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피에르 다르덴과 뤽 다르덴의 <자전거 탄 소년>은 다르덴 형제 특유의 스타일이면서 한편으로 전작들에서 볼 수 없었던 요소들이 첨가되어 또 다른 해석을 가능케 하는 영화다. 어른(특히 성인남자)의 방관 속에 위험에 처한 아이의 사연을 ‘포착하듯’ 담아낸다는 점에서 여전히 극사실적이지만 지금껏 사용한 적 없던 음악이 극 중에 삽입되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연상시키는 여자 주인공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다소 변모한 연출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9살 소년 시릴(토마 도레)은 보육원을 탈출하려고 애쓴다. 연락이 끊긴 아빠와 잃어버린 자전거를 찾기 위해서다. 선생님의 감시를 피해 옛집을 가보니 아빠는 소식 하나 남기지 않고 다른 곳으로 떠났을 뿐 아니라 소중히 아끼던 자전거도 팔았음을 알게 된다. 실의에 빠진 시릴은 동네 미용실 주인 사만다(세실 드 프랑스)의 도움으로 자전거를 다시 손에 넣게 된다. 그리고 그녀를 주말 위탁모로 맞이하면서 함께 아빠를 찾아 나서는데, 어렵게 만난 아빠는 시릴에게 더 이상 찾아오지 말 것을 요구한다.
다르덴 형제에 따르면, “폭력 문제로 감옥에 갈 위기에 빠진 소년을 도와주는 한 여성”에 대한 영화를 오래 전부터 구상해왔다고 한다. 그전까지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어른들에게 이용당하거나 버림받은 아이들끼리 미래를 다짐하는 모습을 통해 희망을 유예해왔다. 예컨대 그 시간은 생활고에 시달려 아이를 판 <더 차일드>(2005)의 어린 부모 브루노와 소냐 커플이 어른으로 성장했을법한 나이다. 하지만 브루노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이는 <자전거 탄 소년>의 아빠는 <더 차일드>에 이어 다시 한 번 시릴을 버리는 매정한 모습을 보여준다. (두 영화에서 아빠 역할은 모두 제레미 레니에가 연기했다.)
그렇게 다르덴 형제의 영화에서는 지옥 같은 현실을 뒤바꿔줄 극적인 변화 같은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사실에 비춰 <자전거 탄 소년>에 아빠 대신 도움을 주는 성인 여성이 등장했다는 것은 다르덴 형제가 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일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들은 이 영화에 대해 “현대의 동화”라는 표현을 썼다. 극(極)사실주의를 지향하는 다르덴 형제의 스타일과 동심을 바탕으로 하는 동화는 배치되는 개념에 가깝다. 그들의 말은 곧 희망이란 동화에서나 가능할법하다는 의미로 들린다. 동화의 형식을 차용한 <자전거 탄 소년>은 다르덴 형제의 필모그래프에서 가장 밝은 영화일지 모르지만 인위성을 배제하면 비극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영화 속 ‘자전거’는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이 영화는 비토리오 데 시카가 연출한 <자전거 도둑>(1948)의 현대판이라 할만하다. <자전거 도둑>에서 아버지 안토니오는 생계를 위해 자전거를 훔쳤다가 걸려 온갖 조롱과 멸시를 당하지만 아들 브루노(<더 차일드>의 아빠와 이름이 동일한 것은 우연일까?)만은 유일하게 그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그에 반해 <자전거 탄 소년>의 자전거는 부자 관계를 끊는 매개물로 작용한다.
<자전거 도둑>과 <더 차일드>를 잇는 브루노라는 이름, <더 차일드>와 <자전거 탄 소년>을 연결하는 아빠 역할의 동일한 배우. 이는 결국 자본주의, 신자유주의와 같은 사회적인 시간을 거치면서 결속이 흐릿해지는 부자간의 비극적인 역학관계를 의미한다. 그 틈을 비집어 사만다가 화해를 주선하지만 앞으로 시릴이 아버지를 만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게다가 곳곳에 도사린 위험 속에서 사만다가 어떻게 시릴을 키워낼지도 미지수다. 그러니까 <자전거 탄 소년>에 대해 밝다고 말하는 것은 시릴과 사만다를 향한 막연한 기대감의 반영일 뿐이지 현실에 대한 적확한 인식은 아니다. 다르덴 형제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희망을 동화를 빌려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