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피>(Chapp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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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트릭트 9>(2009)에서 인간에게 핍박받는 외계인을, <엘리시움>(2013)에서 황폐해진 지구 바깥에 건설된 호화로운 우주 정거장을 선보였던 닐 블롬캠프는 세 번째 영화에서 관심사를 로봇으로 옮겼다. <채피>의 ‘채피’는 원래 요하네스버그의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 로봇 스카우트 22호였다. 범죄 소탕 도중 치명상을 입어 폐기될 위기에 처한 것을 경찰 로봇을 설계한 개발자 디온(데브 파텔)이 구해낸다. 스카우트 22호에 고도의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을 탑재하여 스스로 성장하는 로봇 채피를 탄생시킨 것.

잘만 교육하고 기르면 인류 발전에 도움이 될 만한 로봇이지만, 아뿔싸 범죄자의 손에 넘어가면서 선량한 사람들을 위협하는 대상으로 전락한다. 어떻게든 채피를 구해내기 위한 디온을 더욱 힘들게 하는 건 같은 회사에 근무하는 무기 개발자 빈센트(휴 잭맨)다. 로봇이 인간과 공존하기를 바라는 디온과 다르게 빈센트는 자신의 힘으로 로봇을 통제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빈센트는 자신의 조종하에서만 움직일 수 있는 전투 로봇 ‘무스’를 작동해 디온과 채피를 제거하려 든다.

디온과 빈센트는 로봇에 대한 견해를 극단적으로 달리한다. 이는 로봇에 대한 일반의 논란을 과장한 설정에 가깝다.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이 인간의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쪽과 결국에는 인간의 능력을 훌쩍 넘어서 재앙으로 다가올 것이라는 쪽의 의견 충돌이 디온과 빈센트의 대립 기저에 담겨 있다. <채피> 전까지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 즉 A.I.을 다룬 영화들의 양상도 그러했다. <터미네이터> 시리즈처럼 인류의 어두운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은 로봇과 같은 기계 군단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고군분투하는 인간의 모습을 다뤘다. 그에 반해 <그녀>(2014) 같은 작품은 외로운 인간의 동반자로서 A.I.의 존재를 부각해 좋은 평가를 받았다.

결국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차원이다. <채피>는 대중성을 위해 디온과 빈센트를 각각 선과 악으로 대립시켜 이야기를 끌고 간다. 하지만 두 인물의 처지를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채피를 연기한 샬토 코플리는 “우리가 다른 이와 교감하듯이 로봇과 관계를 맺어갈 수 있다면 그에 대해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휴 잭맨은 또한 <채피>에 대해 “A.I.에 대한 적절한 접근법이자 곧 다가올 미래를 감동적으로 공론화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소개한다. 덧붙이길, “제어 불가능한 세상을 두려워하는 빈센트의 입장 또한 이해할 수 있었다”며 경력 최초로 악역을 수락한 배경을 밝혔다.

상반된 의견을 드러내는 두 캐릭터에 맞춰 이들이 설계한 로봇의 디자인 역시 성격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토끼 귀를 연상시키는 레이더가 채피에게 친근감을 더한다면 무스는 길이 3.5m, 무게 1톤에 달하는 육중한 몸체만큼 위협적으로 다가온다. 실은 원전이 있다. 폴 버호벤 감독의 <로보캅>(1987)이다. 각각 로보캅과 ED-209을 연상시키는 채피와 무스의 디자인, 폐쇄된 공장이 두 영화 모두 주요한 배경으로 등장한다는 점 등 <채피>는 <로보캅>을 레퍼런스로 삼은 혐의가 짙다. 하지만 지난해 브라질 출신의 호세 파딜라 감독이 <로보캅>을 리메이크한 전력이 있고 무엇보다 닐 블롬캠프는 <채피>를 새로운 정체성의 문제로 가져간다.  

