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렇게 지면을 통해 임권택 감독님께 인사를 드리는 건 처음이네요. 음, 생각해보니 감독님을 직접 만나 뵌 것도 한 달 전 모 잡지의 주선으로 마련된 인터뷰 자리가 처음이었어요. 사실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중학교 시절 <장군의 아들>(1990)을 보고 팬이 된 이후 꾸준히 감독님의 영화를 보았지만 경모하던 분을 직접 뵐 수 있다는 것은 다른 차원이잖아요. 제가 태어나기 10년도 훨씬 전인 1962년에 데뷔작 <두만강아 잘 있거라>를 만드시고 지금은 101편째 영화 <달빛 길어올리기> 개봉을 기다리시는, 말 그대로 살아있는 전설이신 감독님 앞에서 고작 기자 생활 10년차인 제가 어떻게 떨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설상가상으로, 인터뷰 당일 감독님의 용인 보정동 자택 부근으로 출발하기 전 미리 전화를 드렸더니 대뜸 약속 장소를 변경하셨어요. 너무 일방적이어서 제가 고른 장소가 맘에 안 드셨나,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린 건 아닌지 여러 모로 머릿속이 복잡했답니다. 서울에서 용인으로 통하는 도로는 평일 낮인데도 그날따라 왜 이렇게 막히던지, 이러다가 약속 시간에 늦어 감독님께 한 소리를 듣지는 않을까 몹시 마음을 졸였어요. 그랬답니다, 출발부터 저는 혼돈 상태였어요.
다행히 10분 전에 도착했고 시간에 맞춰 나오신 감독님께서는 먼저 악수를 청하셨어요. 그때야 비로소 마음이 조금씩 놓이기 시작했고 샌드위치가 맛있는 집이라 인터뷰 장소로 정했다는 얘기에는, 이런 말씀 드려 죄송하지만, 속으로 감독님이 살짝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답니다. 영화를 통해 그려본 감독님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거든요. 어땠냐고요? 의미 없는 감정의 에누리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굉장히 엄격하신 분이셨어요.
감독님 영화 속 인물들은 하나 같이 한(恨)을 삶의 원동력으로 삼지 않았던가요. 이데올로기의 대립 속에서 쫓고 쫓기는 <짝코>(1980)의 전직 경찰 송기열(최윤석)과 빨치산 백공산(김희라)도, 한국전쟁 당시 헤어진 아들을 찾기 위해 두문불출하는 <길소뜸>(1985)의 민화영(김지미)도, <서편제>(1993)의 소리꾼 가족 유봉(김명곤), 동호(김규철), 송화(오정해)도, 새로운 그림에 대한 갈망으로 스스로 자책하는 <취화선>(2002)의 장승업(최민식)도, 모두 과거의 사슬에서 벗어나기 위해 힘겨운 떠돌이 생활을 자처했던 인물들이죠. 그중에는 역사의 무게를 이겨내는 이도 있었고, 역사에 순응하며 꾸역꾸역 삶에 충실하려는 이도 존재했으며 죽음으로 세상과 연을 끊은 이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단 하나! 감독님은 섣부른 해피엔딩이나 값싼 감정의 여유를 허용하며 관객을 홀리는 법이 없으셨습니다. 그날 인터뷰에서 말씀하셨죠, “환상이 있는 인생을 산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너무 뼈아프게 느끼면서 살아왔다.”고요.
왜 아니시겠어요. 감독님께서는 역사의 질곡이 뼈에 사무치도록 배긴 인생을 살아오셨잖아요. 감독님 어린 시절(1934년 전라남도 장성 출생) 부친과 삼촌의 좌익 활동 때문에 빨치산 가족으로 몰려 얼마나 숨 막히는 생활을 하셨던가요. 열여덟에 부산으로 가출해서는 온갖 일을 하며 알코올 중독에 빠지기도 하셨습니다. ‘산다는 게 고통’이라는 말이 감독님에게는 실제 삶이요, 잔인한 인생 경험이었던 것이죠. 자신이 그렇게 떠돌며 살았고 그래서 영화 속 인물들 역시 역사가 준 온갖 한의 지층을 품은 채 머물 곳을 찾지 못하는 것이겠죠. 감독님에게 영화란 삶을 솔직히 들여다보는 것이고, 그러니 유행에 편승한 영화의 기승전결 구조 속에 널뛰는 감정놀음이 가당키나 한가요.
