새싹처럼 푸르러야 할 우리의 청춘들이 과도한 입시 경쟁에, 고액의 등록금에, 바늘구멍 통과하기 같은 취직난에, 불을 피워보기도 전 희망의 심지가 시커멓게 타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말이 위로가 될까마는, 세파에 흔들리는 청춘은 비단 최근의 일만도 아니고 무엇보다 한국만의 특정 현상도 아니다. 과거에도 청춘들은 그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현실에 미래를 담보 잡혀 끌려 다니기 일쑤였다. 그리고 가까운 대만에서도, 태평양 건너 브라질과 칠레에서도, 구제 금융으로 시끄러운 그리스에서도 청춘들은 제자리를 잡지 못해 여전히 갈지자 행보로 희망 언저리를 배회 중에 있다.

대만 출신 에드워드 양 감독의 <고령가 소년 살인 사건>(1991)은 1960년대 초반 대만에서 벌어진 한 소년의 살인 사건을 다룬다. 소년과 살인을 병치한 제목부터가 자극적이지만 이 영화는 살인 그 자체에는 사실 별 관심이 없다. 대신 ‘소년은 왜 살인을 할 수밖에 없었는가?’에 초점을 맞춰 273분이라는 긴 호흡으로 살인을 둘러싼 소년의 주변 환경을 다각도로 분석해 들어간다.

샤우스(당시 15세의 장첸이 연기했다.)는 고입 시험에 떨어졌지만 야간 학교에 진학, 좀 더 공부에 전념해 자신의 처지를 개선해보려 한다.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은 샤우스의 삶을 지탱해주는 구명삭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급변하는 1960년대의 대만은 소년의 소박한 바램 따위 꽃 피울 수 없는 척박한 환경이었다. 중국본토에서 공무원 생활을 했던 샤우스의 아버지는 좌익 혐의로 고문당해 정신 이상 상태에 놓이고, 학교 친구들이 매일 같이 패싸움을 벌여도 어른들은 막을 힘이 없다. 그리고 샤우스가 짝사랑하는 여학생은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 타락한 어른처럼 몸을 앞세워 힘이 센 학교 ‘짱’에게서 권력의 부스러기나마 얻어 보려 한다.

당시의 대만은 일본의 지배에서 갓 벗어난데다가 중국의 공산 정권에게 밀려난 미군이 상주하는 등 말 그대로 격변의 시기였다. 도도한 변화의 물결이 대만을 강타한 것. 하지만 과거에 안주하며 무기력한 구세대와 소통을 거부한 채 그들만의 문화를 즐기는 신세대 간의 단절은 혼란만 가중 시킬 뿐이었다. 그런 환경에서 돌파구를 찾을 수 없었던 샤우스는 변하지 않는 대만 사회를 향해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희망 없음에 대한 분노를 대신하고야만다. 기성세대가 최소한의 위안을 주지는 못할망정 달콤한 미사여구로 희망을 기만할 때 청춘은 버틸 재간이 없다. <고령가 소년 살인 사건>을 경유하지 않더라도 지금 이 땅의 젊은이들은 거짓말 같은 진실을 뼈저리게 체화하는 중이다.

희망이라도 품을 수 있는 대만의 샤우스와 달리 남미의 청춘들은 태어날 때부터 운명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정규 교육이라도 받으면 좋으련만, 브라질 영화 <시티 오브 갓>(2005)과 칠레 영화 <나쁜 피>(2005)가 보여주는 바에 따르면 빈민가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난이나 한 번 면해보겠다고 이들이 투신하는 대상은 폭력 조직이거나 마약거래상이다. 신에게 버림받았음을 자조하며 ‘신의 도시’라 부르는 <시티 오브 갓>의 무법천지에서 갱단이 될 수밖에 없는 브라질의 소년들은 교과서 대신 각종 무기를 앞세워 피와 죽음으로써 젊음을 만끽(?)한다. 이는 할리우드의 액션 블록버스터에서나 볼법한 스펙터클이지만 브라질의 청춘들에게는 매일 같이 벌어지는 현실이라는 점에서 충격을 더한다.

마약 거래로 생활비를 버는 <나쁜 피>의 카를로스는 그마저도 더 악랄한 조직에게 빼앗겨 살아갈 힘을 잃는다. 더군다나 그들의 보스는 배당금을 가져오라고 협박을 가해오니, 임신한 여자 친구와 가족을 꾸리고 싶은 소박한 꿈은 고사하고 뒷골목조차 탈출할 수 없는 생사존망 앞에서 청춘은 비참해질 수밖에 없다. 브라질과 칠레의 영화로 예를 들었지만 남미의 청춘들에게 ‘탈출불가’는 도무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그 무엇이다. 예컨대, 잠시 후 소개할 <낙원은 서쪽이다>(2009)의 엘리아스는 국가부도에 직면한 조국 그리스를 떠나 유럽의 선진국 프랑스로 밀입국을 시도, 돈을 벌겠다는 실낱같은 희망이나마 이어갈 수 있는 처지다. 그에 반해 대륙 전체가 가난에 찌든 남미 청춘들의 경우, 이웃한 국가로 탈출을 시도해봤자 필연적으로 나아질 수 없는 상황이니 절망 그 자체인 것이다.

그렇다면 <낙원은 서쪽이다>의 엘리아스는 ‘탈출’을 감행한 까닭에 그가 원한 취직과 돈을 거머쥘 수 있을까? 이 영화를 감독한 그리스 출신의 코스타 가브라스는 엘리아스와 같은 이들에게 힘을 보태줄 수 있는 연대의 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사실 <낙원은 서쪽이다>는 불법이민자에 대한 제재를 강화한 프랑스 사르코지 정부에 대한 비판의 성격이 짙다. 영화는 엘리아스가 프랑스의 어느 해안에 당도한 후 파리에 입성하기까지를 따라간다. 그 과정에서 불법이민자를 단속하는 경관, 그의 싱싱한 몸을 돈으로 유혹하는 유한마담, 엘리아스의 사정을 간파하고 등쳐먹는 사기꾼 등 계속되는 어려움에 봉착한다. 그럴 때마다 일면식도 없는 프랑스의 시민들이 엘리아스를 도와 파리 행을 돕는데 이를 본 한 노인은 마법만이 현실을 바꿀 수 있다며 독려한다.

<낙원은 서쪽이다>가 보여주는 것처럼 신자본주의 탐욕과 기성세대의 욕심 속에 검게 변하는 현실을 바꿀 수 있는 건 마법뿐인 셈이다. 그 마법이 가능할까. 시민의 연대는 그 해답이다. 그 속에는 물론 우리의 청춘들도 포함되어 있다. 세상을 향한 겁 없는 도전과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청춘이야말로 마법 그 자체다. 청춘이 움직이고 연대할 때 비로소 세상은 푸르러 질 수 있다. 낙원은 우리가 손 내밀면 닿을 곳에 있는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연세대학원 신문
(2011.5.31)

4 thoughts on “청춘은 푸르고 싶다”

  1. 청춘.이라는 단어가 주던 로망이 사라져버린 시대같아요. 오늘 읽고 있는 소설에 ‘내 청춘에 이제 검은 조기를 꽂아야 한다..’는 문장이 나오는데, 마법만이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표현도 차암 어둡네요.

    1. 그러니까요, 저한테 만약 대학교 때로 돌아갈래 그러면 전 절대 거부할 거예요. 전 지금이 더 좋아요. 차라리 마법을 부릴 수 있을 때까지 펜을 더 연마하려고 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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