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타운>(Coin Locker Gi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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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계에서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은 남성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에 비해 극히 적은 편이다. 이유가 있다. 흥행을 주도하는 관객 계층이 20~30대 여성이다 보니 제작사들은 이들이 혹할 만한 소재와 장르와 배우 위주로 영화를 기획하고 만든다.

한준희 감독의 <차이나타운>은 <피도 눈물도 없이>(2002) 이후 실로 오랜만에 만나는 여성 투톱 영화다. 김혜수, 김고은이 각각 조직의 보스와 조직원으로 분해 극 중 남자들의 세계에서 그들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선보인다. 남성영화 일색인 지금 세대를 대표하는 두 여배우의 만남은 그 자체만으로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차이나타운의 여자(들)

근데 이 둘의 관계는 단순히 보스와 조직원 사이라고 하기에 심상치 않은 구석이 있다. 보스를 ‘엄마’라고 부른다. 엄마(김혜수)가 접수하고 있는 지역은 ‘차이나타운’ 그녀에게는 일영(김고은)을 비롯해 몇 명의 아이들이 있다. 하지만 피를 통한 사이는 아닌 것처럼 보인다. 엄마치고는 아이들을 너무 험하게, 아니 조직이라는 사업체의 일원으로 다룬다는 인상이 강하다.

사실 일영은 버려진 아이였다. 태어나자마자 지하철 ’10’번 보관함에서 발견돼 이름도 일영이다. 엄마는 일영을 거둬들여 조직원으로 키웠다. 그래서 일영은 엄마의 명령에 따라 악성 채무자를 찾아가 빌려준 돈에 더해 고액의 이자까지 뜯어내며 차이나타운에서 살아남았다. 석현(박보검)은 악성 채무자의 아들이다. 일영과는 전혀 다른 세상의 인물이다. 힘든 상황에서도 셰프 보조 아르바이트를 하며 밝게 살아간다. 그 모습에 일영은 마음을 뺏기고 그로 인해 엄마의 눈 밖에 나게 된다.

<차이나타운>은 한국에서 조폭물로 불리는 갱스터 영화의 외피를 두르지만, 결과적으로 일영의 성장물로 기능한다. <차이나타운>의 원래 제목은 ‘코인 로커 걸’이었다. 소녀(girl)는 어떻게 그 험한 차이나타운에서 살아남는가? 극 중 차이나타운이 살벌한 곳인 이유는 쓸모 있는 사람만이 살아남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디 차이나타운에만 해당할까. 엄마와 같은 기득권 세력이 장애물처럼 버티고 선 지금 일영(과 석현)과 같은 청년들에게 우리 사회는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세계다.

아닌 게 아니라, 엄마가 일영을 비롯해 또래 아이들 넷을 데리고 있는 건 이들이 아직 정신적으로 자라지 못해서다. 신체는 건장하고 분노와 반항기가 충만하지만, 그것이 내적으로 고여 있다. 이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으니 엄마의 입장에서는 겉만 어른인 아이들을 이용해 먹기 편하다. 만약 미운털이 박히는 날에는 목숨을 보전하기 힘든 상황. 엄마가 말하는 쓸모란 아이들에게는 다름 아닌 생존이다. 이곳에서 사랑 따위 전혀 쓸모가 없는 행위다.
   
차이나타운은 겉보기에 수많은 구성원의 욕망이 엇갈린 사선을 그리는 장소이다. 원색의 간판이 난무하고 전깃줄이 난마처럼 얽혀 있으며 한문과 한글, 영어가 혼재한다. 그런데도 답답한 인상을 주는 건 엄마의 지배하에서 일영과 같은 자식 세대의 욕망이 발산할 기회를 얻지 못해서다. 석현과의 만남은 일영에게 있어 엄마의 지배를 벗어날, 엄마를 넘어설 수 있는 좋은 구실로 작용한다. 자기 정체성을 찾을 운명 같은 기회다. 일영은 엄마라는 괴물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을 것인가, 아니면 이 괴물에 맞서 독립적인 존재로 거듭날 것인가.

여성을 경유한 남성 이야기?

