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전 한 잔>(A Drink Before The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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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 같은 세상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1%의 부자를 위해 99%의 서민이 착취 받는 국가? 나라님을 보좌한답시고 경찰이 국민을 폭력으로 짓밟는 나라? 아이의 건강을 사수하기 위해 촛불을 든 부모는 구속되면서 탈세한 대기업의 사주는 검찰의 비호 속에 떵떵거리며 사는 사회? 결국 이런 꽃 같은 경우들이 우리 아이들에게 여과 없이 체득되는 곳이야말로 지옥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 바로 데니스 루헤인이다.

데니스 루헤인은 현재 할리우드가 가장 선호하는 작가다. <미스틱 리버>를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가라, 아이야, 가라>를 벤 애플렉이, <살인자들의 섬>을 마틴 스콜세지가, <기븐 데이>를 샘 레이미 감독이 연출했거나 연출 중이거나 연출할 예정일 정도로 할리우드가 그에게 쏟는 관심은 그야말로 절대적이다. 이를 두고 데니스 루헤인의 국내 전속번역가(?)로 잘 알려진 조영학은 “그 흔한 추격 장면 하나 없는 탐정 소설이 무슨 매력이 있겠는가. 루헤인은 특히 등장인물들의 개성을 극한까지 드러내는데 많은 정성을 쏟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말한다. 아닌 게 아니라, 캐릭터가 곧 이야기임을 천명하는 ‘사립탐정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는 데니스 루헤인의 대표작이라 할만하다.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는 현재까지 총 다섯 편이 발표됐다. 국내에는 4편과 5편인 <가라, 아이야, 가라> <비를 바라는 기도>에 이어 1편인 <전쟁 전 한 잔>이 뒤늦게 번역됐다. 특히 <전쟁 전 한 잔>은 하드보일드소설의 전무후무한 남녀 사립탐정 커플인 켄지와 제나로의 보스턴을 무대로 한 활약상이 처음 소개되는 만큼 시리즈가 지향하는 주제와 핵심 정서가 모두 담겨있다는 점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작품이다.

시리즈가 소개하는 첫 번째 의뢰가 상원의원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점, 그것이 흑인 청소부가 가져간 사진과 관계있다는 점, 그녀를 찾자마자 지역 갱 조직에서 보낸 암살자에게 습격을 받는다는 점, 암살자의 정체가 새파랗게 어린 아이라는 점, 그리고 이를 조장하는 기성세대가 뒤에 버티고 있다는 점에서 <전쟁 전 한 잔>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이 시리즈가 다름 아닌 아메리칸 드림으로 포장된 미국 사회의 이면에 감춰진 어두운 그림자, 즉 고위층 사이에 뿌리내린 비리와 이를 위장하기 위해 인종 차별과 청소년 범죄, 아동 학대와 가정 폭력이 방조되는 사회를 고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데니스 루헤인이 보여주고 있는 보스턴은 우리가 아는 것과 달리 사람 살만한 곳이 아니다. 솜털 뽀송뽀송한 아이들마저 타락한 어른들의 사리사욕에 휘말려 일상을 범죄에 내맡긴 채 파리처럼 죽어나가기 일쑤인 보스턴은 지옥의 다른 이름이다. 안 그래도, 데니스 루헤인의 작품에서 아이들은 온전한 적이 없었다. 영문도 모른 채 범죄에 휘말려 싸늘하게 죽어나가거나(<가라, 아이야, 가라>), 유년시절에 겪은 사건의 기억을 트라우마로 간직한 채 비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기(<미스틱 리버>) 일쑤다. (두 편의 소설이 데니스 루헤인의 걸작이란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켄지와 제나로가 맞닥뜨리는 사건의 결말은 늘 이런 식이다. 사이코패스가 아니고서야 이런 광경을 마주하고 제정신일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제아무리 냉소와 비아냥거림, 그리고 권총 한 정으로 세상과 ‘맞짱’뜨는 미국의 사립탐정이라고 해도 위안거리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켄지와 제나로에게 그것은 서로에 대한 사랑뿐이다. 사랑이야 말로 이들의 유일한 희망이요, 안식처다. 그러니까 범죄의 도가 더할수록 이들의 사랑도 더 깊어질 수밖에 없는데 역설적으로 이들의 사랑은 보스턴의 범죄가 낳은 불행한 씨앗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켄지와 제나로의 관계는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 범죄는 날이 갈수록 강도를 더하고 서로에게 위안 받으려는 욕망은 더욱 커지고 이는 급기야 있지도 않은 자신들의 아이에 대한 걱정으로까지 이어져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니, 그래서 권(卷)을 더할수록 미묘하게 변해가는 켄지와 제나로 사이의 감정이 이 시리즈의 백미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닉 혼비는 저서 <닉 혼비 런던스타일 책읽기>에서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 중 한권인 <비를 바라는 기도>를 두고 “반복해서 등장하는 주인공이 왜 매력적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며 “<미스틱 리버>야말로 데니스 루헤인 최고의 작품”이라고 말했다. <미스틱 리버>가 걸작인 것은 사실이지만 혼비의 말에는 100% 동의하지 못하겠다. 루헤인 최고의 작품은 다름 아닌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니까. 처음부터 읽어본 사람이라면 다 안다. 범죄와 사랑이라는 모순된 두 이야기가 하나로 결합하여 켄지와 제나로의 정체성으로 화한다는 것을. 그래서 켄지와 제나로의 삶이 보편성을 획득한다는 것을. (이 비극적인 이야기가 보여주고 있는 배경이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옥 같은 상황과 다르다고 누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고작 <비를 바라는 기도>를 읽고 시리즈를 평가하는 편협함이라니. 나는 닉 혼비의 <하이 피델리티>를 사랑하지만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에 비하면 63빌딩 높이만큼이나 저 아래 순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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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일보
(200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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