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의 문화학

사용자 삽입 이미지첫사랑이 떠났다. 눈앞이 흐려지고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내 애기냐고? 무슨, 마흔이 내일 모레인데. 아니, 솔직히 말하면 내 경우가 맞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삼촌 팬들의 얘기이기도 하다. 그야 말로 2012년은 ‘떠난 첫사랑에 가슴 떨리고 눈물 마를 날 없었던 기록적인 한 해’라고 할 만하다. 국민 첫사랑을 양분하던 수지와 아이유가 삼촌 팬들의 열화, 아니 우뢰와 같은 애정 고백을 뒤로하고 훌쩍 떠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현실에서 진짜 사랑을 만났다는 얘기는 아니고, 첫사랑 이미지로 인기와 팬 관리를 해오던 그녀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이를 깨버리고 만 것이다.

<건축학개론>에서 대학 시절의 서연을 연기한 수지는 전형적인 첫사랑 이미지로 삼촌 팬들의 애간장을 그렇게도 녹였더랬다. 화장기 없어 창백해 보이기까지 하는 ‘뽀얀’ 피부에, 바람에 옷깃이 날리듯 춤추는 긴 머리, 무릎이 보일락 말락 한 치마에, 음대생 타이틀까지, 뭇 남성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던 첫사랑 이미지가 완벽히 구현된 듯한 연기를 선보인 것이다. 그런 환희도 잠시, 극 중 이제훈이 연기한 승민과 서울 근교로 놀러간 당일치기 여행길에서 그의 어깨에 기대 잠든 척 앵두 같은 입술을 살짝 벌리니, 의도적으로 키스를 당하고도 ‘난 아무 것도 몰라요’ 하는 서연의 표정을 보며 수지에게 느낀 배신감이란!

물론 영화 속 수지의 경우를 두고 첫사랑이 떠나갔네, 그래서 속이 쓰리네, 넋두리를 늘어놓는 것이 도를 넘은 반응이라는 걸 모르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남자들은 이해할 것이다. 첫사랑이 주는 그 아련한 기억과 느낌을 말이다. 여자들은 현실적이라서 첫사랑을 마음에 품지 않는다던데 남자들은 웬만해서는 첫사랑이 오랫동안 순수한 이미지로 남아주기를 바란다. <건축학개론>의 승민이 이를 잘 보여주지 않았나. 술 취한 서연이 선배 오빠에게 부축당한 채 그녀의 집으로 들어가자 전후 사정 파악할 것 없이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경우 말이다.
 
그게 바로 남자들이 갖는 첫사랑의 심리다. 이성으로는 서연이 그날 밤 선배 오빠와 하룻밤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 분명함에도 감정적으로는 논리적인 사고가 불가능하다. 사실 <건축학개론>의 수지를 이 글에 끌어들인 건 그런 남자들의 심리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설마 수지가 영화 속에서 키스 한 번 했다고 그게 그렇게나 실망스러웠을까. 그래서 영화 속 수지와 다르게 아이유에게는 그렇게 실망감을 느꼈다보다. 아이유의 경우는 수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허구가 아닌 현실에, 가상이 아닌 실제 인물이 그녀의 사랑이라며 등장한 것이다. 당사자가 손사래 치며 아니라고 한들 첫사랑에 민감한 남자들이 곧이곧대로 믿어줄까.

아이유는 철저히 첫사랑 마케팅에 기대어 팬 층을 확보하고 유지해온 가수다. 열대과일 리치처럼 깨물면 톡 터질 것 같은 외모와 팀 버튼의 캐리커처처럼 가녀린 몸매, 결정적으로 아직 사랑을 해보지 못했을 법한 나이다 보니 남자 팬을 대상으로 첫사랑 이미지를 덧씌우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조건이었다. 그러니 솜사탕 같은 애교 목소리로 “나는요, 오빠가 좋은 걸~” 가사를 부르면 불특정 다수의 삼촌 팬들은 감정의 대폭발이 일어나고야 마는 것이다. 각자의 마음속으로 수호천사를 자처하며 여동생 같은 그녀의 순수가 행여 상처라도 입지는 않을까 첫사랑 간직하듯 애지중지 하게 된다.  

고도로 상술화된 오늘 날의 대중문화 기획력은 절대적으로 대중의 심리로부터 출발한다. 대중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적확하게 간파해 그에 맞춘 상품으로 시장을 공략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의 판타지를 해당 스타의 이미지와 맞춤하는 전략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중 첫사랑 이미지는 모두의 감정을 건드리는 것이기에 대중의 너른 호응을 얻기가 용이하다. 하지만 그만큼 민감하기 때문에 관리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가장 핫한 스타의 사생활 관리는 필수!) 더욱이 첫사랑에 대한 남자와 여자의 심리가 상이한 까닭에 그에 접근하는 방법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서두에서 밝힌 바, 남자 팬에게는 간직과 보존의 대상으로 첫사랑이 활용된다. 반면 여자 팬에게는 해당 남자 스타의 (첫)사랑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쪽에 초점이 맞춰진다. 원빈과 전지현의 예를 보자. 원빈은 <가을동화>(KBS), T.O.P 커피 CF를 제외하면 극 중에서 동년배 여자 배우와 출연한 경우가 거의 없다. 그러니 커플로 맺어지지도 않는다. 그에게 처음으로 전국적인 인지도를 안겨준 드라마 <꼭지>(KBS)에서는 8살 연상의 미혼모를 짝사랑하는 고등학생으로, <마더>(2009)에서는 엄마와 함께 사는 것이 놀림감이 되는 모자란 아들로, <아저씨>(2010)에서는 전혀 연고가 없는 동네 소녀를 위험에서 구출하는 인간병기로 등장하는 것이다.

