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랜드>(Joy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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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누구나 크고 작은 ‘공포’를 안고 살아간다. 오늘밤 혼자 걷는 밤길이 두려울 수도, 자신의 불투명한 미래가 무서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뿐이겠는가. 학생들에게는 곧 있을 중간고사가, 사장님에게는 제 날짜에 지급해야 할 직원들의 월급이, 직장인들에게는 월요일의 출근이, 부모님에게는 아이들이 원하는 모든 걸 해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형편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내게(?)는 몇 시간 남지 않은 마감이 그야말로 공포다. 또 누군가에게는 으스스한 유령의 집이 공포의 대상이 아닐까.

스티븐 킹의 <조이랜드>는 놀이공원을 배경으로 공포의 집에서 벌어진 잔혹한 살인 사건을 다룬다. 대학생 데빈 존스는 2년간 사귀었던 여자 친구와 헤어진 후 상처 받은 마음을 달랠 겸 ‘조이랜드’라는 놀이공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근무하기 전날, 하숙집 아주머니는 그에게 공포의 집에 얽힌 거짓말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남자 친구와 공포의 집에 들어갔다가 목이 베어 죽은 소녀가 있는데 유령이 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무서운 한편으로 호기심이 들기도 했던 데빈 존스는 내심 그 소녀의 유령을 목격하기를 기대한다.

짧은 요약만으로는 스티븐 킹의 상상력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공포소설인 것 같지만 <조이랜드>는 성장물이다. 데빈 존스가 그렇게 만나기를 학수고대하는 소녀의 유령은 소설의 마지막 장(章)에서야 비로소 존재를 드러낸다. 사실 <조이랜드>에서 중요한 건 유령의 존재가 아니다. 유령을 만나고 싶어 하는, 그 때문에 어두컴컴한 공포의 집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데빈 존스의 심리가 이 소설에서는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 이는 일반의 심리와 다를 바가 없는데 무섭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꼭 경험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공포의 집이 아닌가.  

경험한 이들은 알겠지만 공포의 집은 그 자체로는 무섭지만 경험하고 나면 실은 별 거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놀이기구다. 공포의 집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정해진 길을 따라가는 동안 심장박동이 빨라질 뿐이지 놀람 장치를 맞닥뜨리면서 느끼는 공포는 찰나의 순간이다. 공포의 집의 본질이 여기에 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미지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사람들은 지레짐작하는 무서운 상상만으로 자신을 극도의 공포에 빠뜨리는 것이다. 그래서 공포의 집을 나와 느끼는 허무한 감정에는 어둠을 극복했다는 일종의 성취감 같은 것이 짙게 배어있다.

인생이라고 다르지 않다. 한치 앞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기에 대체 어떤 형태가 될지 희극일지, 비극일지 다가올 시간이 두렵기만 하다. 데빈 존스에게는 헤어진 여자 친구의 존재가 꼭 그렇다. 워낙 뜨거웠던 사이였기에 이런 사랑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두렵기만 하다. 무엇보다 첫사랑이었던 만큼 그녀를 잃었다는 사실에 세상이 무너진 것만 같다. 하지만 <조이랜드>는 환갑을 눈앞에 둔 데빈 존스가 자신의 스물한 살 시절을 회고하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현재의 데빈 존스에게 첫사랑이란 이제는 즐거운 마음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추억 같은 것이다. 첫사랑의 이별이 준 공포를 극복하고 지금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스티븐 킹에게 <조이랜드>의 공포의 집은 성장에 대한 메타포다. 독자들에게 유령에 대한 공포를 잔뜩 심어놓은 후 소설의 마지막에 가서야 유령의 실체를 확인하게 만드는 구성은 공포의 집이 가진 속성을 반영한 것일 테다. 그전까지 데빈 존스는 첫사랑과의 이별은 물론이고, 희귀병에 걸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이웃한 열 살 소년을 통해 간접적으로 죽음을 경험하기도, 조이랜드에서 가장 친한 동료라고 생각했던 이에게 배신을 당하기도 하는 등 인생에 있어 가장 혹독한, 그러니까 도대체가 어떤 미래가 닥칠지 알 수 없어 무서운 시기를 경험하게 된다.

결국 이 모든 것을 극복한 데빈 존스에게 남는 것은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을 자신만의 추억과 무엇보다 성장이다. 성장은 공포를 이겨냈을 때 획득할 수 있는 달콤한 열매 같은 것이다. 스티븐 킹은 데빈 존스의 입을 빌려 행복이라고 표현한다. “마지막 행복한 시간은 항상 오는 법이고 어둠이 스멀스멀 다가오는 것을 보면 우리는 밝고 행복했던 것에 매달리게 된다.” 공포의 집에서 놀람장치가 발동하는 순간, 비명을 질러대는 우리의 모습이 그리 아름답지는 않지만 곧바로 웃을 수 있는 건 출구가 머지않았음을 알기 때문이다. 언제나 동이 트기 직전이 가장 어두운 법이다.

그래서 공포의 집을 경험한다는 것은 성장을 예행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것이 스티븐 킹의 작품이 오랫동안 꾸준히 사랑받는 이유일 것이다. 스티븐 킹의 작품은 장르상 공포물이지만 극 중 주인공들의 성장을 담보하는 까닭에 결과적으로는 성장물로 기능한다. <스탠 바이 미>의 아이들은 시체를 찾아 떠난 여행의 끝에서 정신의 키가 훌쩍 자란 자신들을 발견한다. <리시 이야기>의 리시는 남편을 잃은 후 혹독한 통과의례 끝에 홀로서기에 성공한다. 또한 <11/22/63>과 <셀>은 각각 JFK의 암살을 되돌리려는 시간여행물과 일상품이 되어버린 핸드폰이 공포의 발원지가 되는 좀비물이지만 당대의 공포를 반영하되 개인의 성장이 밑바탕 된다.

누구에게나 공포가 찾아오듯 모두가 통과의례처럼 이를 극복하며 성장한다. 우리 모두 데빈 존스처럼 스무 살 시절의 청룡열차에 탑승해 급작스런 상승과 하강의 희비쌍곡선 속에서 나름의 생존법을 터득한다. 그럼으로써 지금의 내가, 우리가 있는 것이기에 그 시간은 더없이 소중하다. 지금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스무 살 청춘들에게는 와 닿지 않겠지만 <조이랜드>에서 스티븐 킹이 쓴 이런 충고는 어떤가. “나는 그날로 돌아가서 인생이 항상 추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한다. 때때로 그 보상들은 실재한다. 때때로 그것들은 귀중하다.” 인생이라는 공포의 집에 발을 디딘 이상 이를 피할 방법은 없다. 출구를 향해 하나둘 공포를 맞닥뜨리며 지나갈 수밖에. 지나고 나면 그제야 인생이 소중해 보일 것이다.

새마을금고
2014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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