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L’Enf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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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은 원래 앙리 조르주 클루조(<디아볼릭><공포의 보수>)의 프로젝트이었다. 클루조 경력 상 가장 큰 야심이 집약됐던 작품인 만큼 그가 가진 모든 걸 쏟아 부었다. 예컨대, 의처증 남편에게 지독한 의심을 받는 부인의 심리를 묘사하기 위해 색색의 조명들을 그녀의 얼굴에 쏘는가 하면, 남편의 비뚤어진 정신 상태를 드러내기 위해 수십 개의 거울 이미지를 활용하는 등 주로 실험적인 연출을 통한 미스터리를 선보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지옥>은 클루조 경력에 가장 큰 오점을 남긴 프로젝트가 되고 말았다. 남편 마르셀 역의 세르주 레지아니가 촬영과 동시에 병에 걸려 자크 갬블링으로 대체됐고 부인 오데트 역의 로미 슈나이더를 못미더워했던 제작사는 베레니체 베조로 일방적인 교체를 감행했다. 이에 따른 압박감으로 불면의 밤을 지새웠던 클루조 감독은 그만 심장 발작 증세를 보여 결국 영화는 중단되고야 말았다. (이 과정을 담은 메이킹 다큐멘터리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지옥>이 2009년 공개됐다.)

클로드 샤브롤이 <지옥> 프로젝트를 넘겨받은 건 그로부터 28년 뒤인 1992년이었다. 클루조의 미망인으로부터 시나리오 저작권을 양도받은 샤브롤은 이야기의 큰 변화를 주지 않았다. 리조트 구입을 위해 차용한 빚 때문에 고민이 많은 폴(프랑스와 클루제, 원작의 마르셀)이 부인 넬리(엠마뉴엘 베아르, 원작의 오데트)가 바람을 핀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정신병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큰 맥락은 이어받고 있는 것이다. 대신 디테일한 부분에서 자신이 즐겨했던 집 안을 벗어나지 않는 스케일의 이야기로 꾸미는데 주력했다.

<지옥>은 클루조와 샤브롤 버전을 비교하며 보는 것도 꽤 흥미롭다. 클루조가 꽉 짜인 게임과 같은 이야기를 통해 계산적인 미스터리를 선보이는 것에 반해 샤브롤의 경우, 영화적인 느낌은 철저히 배제한 채 현실적인 접근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느껴진다. 샤브롤이 클루조의 중단된 프로젝트에 관심을 보인 것도 클루조의 영화치고는 현실에 바탕을 둔 이야기에 매력을 느낀 탓이 크다.

클루조의 영화는 대개가 영화적인 유희를 위해 현실을 포기하는 편이었다. (<디아볼릭>의 숨진 남편이 마지막 장면에 살아 돌아오는 장면을 상기해보라!) 샤브롤이 아무리 히치콕의 영향력을 숨기지 않았다고 하지만 (클루조는 히치콕의 라이벌이기도 했다!) 구현에 있어서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영화적인 표현보다 실제에 바탕을 둔 현실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히치콕에 비해서, 또 클루조에 비해서 원작을 둔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다.

좀 더 풀어서 설명하자면, 샤브롤의 영화는 갑작스런 사건이 서사를 추동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부에 상존하고 있는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구체화를 띄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것은 계급의 문제일수도 있고(<미남 세르쥬><의식>), 남녀 간의 사랑을 대하는 근본적인 차이일수도 있으며(<도살자><초콜릿 고마워>), 역사가 가족사에 남긴 상흔의 흔적일 수도 있다(<여자 이야기><악의 꽃>). <지옥>은 강박증에 따른 이상심리의 비극이라 할만하다. 폴의 의처증은 실제로 넬리가 다른 남자와 정분이 났기 때문이 아니라 리조트 구입 당시부터 안고 있던 빚 문제가 부인에 대한 의심으로 드러난 경우이었다.

샤브롤은 늘 이성이 작동하는 공간과 시간에 대한 영화를 만들었다. 그가 늘 중산층 혹은 부르주아 계급을 즐겨 배경 삼은 이유는 최소한 이들이 인간이라는 가식을 내세울 만큼 삶의 조건을 갖춘 까닭이었다. 다만 샤브롤이 인지하는 인간의 이성이란 불완전한 형태로써, 도덕 혹은 윤리의 수면위로 흘러넘칠 듯한 지나친 욕구와 본능을 가리기 위한 (‘제어’가 아니다.) 수단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성의 둑이 터졌을 때 펼쳐지는 상황이 바로 그가 주목한 소재요, 다루는 주제이었다. 하늘에 있는 앙리 조르주 클루조가 샤브롤 버전의 <지옥>을 맘에 들어 할지는 모르겠지만 샤브롤 자신이 관심 가질법한 소재를 충실하게 영화로 옮겼을 뿐이다. 그리고 샤브롤의 영화를 대표할만한 작품으로 손색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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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mage
Claude Chabrol
(2010.12.14~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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