<로보캅>의 주인공 머피는 죽은 줄만 알았던 자신이 로봇의 몸으로 재탄생하자 심각한 정체성 혼란을 겪는다. 닐 블롬캠프는 로보캅과 같은 경찰 로봇의 존재는 현실로 인정하고 그다음 단계, 즉 인간과 로봇이 결합한 신인류로의 차원으로 논의를 확장한다. 빈센트와 같은 인물이 자신의 앞길을 방해하는 동료를 향해 무자비한 살상을 자행하는 것과 다르게 인공지능 로봇 채피가 되려 자신을 희생해가며 디온을 보호하는 이유일 테다. “경찰 로봇처럼 비인간적인 존재에 완전히 인간적인 특징을 부여한 아이러니가 이번 영화의 핵심이다.”

이 영화를 통해 보여주는 채피와 같은 로봇이라면 환영이라는 것이 닐 블롬캠프 감독의 입장이다. 그는 더 나아가 따뜻한 인간의 마음을 로봇에게 이식할 수 있다면 그 또한 거부할 이유가 어디 있느냐며 신인류에 대한 지지를 드러낸다. 확실히 눈길을 끄는 설정이지만, 이를 설명하는 과정은 유아적인 데가 있다. 메시지는 명확한 데 그에 이르는 과정의 설명은 액션과 코믹함에 가려 깊이가 떨어진다. A.I.가 인간적인 감정을 지각하는 과정에 대해서라면 얼마 전 개봉했던 <엑스 마키나>가 더 흥미롭다.

‘엑스 마키나 Ex machina’는 라틴어로 기계 장치를 말한다. 이 영화에서 기계 장치는 인공지능 로봇 에이바(알리시아 비칸데르)다. 에이바는 매혹적인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어 외관상 로봇으로 상상하기 힘들다. 이를 개발한 네이든(오스카 아이삭)은 자신이 대표로 있는 인터넷 검색 엔진 기업 ‘블루문’의 직원 칼렙(돔놀 글리슨)을 비밀연구소로 초청해 제안을 한다. 에이바가 보여주는 감정이 진짜인지, 다운로드 된 프로그램에 맞춰 흉내 내는 것인지 판단해달라는 것.

이 제안은 기본적으로 ‘튜링 테스트’를 기본으로 한다. <이미테이션 게임>에서도 소개된 튜링 테스트는 사람과 컴퓨터에 같은 질문을 던져 컴퓨터의 대답이 얼마나 인간에 가까운 것인지를 판단해 인공지능 지수를 매긴다. 이를 <엑스 마키나>의 연출자이자 각본도 담당한 알렉스 가랜드 감독은 칼렙이 에이바와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는 설정으로 변형했다. 서로에 대한 통성명으로 시작된 대화는 어느 순간 예술에 대한 주제로까지 확장한다. 에이바 왈, “우리가 좋아하는 예술의 목록을 만들면 훌륭한 토론이 될 수 있을 거예요”

그에 따라 <엑스 마키나>에는 무수히 많은 예술이 인용된다. 네이든의 기업명인 ‘블루문’이 비트겐슈타인의 저작 모음임을 고려할 때 칼렙과 에이바가 대화를 나눈다는 설정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철학을 감지할 수 있다. 심지어 극 중에 클림트가 그린 <마르가레트 스톤보로 비트겐슈타인의 초상>이 등장한다. 그리고 에이바는 결국 이 그림에 나오는 여성처럼 하얀 드레스를 입고 비밀연구소를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로봇이라는 대상으로 존재하던 에이바가 액자와 같은 틀을 뚫고 나와 지각하는 A.I.로 생명을 얻었다는 은유일 것이다.  

중요한 건 <엑스 마키나>에서 에이바가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곳이다. 인간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한 그녀는 사람들이 북적이는 도시에 발을 딛는다. 신인류의 탄생. <엑스 마키나>는 에이바의 진화 과정을 예술을 중심에 두고 질문이라는 형태로 구체화한다. 자각의 시작은 곧 의심에서 출발하는 법이다. 예술은 그런 방식으로 진화해왔다. 세계관을 공유하지만, <채피>가 놓치고 있는 지점을 <엑스 마키나>는 정확히 보완한다.

시사저널
(20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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