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하라, 그리고 전복하라!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설국열차>와 <더 테러 라이브>는 압도적인 흥행만큼이나 숱한 이야깃거리 들을 남겼다. 각각 CJ와 롯데라는 공룡 기업을 등에 업은 영화라는 점에서 스크린 독과점 문제를 다시금 촉발시켰지만 영화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인 쪽이 많았다.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의 경우, 한국영화에서는 그동안 좀 체 볼 수 없었던 SF라는 사실과 더불어 해석의 여지가 풍부한 점이 높은 점수를 받았다. 김병우 감독의 <더 테러 라이브>는 35억의 적은(?) 예산에도 불구하고 마포대교 붕괴와 같은 거대한 스케일을 선보일 뿐 아니라 기대치를 훨씬 웃도는 완성도로 예상외의 재미를 제공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여기에 하나를 더 보태고 싶다. 날로 보수화되는 한국 블록버스터 영화의 흐름 속에서 두 영화는 연인의 사랑, 가족의 결합 같은 진한 감정에 호소하는 이야기 대신 거대한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분노를 극의 동력으로 삼는다. <설국열차>는 계급이 칸으로 분류된 기차 속에서 더 나은 삶을 위해 맨 앞 칸으로 전진하는 꼬리 칸의 반란이, <더 테러 라이브>는 기득권층으로부터 합당한 보상을 받지 못한 사회적 약자가 테러를 최후의 수단 삼는 광경이 전복적인 기운으로 화하는 것이다.  

장르도 다르고 배경도 상이하지만 체제 저항을 기저에 깔고 있는 두 영화는 공통의 목적을 향해 달려간다. 우연처럼 같은 날(7월 31일) 개봉하게 됐지만 시대의 요청에 화답한 것처럼 느껴지는 건 꼬리 칸의 계급을 갖고 있는 대다수 약자의 어떤 속마음을 대변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기 때문이다. <설국열차>가 전 세계를, <더 테러 라이브>가 한국 사회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게 미묘한 차이라면 차이일까.

여기서 ‘어떤 속마음’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두 영화 모두 시스템 파괴를 권장(?)하는 메시지를 마케팅 과정에서 속 시원히 밝히지 않는 까닭이다. 극 중 이와 관련한 이야기가 반전이라는 명목 상 스포일러로 분류되고 있을 뿐 아니라 국가 체제를 부정하는 언행이 자유롭지 않은 우리 사회의 경직된 분위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기사에서도 <설국열차>와 <더 테러 라이브>의 결말은 아쉽지만 밝히지 않기로 한다, 는 농담이고. 개봉한 지 꽤 지났고 본 관람객들도 많으니 결말을 스포일러해도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럼에도 영화를 안 보신 분들이라면, 스포일러 주의!) 봉준호는 <설국열차>에서 계급을 나누는 기준을 인종으로 접근한다. 머리 칸에는 열차의 창조주인 백인인 윌포드(에드 해리스)가 자리하고 있고 꼬리 칸에는 온갖 인종들이 뒤섞여 있다. 그런데 꼬리 칸에서도 반란을 이끄는 리더는 다름 아닌 ‘백인’ 커티스(크리스 에반스)다. 열차로 은유되는 이 세계의 지배 체계는 백인이 움켜쥐고 있다. 만약 꼬리 칸의 반란이 성공한다면? 윌포드에서 커티스로 인물이 교체되지만 인종은 바뀌지 않는다. 백인 지배로의 회귀인 셈이다.

봉준호는 바로 이 시스템의 파괴를 꿈꾼다. 윌포드에서 커티스로의 지배권 이양이 이뤄지려던 순간, 이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 동양인 요나(고아성)와 흑인 토미다. 커티스가 기차 내의 반란을 꿈꾸는 것과 달리 요나와 토미는 아예 기차를 뚫고 나와 눈으로 꽁꽁 얼어붙은 세상의 새로운 아담과 이브가 된다. 할리우드, 즉 미국의 시각에 익숙한 우리에게 이는 전혀 새로운 사고(思考)다. 1년 주기로 전 세계를 순환하는 열차가 선로를 이탈해 전복하는 마지막 장면은 그래서 전위적이다. 세계의 리더로 앞장서거나 활동했던 건 늘 미국이었고 백인이었는데 봉준호 감독은 이를 완전히 부정하며 신인류가 이끄는 새로운 세계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다.  

<설국열차>가 ‘희망’을 전제한다면 <더 테러 라이브>는 비극적이지만 통쾌한 결말로 강한 인상을 남긴다. 기본적으로 <더 테러 라이브>는 폭탄을 품안에 숨기고 적진을 향해 달려드는 가미카제의 기운으로 극의 긴장감을 이끌어낸다. 더 정확히는 마포대교 보수 공사 도중 추락사한 일용 노동자의 동료가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다 여의치 않자 테러를 감행한다. 테러의 일차 대상이 되는 곳은 국민과 진실의 편에 서지 않는 방송국이다. “속보가 주는 현장감을 고스란히 스크린에 옮기고 싶어 방송국을 배경으로 했다”는 감독의 말은 차치하고 정권의 나팔수로 전락한 작금의 방송국을 향한 분노의 감정은 극 중 노동자의 것만은 아닐 것이다.

