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의 무한 자유를 허하라!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진중권의 신작 <이미지 인문학>을 읽다가 인상적인 구절을 발견했다. 20세기 사진의 이론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었다. 세계는 사진사의 관념에 따라 구성된다, 는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 헝가리의 사진작가 라슬로 모호이 나지의 말을 인용한다. “글자를 모르는 자가 아니라 사진을 못 읽는 자가 미래의 문맹자가 될 것” 바로 이어 진중권은 ‘텍스트와 달리 이미지는 다양하게 해석된다’는 설명을 친절하게 덧붙인다.

그리고 <이미지 인문학>을 통해 ‘디지털 혹은 포스트디지털 시대의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저자는 라슬로 모호이 나지의 말을 살짝 변용해 ‘글자를 모르는 자가 아니라 이미지를 못 읽는 자가 미래의 문맹자가 될 것이다’라고 다소 도발적인 화두를 제시한다. 대중문화, 그중에서도 영화평론을 업으로 삼고 있는 입장에서 꽤나 공감 가는 대목이자 도움이 되는 책이었다.

확실히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 대중의 관심은 소설과 같은 텍스트보다는 절대적으로 영상에 치우쳐져 있는 까닭에 개인적으로 어떻게 이미지를 이해할 것인가, 에 대한 고민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그래서 <이미지 인문학>과 같은 인문서적을 읽으면 이를 꼭 영화에 대입해 생각하기를 즐기는 편이다. 영화는 무엇을 보느냐 만큼 어떻게 읽느냐가 굉장히 중요한데 <이미지 인문학>과 같은 책은 영화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이를 확인해 볼 만한 영화가 개봉을 했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님포매니악>이다. 실제 정사를 의심케 하는 극 중 섹스 신으로 악명(?)이 높았던 이 영화는 4시간이 넘는 상영 시간 덕에 <님포매니악 볼륨1>과 <님포매니악 볼륨2>로 나누어 개봉했다. 그 때문인지, 개봉 전부터 화제를 모았던 것과 다르게 영화는 기대에 못 미치는 관객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역시나 라스 폰 트리에의 작품답게 영화 내외부적으로 논란거리가 충만하다.

어린 나이에 오르가즘을 경험한 조(스테이시 마틴/샬럿 갱스부르)는 그 느낌을 잊지 못해 이후 닥치는 대로 남자를 만나 다양한 섹스 활동을 펼친다. 거의 중독 수준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섹스를 밝히는 것인데 제목은 ‘색정광’을 의미하는 <님포매니악>이다. 이유가 있다. ‘중독자 an addict’라고 표현하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지만 조의 화려한 섹스 편력은 오르가즘의 다양한 감정의 배출을 배경으로 한다.

조의 오르가즘에는 감정의 희로애락이 배어 있다. 유독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각별한 조는 아버지가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자 두 다리 사이로 체액을 흘려 마치 눈물처럼 슬픈 감정을 대신한다. 흔히 애액(愛液)이라고 부르는 이 체액은 사랑하는 이와의 관계에서 생기는 것인데 조가 느끼는 오르가즘은 단순히 쾌락의 차원을 넘어선다. 그만큼 섹스에 대한, 오르가즘에 대한 탐구가 있었기에 가능한 경지다.

얼마나 많은 경험과 시행착오가 필요했을까. 하물며 조가 여자라는 사실에 비추어 수많은 편견과 숱한 사회적 제약을 이겨냈음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여성의 권리, 특히 동양보다 여성의 목소리가 높다는 서양에서도 여전히 남성 중심의 사고방식이 주류를 차지하는 탓에 조는 비정상적인 인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오르가즘이 쾌락으로 한정되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오르가즘의 용도(?)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그녀는 사회가 규정한 틀을 월담한 탐험자의 이미지를 획득한다.

그래서 조가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영화의 형식은 중요하다. 침대에 누운 조가 이야기를 하면 이를 남자인 셀리그먼(스텔란 스카스가드)이 듣고 중간중간 말을 보태는 것이다. 이들의 모습은 흡사 정신적으로 불안한 환자가 의사에게 무언가를 털어놓는 정신과 병실의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셀리그먼이란 이름은 긍정심리학으로 유명한 마틴 셀리그먼에게서 가져온 것이 유력해 보인다.

그래서일까, 정신적으로 우수한 남자 의사가 여자 환자의 불안한 심리를 교정하듯 셀리그먼은 조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의미를 부여하고 상징을 덮어 씌워 지식의 우월함을 과시한다. 조가 어린 시절 경험한 오르가즘에 대해서는 유충 단계의 곤충을 의미하는 님프를 들먹이며 님포매니악과 우아하게 연결된다고 하지를 않나, 첫 경험 당시 정상위 3번, 후배위 5번으로 관계를 마쳤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0,1,2,3,5,8… 로 이어지는 피보나치수열을 들어 남자의 조루가 수학적 논리라는 괴상망측한 논리를 편다.

