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디 앨런의 영화를 좋아한다. <돈을 갖고 튀어라>(1969) <애니홀>(1977) 등 초창기 작품은 직접 출연까지 한 우디 앨런의 자기비하적인 유머가 재밌게 다가왔다. <카이로의 붉은 장미 >(1985) <라디오 데이즈>(1987) <브로드웨이를 쏴라>(1994) 등의 1980, 90년대 작품은 영화, 라디오, 연극 매체 등을 끌어와 우리의 초라한 현실을 자각하게 하는 이야기가 꽤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그리고 스칼렛 요한슨이 출연한 <매치포인트>(2005)부터 제시 아이젠버그와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출연한 <카페 소사이어티>(2016)까지 2000년대 이후 최근작들은 우디 앨런 ‘할배’가 자식뻘의 젊은 배우와 호흡하여 영화를 만드는 것 자체가 흐뭇하게 느껴진다.
1935년생인 우디 앨런은 한국 나이로 올해 여든한 살이다. 1930년생인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함께 할리우드 노장 감독의 저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감독으로 유명하다. 특히 우디 앨런은 1년에 적어도 영화 한 편씩을 연출, 지금까지 47편의 장편을 만들며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우디 앨런(과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나이 정도 되는 감독의 신작이라면 대개 언론에서는 예우 차원에서 평가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젊은 감독들과 견주어도 전혀 뒤질 게 없다. 아니 평범한 영화조차 젊은 감독들의 최고작보다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길 때가 많다.
확실히 우디 앨런의 최근작들을 붙들어 버티는 건 연륜이라는 생각이 든다. 슬로우 스탭으로 인물에게 접근해 가벼운 잽을 날리는 이야기를 구사하는 것 같은데 영화를 보고 나면 강력한 훅을 한 방 맞은 것 같은 느낌이 신선하다. <카페 소사이어티>만 해도 1930년대 미국의 황금기를 대표했던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의 배경을 오가는 설정만으로 거대한 스케일을 과시하는 것 같다. 그런데 실제로는 명사들이 즐겨 드나들어 ‘카페 소사이어티’라고 이름이 붙은 제한된 공간에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역시나 우디 앨런스럽다는 인상을 준다.
<카페 소사이어티>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바비(제시 아이젠버그)는 할리우드의 거물 에이전트이자 삼촌인 필(스티브 카렐)을 찾아 로스앤젤레스로 온다. 삼촌의 도움으로 영화 일을 통해 크게 성공하겠다는 야심 때문이다. 삼촌은 로스엔젤레스가 문외한인 바비를 위해 비서 보니(크리스틴 스튜어트)를 붙여준다. 매력적인 보니에게 첫눈에 반한 바비는 그녀의 마음을 뺐은 데 성공하지만, 결혼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보니는 바비와 사귀기 전 유부남과 만나고 있었는데 그 대상이 바로 필이었고 끝내 그와 결혼하는 것이다.
로스앤젤레스 생활에 정나미가 떨어진 바비는 뉴욕에 돌아와 갱단에 몸을 담은 친형의 도움으로 카페 소사이어티를 차려 크게 성공한다. 그리고 몇 년 후 바비의 성공 소식을 듣고 필과 보니 커플이 로스앤젤레스에서 카페 소사이어티로 찾아온다. 이 커플을 바라보는 바비의 마음은 그리 편하지만은 않다. 이들에게서 배신당했다는 마음이 아직 가시지 않아서다. 하지만 오랜만에 보니와 단둘이 얘기를 나누고 묵었던 감정을 털어버린 바비는 내레이션을 통해 이런 식의 얘기를 한다. ”지나고 나면 다 꿈인 것을, 시간이 깨우는 현실” 과거에 얽매이지 말라는 것이다.