다만 방송국은 분노의 최종 지점이 아니다. <더 테러 라이브>가 테러(?)를 감행하려는 곳은 따로 있다. 우리는 지난 몇 년간 억울한 사연을 가진 약자들의 정당한 요구가 기득권층에게 어떻게 묵살당하고 범죄행위로 변질되었는지를 숱하게 목격해왔다. 그 과정에서 방송국은 그 자신들의 입장에 맞게 여론을 조장했고 이를 뒤에서 실질적으로 조정한 세력은 특정 정치집단이었다. 그러니 이 영화가 테러의 궁극적인 대상으로 바라보는 곳은 국회다. 마포대교를 폭파시킨 노동자는 방송국 빌딩마저도 목표로 삼는데 급기야 이 고층빌딩이 무너져 내리면서 덮치는 건물이 바로 국회인 것이다.

나는 이 영화들이 보여주는 불온한 결말을 마주하면서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중반을 장식했던 미국의 ‘아메리칸 뉴 시네마 American New Cinema’의 결기 같은 것이 느껴졌다. 아메리칸 뉴 시네마란 보수적이던 기존 상업 영화를 거부하며 등장한 일군의 작품을 일컫는다. 아서 펜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1967), 조지 로이 힐의 <내일을 향해 쏴라>(1969),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1972) 등이 이에 속한다. 이들 영화는 특히 기존의 선악 기준을 흔들어 기성세대와 기득권 세력을 조롱하고 공격하며 당대의 미국인들을 넘어 전 세계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오해는 마시길! <설국열차>와 <더 테러 라이브>의 사례만 가지고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한국 재림과 같은 과장된 수식을 할 생각은 없다. 주목하고 싶은 건 이들 영화의 출현이 당대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축적된 불만과 속내를 반영한 결과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세상이 하수상할 때면 필연적으로 좋은 영화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경우,  베트남 전과 같은 미국 기성세대의 폭력성에 대한 젊은 세대들의 불만이 영화 쪽으로 전이되어 나온 결과였다. 프랑소와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1959),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1960)로 대표되는 프랑스의 ‘누벨바그 Nouvelle Vague’는 또 어떤가. 기성세대의 영화와 그들의 도덕성 등 기존 시스템에 반발한 젊은 세대의 영화적 혁명이었다.

사회가 만들어낸 결핍은 양질의 문화가 자라날 좋은 토양이 되고는 한다. 아메리칸 뉴 시네마, 누벨바그처럼 세계 영화사(史)의 굵직한 사조가 출현했던 시대와 비교해 지금 현재 우리의 상황도 만만치 않다. 99%를 지배하는 1%의 탐욕이 경제의 근간을 흔드는 가운데 노동자들은 가족을 부양할 돈이 없어, 젊은이들은 일 할 직장이 없어, 서민들은 편히 발 뻗고 누울 집이 없어 거리로 내몰리고 있고 급기야 죽음을 선택할 정도인 것이다. 과거의 경우를 감안하면, 한국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들불처럼 번지는 대규모의 결핍이 예술적으로 승화될 때 이전의 패러다임을 흔드는 ‘뉴웨이브’로 화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아쉽게도 아직 구체적인 기운이 목격되지는 않는다. <설국열차>와 <더 테러 라이브>의 경우만 가지고 운동 혹은 사조라 하기에 그 수가 현저히 부족하다. 무엇보다 안전한 수익 보장을 지향하는 현재의 상업영화 시스템이 견고한 담을 두르고 있다. 전위적인 메시지를 노골적으로 탑재한 영화들이 터진 둑에서 쏟아져 나오듯 세를 형성하기에는 애초 한계를 안고 있는 것이다. <설국열차>와 <더 테러 라이브>가 애초 논란이 될 만한 이야기를 반전(反轉)의 형식으로 뒤로 몰아넣고 그 내용에 대해 철저히 함구했던 것은 지금의 제작 시스템에서 발현할 수 있는 체제 저항적인 메시지의 최대치가 이 정도 수준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새로운 영화에 대한 갈증이 심한 이들에게는 성에 차지 않을지 모르지만 최근 한국영화의 지형도는 영화 자체만 놓고 봤을 때 알게 모르게 조금씩 진보하는 방향으로 변화를 모색해왔다. 예컨대, 영화의 최대 소비층인 20~30대 여성들의 전유물인 ‘꽃미남’ 문화를 빌려왔지만 <은밀하게 위대하게>를 비롯하여 곧 개봉을 기다리는 박홍수 감독, T.O.P  출연의 <동창생>, 원신연 감독, 공유 출연의 <용의자> 같은 경우, 민감한 남북 관계 때문에 오랫동안 한국영화에서 외면해 왔던 북한 사람들이 극을 이끄는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첩보물은 아니지만 김남길, 손예진이 출연하고 이석훈 감독이 연출 중인 <해적>은 제목처럼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한 해적이 전면에 나선다.

언급한 영화의 주인공들은 선악의 개념을 완전히 뒤엎은 인물형이다. 한국형 블록버스터로 불리는 영화 속 인물들이 주로 도덕적이고 호감형의 인물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눈에 띄는 변화다. 이들 영화들이 <설국열차> <더 테러 라이브>처럼 혁명, 반란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의 어둠을 전시해 좀 더 세상을 넓게 바라볼 수 있도록 시야를 넓힌다는 점에서 비슷한 흐름 속에 놓아도 괜찮을 것 같다. 영화가 혁명을 이야기한다고 이를 본 이들이 반란을 도모한다는 발상은 난센스다. 빛과 어둠이 쌍을 이뤄야 비로소 세상이 균형을 이루듯 영화 역시 진보적 작품의 출현으로 관객을 새로운 세상으로 안내할 수 있는 것이다. 제2, 제3의 <설국열차>와 <더 테러 라이브>가 필요한 이유다.

ARENA
2013년 9월호

답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