그런데 이 관계, 어딘가 심상찮아 보인다. 단순한 의사와 환자의 관계를 넘어서는 것으로 보인다. 바로 여기에 이 영화가 지닌 진짜 가치가 있다. 조가 셀리그먼의 방을 장식한 물건들을 단서 삼아 이야기를 풀어가는 행위는 창작자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이에 대해 가타부타 평가를 일삼는 셀리그먼에게서는 평론가의 시선이 오버랩 된다.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무척 길어요”(이 영화는 1부 5개, 2부 3개, 총 8개의 챕터의 구성되어 있다.)라고 겁을 주는 조를 향해 셀리그먼은 “긴 이야기는 늘 좋은 법이죠”라고 응수한다. 또한 조가 “당신은 내 경험을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라고 무시하는 투로 이야기하면 이에 질세라 “내가 이해하지 못할 이야기는 없다”며 자신만만함을 드러낸다.

조와 셀리그먼에게서 창작자와 평론가의 관계를 보게 되면 왜 <님포매니악>이 여자가 주체가 되는 섹스 이야기이면서 성기 노출이 필수적으로 따라와야 하는지를 알아차릴 수 있다. 이 영화는 결과적으로 여자와 섹스와 오르가즘을 경유해 창작의 무한 자유를 옹호하고 역설한다.

창작자는 늘 사회가 규정한 한계를 넘어선, 금기시하는 소재를 취해 작품을 만들기를 즐긴다. 특히 라스 폰 트리에와 같은 감독은 의도적으로 성과 종교 등 민감한 소재를 건드리는 영화를 만들어 늘 논란과 논쟁을 부추기는 걸로 유명하다. 그에 대해 안티-라스 폰 트리에를 외치며 가장 격렬한 반대 의견을 제시했던 이들은 비평가 집단(과 뒤에 좀 더 자세히 소개할 검열관, 즉 등급위원)이었다. <어둠 속의 댄서>(2000) <도그빌>(2003) 등과 같은 영화는 극 중 약자인 여자를 극단적으로 괴롭힌다는 이유로, <안티 크라이스트>(2009)에 대해서는 불경한 제목도 물론이거니와 기성의 질서를 교란하는 극 중 묘사로 갖은 모욕과 비난을 받았다.  

라스 폰 트리에는 그동안 자신에게 가해졌던 모든 박해와 경멸과 비난을 투영해 조라는 인물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조가 여자이면서 남자 이름을 가진 걸 상기하자!)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후 방을 나섰다가 몰래 다시 들어온 셀리그먼이 자신의 총각 딱지를 떼겠다고 조를 덮치다가 총에 맞아 최후를 맞이하는 결말은 라스 폰 트리에가 자신의 작품을 오독하고 반기를 들어온 이들에게 가하는 일종의 복수 같은 것이다.  
 
여기에는 창작자의 창작 활동에 제약을 두거나 잘 알지도 못하면서 창작권을 침해하려 들지 말라는 경고성 멘트가 담겨 있다. 그래서 이 영화가 함정처럼 제시하는 피보나치수열과 같은 상징을 깊이 파고들었다가는 셀리그먼과 같은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진중권이 <이미지 인문학>에서 말한 부분을 살짝 변용해 이야기하자면, ‘이 영화가 제시하는 이미지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자는 영화의 문맹자가 될 것이다.’

하물며 이 영화를 큰 맥락에서 읽지 못하고 성기가 노출되는 특정 장면을 보고 유해하다고 평가하는 행위만큼 바보 같은 일도 없다. 근데 그런 바보들이 있다. 영상물에 적절한 연령별 등급을 부여하는 영상물등급위원회라는 곳이다. 이들은 <님포매니악>의 수입사가 섹스 신에 등장하는 성기에 블러(뿌연 화면) 처리를 하자 그제야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을 부여했다. ‘영상의 표현에 있어 선정적인 부분은 성적 행위 등의 묘사가 빈번하고 노골적이며 자극적인 표현이 있고, (중략) 청소년이 관람하지 못하도록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을 부여하면 <님포매니악>은 굳이 블러 처리 없이 원본 그대로 상영하더라도 별 문제가 없을 영화다. 그럼에도 원본 필름을 제시하자 사실상 국내 상영이 불가능한 제한상영가 등급을 부여하고 블러 처리를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상영을 허가하는 행위는 창작권 침해와 하등 다를 것이 없다. 셀리그먼처럼 경험이 없는 이가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비겁한 방식으로 개입하려 드는 건 그야말로 반칙 행위다.

그러니 참 역설이다. <님포매니악>을 청소년에게 유해한 섹스 영화로 평가하는 대신 그네들을 향한 조롱의 의미를 미리 파악했다면 원본을 훼손하는 행위 따위를 할 수 있었을까. 미시에만 집착함으로써 이미지 읽기 능력이 심각하게 떨어진다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한 이들이 거기까지 생각했을 리는 만무하다. 그래서 공부가 필요한 법이다. 책으로 둘러싸인 좁은 방에 갇혀 이론만 습득하는 그런 공부를 말하는 게 아니다.

예술은 무릇 세상 밖으로 나와 가급적 많은 경험을 쌓고 거기서 얻은 앎을 자기 식대로 솔직하게 표현하는 매체다. 그에 맞춰 평론이건 등급 부여 건 닫힌 공간을 탈출해 세상과 호흡하고 대중과 소통할 때 비로소 생명력을 얻을 수 있다. 그런 경험치의 공부를 통해 세상을 본다는 것, 그럴 때 비로소 이미지를 제대로 읽을 수 있고 창작자와 발맞춰 좀 더 건강한 예술 현실을 조성할 수 있는 것이다.

toon 허남준

arena homme
2014년 8월호

답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