전혀 새로운 메시지라고 할 수 없지만, 우디 앨런 영화의 경우라면 다가오는 바가 예사롭지 않다. 삶의 A to Z를 통달한 이의 지혜라는 생각에 마음속에 꾹꾹 눌러 담고 싶은 심정이 든다. 그와 같은 인상이 더욱 강렬한 건 제시 아이젠버그와 크리스틴 스튜어트 같은 젊음의 빨간 점이 체온계를 뚫고 나올 것 같은 혈기왕성한 배우들을 주인공으로 캐스팅하는 까닭이다. 그러니까, 영화를 빌미 삼아 젊은이들과 대화를 나누려고 하는 우디 앨런의 최근 작품이 주는 가장 중요한 지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실제로 우디 앨런은 <카페 소사이어티> 외에도 <이레셔널 맨>(2015)의 와킨 피닉스와 엠마 스톤, <로마 위드 러브>(2012)의 앨런 페이지, <미드나잇 인 파리>(2011)의 레이첼 맥아담스,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2008)의 레베카 홀과 스칼렛 요한슨 등 거의 매 작품 젊은 배우를 캐스팅해왔다. 그냥 구색 맞추기가 아니라 이들이 극을 끌고 가는 주인공이라는 점에서도 우디 앨런의 영화가 지향하는 바를 우회적으로 짐작해볼 수가 있다.
우디 앨런이 영화를 만든다고 하면 할리우드의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경쟁적으로 참여하지만, 이들이 출연료로 챙기는 건 평상시의 10/1~20/1 수준이다. 놀랍게도 우디 앨런의 영화는 할리우드에서 저예산에 속한다. 제작비가 대략 2,000만 불, 우리 돈 300억이 조금 넘는 수준이다. 100억 원 대인 한국 블록버스터 영화와 비교하면 거대 예산이지만, 전 세계를 배급망으로 두고 있는 할리우드를 고려하면 높은 액수가 아니다. 그런데도 빅스타들이 우디 앨런의 영화에 줄을 서는 건 얻는 게 있어서다. 그건 칸영화제 개막작과 같은 명예, 또는 <블루 재스민>(2013)의 케이트 블란쳇처럼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의 영예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우디 앨런의 작품에 참여했다는 것 자체를 영광으로 느끼는 분위기다.
우디 앨런의 인터뷰를 엮은 책 <우디 앨런 뉴요커의 페이소스>(로버트 E. 카프시스, 캐시 코블렌츠 엮음 | 오세인 옮김)에 따르면, 우디 앨런은 촬영 현장에서 배우들에게 상당한 자유를 허락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저는 늘 배우들에게 말해요. 원하는 대로 대사를 바꾸세요. 저는 모든 배우가 나무랄 데 없는 연기를 보여주는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그래서 우디 앨런은 배우를 존중한다. “배우들을 지도할 때, 한쪽으로 조용히 불러 얘기해요. 그냥 세트 한가운데서 ‘좀 더! 이렇게 좀 더 해보란 말이야!’라고 소리 지르지 않습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나는 우디 앨런이 어떻게 젊은 배우들과 꾸준히 작업할 수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에서 우디 앨런과 작업한 적 있던 골디 혼(<조강지처 클럽> <죽어야 사는 여자> 등)은 이에 대해 ‘좋은 양육법에 비유’하며 다음과 같은 얘기를 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그들의 모습이 옳다고 생각하는 삶의 모습을 강요하려는 경향이 있죠. 뭘 해라, 뭘 하지 마라, 뭘 해야만 한다, 뭘 해서는 안 된다, 하면서 아이들의 영혼을 우리 안에 가두려 하죠. 우디는 배우들이 스스로 창의력을 자유롭게 실험할 수 있는 공간을 내줘요.”
청년 세대와 노년층이 서로에게 등을 돌리며 전선을 그은 우리에게는 꽤 부러운 풍경이다. 청년들은 자신들을 이끌어줄 리더가 없다고 어른 부재의 상황에 아쉬움을 진하게 느끼는 터다. 기성세대는 그런 젊은이들을 향해 어른의 말을 무시한다며 고래고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그 바탕 중 큰 줄기에는 장유유서를 빙자한(?) 상명하복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무슨 일이 발생하든 젊은이들을 향해 ‘가만히 있으라!’며 손발을 묶은 후 자신들의 안위와 이득은 귀신같이 챙기는 어른들이 신뢰를 잃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세월호 사건의 후유증이 여전한 상황에서 대형지진이 발생하자 학생들의 대피 길을 마련하기는커녕 자습을 시켜 도마 위에 오른 선생이 있었다. 리틀야구단을 이끄는 어느 지도자는 세계대회 결승에 나선 어린 학생들을 독려하고 힘을 북돋워 주지는 못할망정 기대에 못 미치는 플레이를 한 선수를 야단치고 윽박지르는 등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모 국회의원은 백남기 농부의 사망에 대해 물대포를 맞고 뼈 안 부러진다며 막말을 해 논란을 일으켰다. ‘어버이’를 사칭하는 깡패 집단은 한일 위안부 졸속 협상 무효를 주장하는 대학생들을 향해 종북좌파를 외치고 협상을 수용하라는 등의 비상식적인 행동으로 국민의 분노를 샀다.