원빈은 애정관계를 배제한 작품을 의도적으로 선택한다. (그래서 출연하는 작품 수가 극히 제한적이다.) 그럼으로써 그의 최대 팬 층인 젊은 여성들로 하여금 안도감을 주는 한편으로 미혼모 정도, 엄마뻘 정도, 꼬마 아이 정도 언제든 그 옆자리에 치고 들어갈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기도 한다. 그에 반해 전지현은 <시월애>(2000) <엽기적인 그녀>(2001)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2004) 등 늘 커플이 되는 영화에 출연했지만 상대방 남자와는 일정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첫사랑의 이미지를 유지해왔다. 예컨대, 그녀는 결혼 전 출연한 작품에서는 단 한 번도 키스를 한 적이 없다.
 
<여친소>에서 로맨틱한 분위기도 무르익었겠다, 극 중 장혁과 키스 직전까지 갔지만 입술이 막 닿으려던 찰나 불쏘시개로 장혁의 입술을 지지면서 불발시켰다. 그렇게 전지현은 키스하지 않는 순수(?)한 여자 이미지로 자신의 배우 경력을 관리하며 남성 팬들의 이탈을 막았다. 그래서 결혼 루머가 있을 때마다 남자 팬들의 분노와 항의가 빗발치며 인터넷에서는 그녀를 향한, 그리고 결혼 상대방에 대한 성토가 넘쳐났다. 하지만 결혼 후의 전지현은 어떤가. 더 이상 첫사랑 이미지를 간직한 필요가 없어진 그녀는 결혼 후 처음 출연한 <도둑들>(2012)에서 7살 연하의 김수현을 상대로 배우 경력 최초의 키스 신을 일궈낸다.
 
그렇다고 전지현의 키스 신에 대해 남자 팬들이 배신감을 갖느냐? 그건 아니다. 김수현을 부러운 마음으로 바라볼지언정 이전처럼 여자 친구로 감정이입하듯 그녀를 바라보지 않는다. 이미 몇 번의 루머와 결혼 사실을 통해 첫사랑 이미지가 조작(?)되었음을 학습한 상황에서 예전과 같은 감정을 갖기는 힘들어졌다. 그럼 결혼 전 전지현이 영화 속에서 보여준 특정 이미지를 여과 없이 사실로 받아들였다는 건가? 영화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남자들은 현실 감각이 떨어지나? 의문을 가질 법도 하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답해주고 싶다.

남자들에게도 현실의 부족한 부분을 메우고 싶은 환상이 있어서, 특히나 첫사랑에 대한 판타지가 워낙 강해 이를 가상의 인물로 대리하고자 하는 심리가 작용한다. 첫사랑은 실패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그에 따른 상처를 통해 뭔가를 깨닫기 마련이다. 그런데 남자들은 그 실패를 치욕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왜 남자들이 술만 마시면 밤 늦게 옛 애인에게 전화를 걸어 ‘찌질’하게 구냐고? 기회가 있으면 어떻게든 그 치욕을 만회하고 싶은, 교정하고 싶은 욕망이 불쑥불쑥 찾아와 괴롭히기 때문이다. 물론 첫사랑의 회생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전지현이나 수지나 아이유에게 못다 한 첫사랑의 판타지를 투사하는 것이다.  

이번 아이유의 트위터 사진 소동에 삼촌 팬들이 분노한 건 그녀가 남자를 사귀(는 걸로 추정되)어서도, 그 상대가 슈퍼주니어의 은혁이어서도 아니다. 우리는 아이유가 언젠가 자신의 사랑을 찾아 훌쩍 떠날 것임을 잘 알고 있다. 다만 좀 오랫동안 첫사랑 판타지를 지켜줬으면 했는데 펑 하고 바늘에 찔린 풍선처럼 갑작스럽게 일을 터뜨려 감정을 주체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지금은 어떤가, 뭔 일이 있었냐는 듯 잠잠하다. 아마도 또 다른 첫사랑의 판타지가 찾아오면 삼촌 팬들은 또 다시 열광하고 배신감을 느끼기를 반복하겠지. 그렇게 우리는 첫사랑의 문화 상품에 웃고 우는 시대를 보내고 있다.

cartoon 허남준

ARENA
2013년 1월호

4 thoughts on “첫사랑의 문화학”

  1. 수지가 영화 한편으로 첫사랑의 아이콘으로 만들어져가는건 꽤 재밌는 현상(?)이었어요ㅋㅋ 영화 이후로는 화장도 옅게하고 머리에 웨이브도 안 넣더라고요. 그나저나… 깨물면 톡 터질 것 같은 리치같은 그녀라니! 딱 와닿으면서도, 쥐떼가 온몸을 훑는것 같은 이 징그르르한 느낌.

    1. 안 그래도, 리치 그 문장 넣고난 후에 다시 읽어보니까, 엄청 화끈거리더라고요. 수식은 정말 쓸데없구나, 글은 수식없이 담백하게 써야 하는구나. 왜 헤밍웨이가 단문으로 글을 썼는지 알겠더라고요. ^^; <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그와 관련한 대사를 했던 거 같은데 기억은 안 나네요. 그나저나 디케님 2013년 새해 복 많이 만드세요 ^^

  2. 헤밍웨이 하드보일드문체는 첫사랑이야기에는 어울리지않을거에요^^ 참, 글과 상관없는 얘기지만 기리오 나쓰오 읽기시작했어요. 미로시리즈부터.. 그로테스크한 연말이 될거에요.

    1. 미로 시리즈 정말 좋죠. 미로 시리즈 끝나면 꼭! < 아웃> 읽어보세요. 정말 억!! 소리 날 정도로 끝내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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