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시대사랑> 장률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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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률 감독의 <필름시대사랑>은 4개의 장(章)으로 이뤄졌다. 1장 ‘사랑’은 손녀(한예리)가 병문안을 간 병원에서 할아버지(안성기)와 청소부(문소리) 간에 소동이 벌어진다. 알고 보니 사실이 아니라 영화 촬영 내용이었다. 하지만 촬영이 끝난 후 조명 퍼스트(박해일)가 감독을 향해 이렇게 영화를 찍으면 안 된다고 일갈하고는 현장을 떠난다.

2장 ‘필름’에서는 배우와 스태프가 모두 떠난 ‘사랑’의 빈 공간을 비롯해 그 주변을 카메라에 담는다. 3장 ‘그들’은 ‘사랑’에 출연했던 배우들 각자의 대표작과 장면을 대사 없이 무성으로 이어 붙여 새로운 영화로 콜라주 한다. 그리고 4장 ‘또, 사랑’에서는 ‘사랑’에 나왔던 공간을 배우 없이 이야기 전개 순서로 다시 비추되 그 위에 내레이션으로 1장과는 변주된 대사를 덧붙인다.

<필름시대사랑>은 제8회 서울노인영화제 개막작으로 제작된 <동행>에서 파생됐다. 장률 감독의 표현에 따르면, <동행>을 만든 후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더란다. 그 결과가 바로 <필름시대사랑>이다. <동행>을 마친 후 영화 속 정신병원 배경으로 등장했던 해당 공간에 대한 이야기에 배가 고팠다는 장률 감독을 만나 그 이유에 관해 물었다.


<동행>과 <필름시대사랑>의 연관성은 어떻게 되나요?
<동행>은 단편, <필름시대사랑>은 장편입니다. 작년에 서울노인영화제에서 올해 개막작으로 단편 하나를 만들어달라고 연락이 왔어요. 그걸로 시작했습니다. 배우들도 그것 때문에 왔고요. 3일을 함께 찍었어요. 재밌게 끝내고 다 돌아갔어요. 그런데 나는 며칠 동안 잠을 잘 못 잤어요. 끝나지 않은 찝찝함이 있었어요. 좋은 배우들과 단편으로 찍었는데 다시 부를 수는 없잖아요. 스태프 몇 명에게 연락해 이틀 동안 그 공간에 가서 다시 촬영하자. 3일간 배우들과 함께했던 병원으로 가서 빈 공간을 찍었어요. 그렇게 완성된 게 <필름시대사랑>입니다.

‘끝나지 않은 찝찝함’은 무엇으로부터 기인한 걸까요?
극 중에서는 정신병원이었는데 실제로는 폐업한 병원이었어요. 그 공간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공간에 아직 남은 정서들이 있지 않으냐. 작품을 만들 때 그 현장은, 그 공간은 해당 영화를 위해 많이 착취당하지 않습니까. 촬영을 마친 후 가고 나면 그만인데 영화 찍던 사람들이 사라지고 남은 공간은 무엇인가, 그런 생각을 왕왕했습니다.

맞는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일종의 범죄자의 심리였군요? (웃음)
범죄를 저지른 자가 범죄 현장에 다시 가본다. (웃음) 영화는 과연 촬영하고 나면 그 공간과의 관계가 끝인 건가, 그에 대해서 어떤 정서가 남아 있는가. 그래서 다시 가서 지하를 제외한 그 공간의 지상층을 모두 찍었어요. 지하는 유해물질이 있다고 해서 찍지 않았어요. 대신 병원 옆에 운동장 지하에서 촬영했습니다. 그러다가 많은 사람이 모였다가 경기가 끝나면 모두 사라지는 그 공간은 또 무엇인가. 그런 생각들을 확장하면서 찍었던 거죠.

<필름시대사랑>의 제목으로 유추해 보건대 필름은 이제 사라져 가는, 영화 역사에서 지나간 무엇인데 바로 거기서 착안한 거였군요?
이 영화에 등장했던 배우들이 다 필름 시대에서 건너온 사람들이잖아요. 그 시대에 활동했던 이들의 연기나 젊었을 적 얼굴이 필름에 남아 있지 않습니까. 디지털 시대인 지금도 연기를 하고 있죠. 그럼 디지털 시대에 그 배우들의 연기와 얼굴과 표정은 무엇인가, 우리 영화와의 관계는 무엇인가. 그게 3장 ‘그들’의 출발점이었어요.

세대를 대표하는 배우들로 진용이 이뤄져 있어요. 안성기 배우가 할아버지, 한예리 배우가 손녀로 등장하죠. 중간에 박해일, 문소리 배우가 있습니다.
안성기 배우는 사람이 아주 좋고 너무 단정해, 그런 인상을 받았어요. 본인도 조금 흩어지고 싶지 않겠는가. 질병을 좀 넣자. (웃음) 그래서 정신병원에 입원한 환자로 설정했어요. 현장에서 용케 좋아해 주시던데요.