물론 모든 어른이 그런 것이 아니다. 또한, 몰지각한 일부 어른들이 행하는 잘못된 행동만큼이나 젊은 세대가 저지르는 악행 또한, 위의 예처럼 열거할 수 있을 정도다. 결국, 서로가 평행선을 그으며 각자도생의 길로 나아가는 기저에는 애초부터 실종된 대화 혹은 소통의 기술에 있다. 그렇다고 이상적인 형태의 소통에 대해서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대화는 기본적으로 상대방을 존중하는, 즉 서로가 동등할 때 이뤄지는 법이다. 근데 우리 문화라는 것은 서로서로 마주함에 있어 서열을 따지다 보니 자신보다 신분이 높거나, 나이가 많은 경우, 부담스러울 때가 많다.
이럴 때 어른의 역할 중 하나는 분위기를 누그럽게 가져가 대화를 이끄는 데 있다. 혹자는 아랫사람을 향한 대화를 충고와 야단으로 혼동해 관계를 망치고는 한다. 그러다 보면 아랫사람들은 행여 윗사람의 비위를 거슬리는 것은 아닐까 노심초사하게 된다. 그렇게 서로가 눈치를 보는 관계가 지속하다 보면 이들이 속한 집단은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갈등의 형태가 대개는 이런 사회적 배경을 바탕으로 이뤄지고 있음은 명약관화하다.
우디 앨런은 촬영 현장에서 배우의 연기에 대해 두 번 이상 테이크를 가는 경우가 별로 없다고 한다. “보통은 배우들이 알아서 하는데, 만일 그렇지 않을 때에는 제가 교정을 해주죠.” 교정을 해도 효과가 없을 때 우디 앨런이 대처하는 방식이 압권이다. “제가 설명을 해주면서 이렇게 말하죠. ‘그 대사를 제가 다시 한 번 볼게요. 아마도 시나리오를 쓰면서 뭔가 실수를 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곤 그 대사를 저 스스로 소리 내어 읽어요. 그저 독백으로 읽는 것처럼 하지만, 동시에 배우들도 듣게 하는 거죠. 그리고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설명하는 대신 제가 직접 연기를 해 보여요.”
언제부턴가 한국사회의 의사 결정은 한 사람의 지시에 의해 이뤄지는 경향이 짙다. 그의 말 한마디에 따라 아래에서는 정확한 의중을 파악하느라 혼선을 빚고 이것이 이념과 정파에 따라 결정되다 보니 늘 편을 가르는 방식으로 정책이 마련되어 사회 곳곳에서 갈등을 빚는 것이 다반사다. 여기에는 맨 윗사람을 제외하고는 개인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모두가 하나로 매도되는 상황에서 개인을 향한 존중과 대화의 성립은 불가능하다. 나 같이 혼자 움직이기 좋아하는 사람조차 지금의 상황이 숨 막힐 정도인 걸 보면 심각하다는 얘기다. 그래서 젊은 배우들과 환상의 호흡을 맞추는 우디 앨런의 영화에 더 눈이 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ARENA HOMME
2016년 11월호
평론가님 말씀대로 앨런의 연출방식을 보면 소통이란 무엇인가의 정의를 내려주는 좋은예인것같습니다^^
항상 좋은 말씀주셔서 고맙습니다 ^^ 안 좋은 부분이 있거나 동의하지 못하겠는 부분도 있으시면 말씀주세요. 제가 자기 세계 안에만 갇혀 있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게 많거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