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리 포터 감독의 <진저 앤 로사>(2012)는 꽤 강렬한 이미지로 오프닝을 연다. 1945년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 폭탄으로 버섯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장면이다. 그 시각, 일본 반대편 영국 런던의 한 산부인과에서는 두 명의 임산부가 세계 평화를 염원하는 양 두 손을 꼭 맞잡고 한낱 한시에 출산을 한다.
그렇게 태어난 이는 진저(엘르 패닝)와 로사(앨리스 잉글러트). 특별한 탄생 배경 탓인지 이들은 17세가 되던 1962년까지도 남다른 인연을 과시한다. 핵 반대 시위에 참여해 의식 있는 모습을 보이는 한편으로 히치하이킹으로 만난 남자들과 짜릿한 첫 키스의 순간을 공유하는 등 이들의 우정은 영원할 것만 같다. 하지만 로사에게 의외의 사랑이 찾아오면서 이들의 관계는 비극으로 치닫는다.
17세 소녀가 겪는 지독한 성장통의 테마는 더 이상 특별할 것 없는 소재다. <올란도>(1992) <탱고 레슨>(1997) 등으로 유명한 샐리 포터 감독이 이를 소재로 선택했다는 건 역설적으로 특별히 할 얘기가 있다는 의미다. 그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는 1962년이라는 특정 시간대다. 영화가 묘사하길, 당시의 런던은 구(舊)소련의 미국을 향한 핵 위협 속에 핵 반대 시위가 열렬한 가운데서도 재즈가 유행일 만큼 공포와 낭만이 공존하는 분위기였다.
결국 이념이, 그리고 신구의 가치가 충돌하는 상황에서 자의식을 갖춰갈 나이의 진저와 로사는 필연적으로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 자신들은 꽤나 의식이 단단한 척 진저의 경우, 출산과 양육 때문에 재능 있는 미술을 포기한 엄마처럼은 되지 않겠다며 호기를 부리기도 한다. 다만 실제로 이를 증명해 보이기에는 여전히 여리면서도 한창 여물지 않은 나이인 것이다.
실패가 의미를 갖는 것은 그 때문이다. 처절한 실패는 진저와 로사 같은 미숙한 자아가 발육하고 뻗어나갈 중요한 토양이 되고는 한다. 그리고 그 토양의 성격에 따라 인생과 운명이 좌우되고는 하는데 진저에게 발단이 되는 것은 아빠 롤랜드(알렉산드로 니볼라)의 이중적인 면모다. 엄마 몰래 바깥에서 젊은 여자를 만나고 돌아다니지만 아빠라는 호칭 대신 이름으로 부르라며 평등의 가치를 실천하는 롤랜드는 진저에게 있어 그야말로 인생의 멘토다.
충분히 그렇게 착각할 나이다. 진저와 같은 소녀들은 대개의 사회 현상과 사건을 미화하고 크게 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아빠, 아니 롤랜드의 그것이 지식인의 위선인 줄 알지 못한다. 하물며 (스포일러 주의!) 자유연애를 신봉한다고 해서 미성년자이자 진저와 가장 ‘절친’인 로사와 사랑을 나눈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짓인가. 사회의식이 투철한데다가 재즈의 낭만을 즐길 줄 아는 ‘개인’ 롤랜드를 신봉한다고 해도 진저에게 충격도 이만한 충격은 없다.
중요한 건 그와 같은 실수와 실패 속에 획득하는 어떤 가치다. 철학자이자 예술가인 롤랜드는 많은 이들에게 의식의 영향을 미치는 자신이 누구와 연애를 하든 개인사는 별개의 문제라며 뻔뻔하게 선을 긋는다. 대의를 위해서는 주변의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논리인데 강렬한 오프닝이 상기시키듯 인류를 멸망 직전으로 빠뜨리는 결정은 롤랜드와 같은 멍청한 논리에서 비롯된 역사의 함정이고 오류였다.
진저는 롤랜드의 생각을 그대로 물려받을 것인가. 다행히도 그녀가 깨닫는 가치는 ‘용서’다. 세계 평화를 염원하는 그녀에게 용서는 화해로 나아가는 지름길이다. 17세 소녀는 그렇게 실패를 통해 더 나은 방향으로 성장한다. 그리고 진저 역의 엘르 패닝(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키스 씬에 도전했다!)도, 영화감독 제인 캠피온의 딸로 유명한 로사 역의 앨리스 잉글러트도 <진저 앤 로사>를 통해 배우로서 더욱 성장한 모습을 선보인다. 여러 모에서 성장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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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