박해일 배우는 <경주>(2014)에서 함께 한 인연이 있었어요. 실제 현장을 보면 감독이 모든 걸 결정하잖습니까. 스태프들이 모두 동의하는 건 아니에요. 마음속에 다 자기 생각이 있어요. 영화에 대한 태도가 있는데 그 시스템, 권리 구조에서 말해도 없어지고 말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게 되어 있어요. 실제 현장에는 우리 영화에서처럼 감독에게 사랑이 무어냐고, 잘못 알고 있다는 투로 말하는 조명 퍼스트는 없을 거예요.

대신 마음속에는 다 있을 거예요. 그 사람들의 좋은 생각, 지혜들이 지금 시스템에서는 다 사라지는데 과연 사라진 걸까, 다른 영화 현장에서의 그럼 마음의 연장선은 또 뭐인가. 그래서 그 친구들을 대표해서 박해일 배우가 질러줬어요. 박해일 그 친구를 보면 실제 그럴 거 같지 않습니까. (웃음) 부드러운 이면에 콱콱 나갈 수 있는 그런 눈빛이 있지 않습니까.

문소리와 한예리 배우는 어떤가요?
문소리는 같이하고 싶었어요. 좋은 연기자고 항상 지켜봐 왔어요. 이전에 <풍경>(2013)이란 영화를 만들고 친하지도 않은 데 같이 관객과의 대화 해달라고 요청했어요. 그 친구가 봉사해준 거지. (웃음) <동행>을 위해 한 3일 단편이니까 도와줄 수 없는가 했더니 흔쾌히 응해줬어요.

한예리는 좋은 배우라는 인상이었어요. 한예리는 친분이 없었지만, 그래도 부탁했어요. 함께 하니 좋았어요. 한예리 배우는 묘하게 안성기 배우와 맞는 게 있어요. 다른 영화(<사냥> 현재 제작 중)에서 또 할아버지와 손녀로 출연하고 있어요.

3장 ‘그들’에는 이 배우들이 예전에 나왔던 작품들(<살인의 추억> <박하사탕> <화려한 휴가> <귀향>)을 그대로 사용했어요. 선택의 기준은 무엇이었나요?
박해일과 문소리는 젊어졌을 적 모습을 다시 보고 싶었어요. <박하사탕>(1999)은 문소리 데뷔작이죠. <살인의 추억>(2003)은 박해일의 초기작이고요. 봄 소녀, 봄 소년 같잖아요. 안성기 배우는 초기작을 할 수 없잖아요, 아역 출신인데. (웃음) <화려한 휴가>(2007)는 우리 영화와 연계를 했어요. <필름시대사랑>에서 안성기 배우가 칼 한 번 맞지 않습니까. 그래서 칼 대신 총을 맞는 장면을 <화려한 휴가>에서 가져왔어요. <귀향>(2009)도 한예리의 초기 작품이에요. <귀향>에서 한예리가 아기를 낳는 장면은 희망이지 않습니까. <필름시대사랑>의 3장은 무성영화이죠. 근데 마지막에 아기 울음소리는 유성으로 처리해서 한예리 배우의 장면을 희망을 대표하는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4장 ‘또, 사랑’은 음향, 그중에서 배우들의 목소리를 특화한 경우입니다.
1장의 이야기에 나왔던 흐름으로 그 공간을 찍는데 조금씩 이야기가 바뀌죠. 현장에 있으면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계속 달라요. 그것 때문이에요. 그때 그 사람들이 없는 지금 이 공간의 소리는 뭔가. 좋게 말하면 영화에 대한 단상, 나쁘게 말하면 망상 (웃음) 실제 정신병원은 고립된 시공간이잖아요. 영화 만드는 것도 그렇지 않습니까. 질병과 예술은 어느 시점에는 겹치는 경우가 있어요. 단언할 수 없지만, 정신병원의 시스템과 영화라는 시스템은 사람들을 아예 못 나가게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상한 영화가 나온 거죠. (웃음)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고요. (웃음) 저는 <필름시대사랑>을 보면서 감독님께서 사라져 가는 것들을 어떻게든 자신만의 방식으로 잡고 있다는 태도를 느꼈어요.
시대가 너무 빨리 변하고 있어요. 이제 필름 현상을 못 해요. 필름이 지금 이 시스템에서 자본의 힘으로 없어지는 데 과연 없어지는 게 맞는가. 추세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디지털은 더 간편하게 됐고 사람들 누구나 다 찍을 수 있죠. 그런 점에는 찬성합니다. 그게 주류가 될 수밖에 없고. 지금은 디지털이 주류잖아요. 필름은 이제 한국에서는 사라진 건데 디지털이 필름과 같은 질감이면서 더 효율성이 있다고 하면 필름은 없어져도 됩니다. 하지만 필름과 디지털의 질감은 전혀 달라요. 시공간에 따라 맞는 질감이 있습니다. 그런데 디지털이 주류라고 해서 필름이 다 없어진다, 그건 너무하다고 봐요.

