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문화를 망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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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들어 문화를 문화 그대로 즐기는 일이 상당히 피곤해지고 있다. 돌려 말하지 않으련다. 정치가 문화를 망치고 있다. 정치가 문화에 개입하면서 건설적이지 않은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영화 분야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국제시장>을 둘러싼 이념 다툼,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사퇴 압력 논란,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의 영화상영등급분류 면제 추천에 관한 개정 추진이 불러온 영화계의 반발 등이 그러하다.  
 
<국제시장> 논란은 천만 관객 돌파에 일조(?)하며 다소 조용해진 형국이다. 그와 달리 부산국제영화제와 영진위를 둘러싼 잡음은 현재 진행 중이다. 부산국제영화제 건의 경우, 집행위원장 사퇴 압박이 올해 20회를 맞이하는 영화제의 개선을 위한 권고 사항이었다며 부산시가 한발 물러난 상태다. 하지만 지난해 정부·여당이 상영을 막았던 <다이빙벨>의 영화제 초청에 따른 부산시의 보복성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영진위의 사전 심의 정책 개선 건도 본질에서 부산국제영화제 사태와 다르지 않다. 영화제는 일반 극장 상영과 다르게 등급분류면제 추천을 받아 감독들의 완전한 창작권을 보장해왔다. 영진위는 이를 등급면제추천권으로 바꿔 최고의결기구인 9인 위원회가 인정한 영화만 ‘면제’할 방침인 것으로 정해졌다. 영화계는 이에 대해 사실상의 사전심의와 검열이라고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실제로 1월 22일부터 27일까지 열린 ‘2015 으랏차차 독립영화’ 상영작 중 <밀양아리랑> <그림자들의 섬> <자가당착: 시대정신과 현실참여>(이하 ‘<자가당착>’)는 등급분류 면제 추천을 받지 못해 상영이 취소됐다. 그중 <자가당착>은 2011년과 2012년 당시 새누리당의 박근혜 대통령 후보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보였다는 이유로 상영금지와 다름없는 제한상영가 등급을 두 차례나 받은 적이 있다. 이에 반발한 영화의 제작진은 소송을 통해 제한상영가 등급 취소 판결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약속이라도 한 듯 비슷한 시기에 이뤄진 부산국제영화와 영진위 사태를 주도한 세력이 노리는 바는 자명하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해 정치적으로 민감하거나 지배 세력에 불리한 내용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게 하려는 속셈이다. 문화의 본질이 다양성임을 고려할 때 자신의 신념과 주의에 반대되는 의견을 인위적으로 막겠다는 건 당연히 문화의 가치를 훼손하는 발상이다. 안 그래도 우리는 정치적인 논쟁에 휘둘리지 않겠다고 정치적으로 논란이 될 부분을  제거했다가 엉뚱하게 곤욕을 치른 경우를 얼마 전에 목격했다.

‘가족영화로 만들고 싶었다. 거기서 민감한 정치의식이나 입장이 들어가면 불편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치적 시선을 배제했다.’ <국제시장> 개봉 후 정치적 잡음과 이념 논란이 끊이지 않자 윤제균 감독이 밝힌 입장의 요지다. 나는 윤제균 감독의 이야기 중 ‘정치적 시선을 배제했다’는 부분이야말로 논란을 촉발한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물론 그의 순수한 의도를 헐뜯을 생각은 없지만, 오히려 의도적인 정치적 중립성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의 소모적 논란을 불러 왔다고 보는 것이다.

이명박 정권 때도 그랬지만, 박근혜 정부 들어 한국영화계는 정치적 견해를 밝혔다가 이념 딱지가 붙는 것에 대해 상당히 경계하는 인상이 강하다. 일례로, <변호인>(2013)은 누가 보더라도 고(故)노무현 대통령의 1980년대 변호사 시절의 일화를 그대로 가져와 각색한 경우임에도 오프닝에 ‘실화를 바탕으로 하였으나 허구’라고 밝힌다. 행여 이 영화가 다루는 실제 인물과 정치적 이념을 달리하는 세력으로부터 정치적 공격을 받거나 그로 인해 발생하게 될 피해를 미연에 방지코자 한 제작진의 고육지책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가정 하나. 그렇다면 <변호인>의 오프닝에 언급한 자막을 넣지 않았다면 이 영화가 다루는 내용은 현 정권의 이념에 반(反)하는 불순한 작품이 되었을까? ‘그들’이 염려하는 정치영화가 되었을까? 천만이 넘는 관객이 목격했듯 <변호인>은 상식을 지향하는 세계를 염원하는, 지극히 상식적인 내용을 메시지로 삼는다. 그런데도 이 영화를 좌파영화라고 몰아붙였던 세력은 누구였던가?

장 뤽 고다르는 <네 멋대로 해라>(1962) <미치광이 삐에로>(1965) 등 프랑스의 누벨바그를 이끈 감독으로 유명하다. 이후 그는 68혁명을 예견한 <중국여인>(1967), 부르주아 집단을 조롱하고 경멸한 <주말>(1967) 등을 통해 정치적 견해를 여과 없이 드러내기도 했다. 이에 대해 고다르는 <구토>로 유명한 장 폴 사르트르와 잡지 <나는 고발한다 J’accuse>의 창간 멤버로 활동하며 “정치영화란 정치를 영화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정치화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고다르의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지금 우리 사회에서 영화를 정치화하는 세력은 <국제시장>의 비판 의견에 대해 싸잡아 좌파 딱지를 붙이며 이념 플레이에 여념이 없는 이들일 것이다. 그런 세력이 되려 <다이빙벨>을 상영했다 하여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의 사퇴를 압박한다. <자가당착>처럼 정부를 비판하고 집권 여당의 이념에 배치되는 영화들에 대해 사전 검열을 모의한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식의 비논리적인 압박은 역설적으로 이들이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그대로 노출한다.  