<차이나타운>이 내재한 살부(殺父) 테마는 이미 장준환 감독이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2013, 이하 ‘<화이>’)에서 선보인 적이 있다. 살부란 아버지를 죽인다는 의미다. 문장 곧이곧대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성장한다는 것은 부모를, 어른을 넘어선다는 개념이다. 성장은 남녀 공히 겪어야 할 통과 의례다. <차이나타운>이 화이와 주제를 공유하고 있는 건 흠이 아니다. 일영도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엄마를 넘어야 한다. 엄마 또한 그 자신의 엄마를 밟고(?) 일어서 지금의 위치에 올랐음은 자명하다. 일영이 엄마와 벌이는 일련의 갈등은 곧 엄마의 젊은 시절 사연이기도 한 셈이다.

핵심은 그 사연, 일영은 ‘어떻게’ 엄마를 넘어설 것인가. <차이나타운>이 여성 캐릭터를 지극히 남성적인 세계에 데려온 이유가 여기에 있을 터다. 이의 설득 여부가 <차이나타운>의 작품성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면, 일영은 화이와는 어떻게 또 다른 과정을 거쳐 여자의 성장을 획득할 것인가. 실은 그 차이가 <차이나타운>에서는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차이나타운이라는 공간이 특별한 볼거리를 제공하지만, 엄마와 일영 캐릭터에서는 여성이기 때문에 목격되는 차별점이 거의 없다. 남성을 대리해 그 자리에 서 있다고나 할까.

빳빳하게 머리칼을 세우고 몸에 보형물을 채워 넣어 만든 두둑한 뱃살로 화제를 모은 김혜수의 변신은 확실히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차이나타운의 최고 권력자답게 카리스마 넘치지만, <대부>(1972)의 돈 콜레오네와 같은 전형적인 남성 보스의 모습을 참조한 것처럼 보인다. 한준희 감독은 여성 캐릭터가 차이나타운의 절대적인 지배자로 군림하는 설정에 대해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더 강한 것 같다. 여자들은 결정적인 순간과 중요한 순간에 변명도 하지 않고 더 강력한 결단을 내린다”고 이유를 밝혔다.

<화이>의 아빠는 화이에게 애꿎은 사람을 앞에 두고 총을 쏠 것을 지시했다. <차이나타운>의 엄마는 일영이 보는 앞에서 석현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토록 지시한다. 한준희 감독의 말처럼 여자가 남자보다 더 강하고 강력한지 구체적으로 설득하지 못한다. 일영이 차이나타운에서 살아남은 결정적인 이유는 여자답지 않게 폭력을 행사해서다. 자신을 우습게 하는 남성 채무자에게 빌려 간 돈을 빌미로 주먹을 휘두르는 모습 역시 남자 배우가 연기했다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인다.

<차이나타운>처럼 강한 여성 캐릭터가 등장한 영화도 있었고 <피도 눈물도 없이>처럼 투톱으로 나선 적도 있었지만, 대개는 ‘남성적’ 이야기와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물론 그것은 이 사회가 남성 중심의 지배 체계로 형성되고 또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살부의 주제의식을 고려하면 <차이나타운>의 일영이 넘어서야 할 최종 대상은 엄마가 아닌 남성적인 지배 체계이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강하게 남는다. 물론 영화는 엄마가 남성 위에 군림하고 일영이 이를 이어받는 이야기로 결말을 맺지만, 이들 여성이 남성을 지배하게 된 방식과 과정은 철저하게 무시된다. 이 지점에 초점을 맞추고 더 공을 들였어야 여성이 중심에 선 이 장르의 그동안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래야 <차이나타운>의 살부 테마가 입체적인 의미를 획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차이나타운>의 등장은 분명 환영할 만하다. 전반부 웃음, 후반부 감동이 공식처럼 난무하고 뻔한 남자들의 이야기가 난무하는 작금의 영화계에서 의미 있는 시도다. 오히려 그래서 더 아쉽다. 김혜수, 김고은이 한 화면에서 묵직한 존재감을 발휘하는 작품을 언제 또 볼 수 있을까. <차이나타운>을 자양분 삼아 여성 캐릭터가 활약하는 더 많은 영화를 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남성과 남성적인 지배를 넘어 여성만의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는 진짜 여성영화를 말이다.    
 

시사저널
(20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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