필름의 시대가 다시 돌아올까요?
주류가 되지는 않겠지만, 언젠가 자기 역할에 맞게 돌아올 거라고 생각해요. 필름 시대를 건너온 사람뿐 아니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필름의 질감이 어떤 식으로든 좋은 정서를 줄 수 있을 거라고 봐요. 어떤 방식으로든 돌아온다. 유성시대에서 무성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건 맞아요. 무성시대에는 기술이 되지 않아서 사운드가 못 들어갔잖아요. 하지만 유성시대가 되고 음향이 들어가면서 사람들의 감정의 넓이가 더 넓어졌어요. 필름의 질감은 디지털과는 전혀 달라요. 그렇다고 필름이 거저 돌아오는 건 아닐 겁니다. 노력해야 해요. 그 기억을 잡는 것도 그 일환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봐요.

<필름시대사랑>이란 더 정확히는 필름을 ‘향한’ 사랑인 거군요. 하지만 이제는 더는 한국에서 35mm 필름으로 촬영할 수가 없는데 이번 영화는 어떻게 작업하셨어요?
이전까지 35mm밖에 못 해봤죠. 2장 ‘필름’은 16mm로 찍었어요. 그래서 화면비가 4:3인 거예요. 현상은 문 닫은 ‘서울현상소’에 사정을 했습니다. 고맙게도 다시 열어주었어요. 다시 약물을 넣고 ‘필름’을 현상했죠. <필름시대사랑>에는 디지털, 흑백, 무성, 유성, 16mm 등 영화의 촬영 방법이 거의 다 나와요.

1장 ‘사랑’과 다르게 2장부터는 이미지와 사운드에 중점을 두면서 영화가 진행됩니다. 그렇다면 2장부터 시나리오는 어떤 형태로 완성하셨나요?
시나리오는 전혀 없죠. 여기서 찍어라, 저기서 촬영해라 즉흥적으로 한 거죠. 이틀 찍는데 스태프들이 저를 보는 눈길이 점점 이상해지는 거야. (웃음) 다시 배우가 오는가 했는데 그런 것도 아니고. 나를 꼭 정신병자로 보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영화가 되겠는가 근심들을 많이 했어요. 시나리오가 있었어도 그대로 안 해요. 그전에도 항상 바뀌었어요.

주류 시스템에서라면 전혀 불가능한 영화 만들기이군요.
우리는 뭐든 너무 빨리 사라지는 시대를 살고 있어요. 사라진 것들이 진짜 사라졌는가, 정말 사라졌으면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어떤 부작용을 주고 있는가, 남았으면 그 남은 거로 어떤 새로운 정서를 만들어 가야 하나. 이번 영화를 작업하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감독님의 작품은 늘 공간에 대한 정서가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번 작품은 정신병원이죠. 이 공간에 대한 호기심 혹은 궁금증이 평소에 있으셨나요?
중학교 때 제 동창들 부모님 몇 분이 정신병원 의사였어요. 그래서 몇 번 가봤어요. 실제 병원의 사람들을 보면서 정신병원이 궁금했어요. 제가 한국에 와서 연세대학교에서 강의한 지 3년 반이 됐습니다. (편집자 주_장률 감독은 재중동포 출신이다. 현재는 한국에 정착하여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대학원 영상학 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런 유행가가 있습니다.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 서울에 살다 보니까 다른 연대 관계가 없잖아요. 중국에서는 가족, 친구들의 관계가 태반이었지 영화의 비중은 아주 적었어요. 한국에 있으면서 3년 반 동안 사람 만나면 지겹게 다 영화예요. 눈만 뜨면 영화, 강의해도 영화. 그러다 보니까 내가 영화라는 정신병원에 갇힌 건가, 그래서 정신병원에 대한 그런저런 생각이 들었죠.

하지만 감독님의 직업적(?) 운명상 영화를 벗어나기는 힘들 것 같은데요.
벗어나기 어려운 건 알아요. 그래도 노력을 해야 한다. (웃음) 늘 새로운 걸 찾지만, 인생이 어려운 건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 아닌가 해요.

사랑도 그런 것 같습니다. 영원할 것 같지만, 어느 순간 그 감정이 거짓말처럼 식어 버리죠. 다시 불을 붙이기 위해서는 노력을 해야 하잖아요.
‘사랑’은 항상 식고 사라지죠. ‘필름’도 그래요. 그래서 필름과 사랑의 질감이 비슷한 게 있어요. 하지만 디지털은 아니에요. 디지털은 늙지 않아요. 사람이 늙지 않는다고 생각해봐요. 얼마나 공포스러워요. 디지털이라는 환상 속에서  사랑은 영원할 것 같지만, 거짓말이죠. 사라지고 늙는 과정에도 아름다움이 있어요. 디지털 시대에 필름의 잔재는 남아 있죠. 저도 찍지 않았습니까. 반항하는 것 같은데 디지털이라는 ‘시대’에 지금 변주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 영화의 제목이 ‘필름’ ‘시대’ ‘사랑’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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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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