전염(傳染). 이들은 영화와 같은 문화 매체가 행여 사람들에게 나쁜(?) 버릇이나 태도 따위를 옮아서 물들게 할 거라는 망상을 병적으로 신봉한다. 그래서 분류법의 기준도 지극히 단세포적이다. 노무현을 다뤘으니 좌파영화, 아버지를 상찬하니 우파영화라는 식으로 이분법의 프리즘 안에 모든 사안을 욱여넣는다. 그들 생각일 뿐이고, 절대 다수의 대중은 편을 가르거나 자신의 이념을 확인하기 위해 영화를 보거나 리뷰하지 않는다. 그런 식이라면 <변호인>이 천만이 넘었을 때 진보에 물든 우리 국민들은 보수당이 정권을 잡은 정부를 향해 들고 일어났을 것이고, <국제시장>이 1천2백만 관객을 넘은 지금 우리 사회는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으로 노소 갈등을 일소에 해소했을지도 모른다.

굳이 정치를 앞세우지 않더라도 이전부터 사회적으로 민감하거나 은폐됐던 부조리를 용감하게 끄집어내 세상을 바꾸려는 (혹은 바꾼) 영화들이 있었다. <부러진 화살>(2011)은 집단 이익을 위해 공정성을 내던진 검찰을 비판하며 국민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도가니>는 장애인 성폭행과 관련한 사학재단의 비리를 폭로하며 도가니법의 제청을 이끌어 내 가해자들이 그에 합당한 죗값을 달게 받도록 하였다.

이처럼 사회의 부조리를 세상에 알리고 그에 대한 견해를 밝히는 것은 세상을 바꾸기에 앞서 영화의 다양성에 일조한다. 우려되는 건 표현의 자유가 공격받고 그로 인해 다양성이 훼손되면서 한국영화계가 작품의 참신성보다 흥행 여부에만 몰두하며 빠른 속도로 시시한 영화를 양산한다는 데 있다. 정부 여당의 무능이나 비리를 드러내는 의견에 대해 재갈을 물리는 시도 앞에서 더욱 경직되지는 않을까 하는 점이다.  

겨울 극장가도 그랬지만, 설 연휴 동안의 멀티플렉스 극장을 도배한 한국영화들을 살펴보면 천편일률적이다. 장르와 소재의 다양성과 상관없이 전반부는 웃음, 후반부는 감동이라는 흥행 공식에 집착한 무개성의 영화들로 넘쳐난다. 일례로 <허삼관>이 원작으로 삼았던 위화의 소설은 문화혁명 시기를 배경으로 그로 인해 고통받는 주인공 가족의 모습에서 인생의 회로애락을 가감 없이 끄집어내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에 반해 영화는 한국으로 배경으로 옮겨 각색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배경은 철저히 제거한 채 부성애를 앞세운 작금의 트렌드를 따랐다가 빛을 못 본 경우였다.  

이처럼 영화가 단순 소비재로 역할이 갈수록 제한되고 있는 것이 우리 영화 시장의 현주소다. 일차적으로 문화를 다양성보다 산업의 논리로 바라보는 대기업이 영화 산업을 장악했기에 나온 결과다. 이는 영화를 비롯한 문화가 오락물로만 기능하기를 바라는 정치 세력들이 원하는 시장의 모습이다. 그리고 우리는 제일 잘하는 것이 문화라고 선전했던 대기업이 사주의 비리로 위기 상황에 직면하자 정부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민감한 소재나 견해의 작품을 희생시킨 사례를 심심찮게 목격했다.

이런 풍토 속에서 웬만한 배짱을 가진 창작자가 아니고서는 시장 논리에 반하는 작품을 만들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데뷔조차 힘들고 더욱이 지속 가능한 창작 활동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가급적 산업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주류 세력의 눈 밖에 나기를 원치도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올해 들어 더욱 가열되고 있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침해 사례는 영화를 망치는 가장 악질적인 경우라 할 것이다.

이념을 가지고 문화계를 재단하는 건 지난 정권부터 이어진 현재의 집권 세력의 행태다. 물론 문화를 억압하는 움직임은 1980년대 이전에도 있었지만, 도덕적인 문제를 시비로 재갈을 물렸을지언정 좌파라는 이유로 배척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국가보안법이 존재하지만, 이념 자체만 가지고 몰아붙이는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그 과정에서 이념과 무관한 이들이 피해를 보는 사례가 등장했고 결국에는 멀쩡한 예술인들을 투사로 만들었다. 지금도 많은 영화인이 표현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투사를 자처하고 있다. 정치가 영화를 망치려는 걸, 문화를 욕보이는 걸 막기 위해서다. 문화가 정치에 잠식된 사회는 희망이 없다. 그래서 정치로부터 문화를 보호해야 하는 것이다.  

일러스트 허남준
 

ARENA HOMME
2015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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