그런 이유 때문에 감독님은 당신께서 1960년대에 만들었던 영화에 대해서는 절대 인정을 하지 않으십니다. 제작자의 요청에 맞춰, 흥행 대목에 맞춰 부랴부랴 만든 초기 50여 편의 영화에 대해서 대체로 언급하시기를 꺼려하십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었어요. ‘저질감독’이고, ‘저질영화’라니요. “초기 영화들은 거의 인간의 삶과는 무관한 허구들로 이뤄졌다고. 미국영화의 2류 수준에 맞추려고 했던 저질영화들이지. 그런 저질감독한테 진지한 영화를 맡길 사람이 어디 있었겠소. 난 지금도 1960년대 당시 십여 년간 만든 오십 편의 영화는 늘 안 보였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그런데 전 1966년에 만들어진 <법창을 울린 옥이>에 대해 감독님의 수많은 걸작 중 한편이라고 생각하는 쪽이거든요. 이런 저의 말에 감독님은 손사래를 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난 그 영화 몰라요. 아이고, 보나마나 뻔해. (웃음) 제목이 뭐라고?”
예상치 못했던 답변에 제가 당황한 기색을 보였던지 감독님께서 “샌드위치가 맛이 없어요? 어서 좀 들어요.”라고 배려를 해주셨어요. 그래도 제가 미동을 않자 먼저 한입 베어 드시고는 너무 맛있다며 테이블 옆을 지나던 카페 주인을 잡아 세우셨죠. 맛있다는 소문 듣고 이 집에 왔다고, 실제로 정말 맛있다고. 그제야 전 샌드위치를 먹을 수 있었어요. 그뿐인가요, 인터뷰 도중 귀찮을 정도로 불쑥 불쑥 아는 척을 해오는 동네 분들에게 하나하나 눈을 맞추며 살갑게 인사말을 건네주시기도 하셨어요.
그런 광경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일 거예요. 전 준비해온 질문지가 필요 없겠다 했지요. 굳이 특정 작품을 언급하며 영화적인 질문을 드리기보다는 살아오신 삶에 대해 여쭙는 것이 결국 감독님의 영화와 연결이 되겠다고 생각을 한 겁니다. 많은 이들이 감독님의 주요한 영화적 특징 중 하나로 ‘인본주의’를 언급하지요. 하지만 전 그동안 머리로만 이해했지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런 사람의 영화가 왜 항상 어둡고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 것일까, 라고 의문을 품었던 거예요.
영화는 잠시 삶을 잊게 해주는 매체이기도 하지만 감독님 같은 분에게는 영화 역시도 삶에 속하기 때문에 이유 없는 해피엔딩은 단순한 격식 차리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죠. 오히려 인물의 감정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는 대신 현재의 상황과 위치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인간에 대한 예의라는 것이 감독님의 철학입니다. 심지어 죽음까지도 포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셨죠. 안 그래도 드물게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감독님의 작품 중에 <축제>(1996)가 있지요. 노모의 죽음으로 장례식에 오랜만에 모인 가족들이 서로 간에 쌓인 감정으로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처음엔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다가 가족사진 촬영을 계기로 극적인 화해에 이르며 죽음이 소통과 화해의 접착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에 대해 감독님께서는 아주 간단히 말씀하셨어요. “삶이란 게 그런 거요.”
아직은 젊은 제가 백퍼센트 이해할 수는 없겠죠. 다만 감독님의 영화가 당신이 살아오신 숱한 삶의 궤적이 쌓여 이뤄진 나이테라는 것만큼은 알겠더라고요. 어느 한 편 만족하지 않고 뼈를 깎는 자성을 통해 작품 세계를 이뤄 오신 까닭에 1960년대에 데뷔한 감독 중에서 유일하게 지금도 현역으로 활발히 활동 중이신 거겠죠. 그렇다면 <달빛 길어올리기>는 감독님의 101번째 나이테가 되는 것인가요. 또 어떤 삶의 지혜를 보여주실지 사뭇 궁금해집니다. 특히나 이번에 만나 뵈면서 감독님 영화의 비밀을 캐낸 것만 같아 <달빛 길어올리기>가 더욱 달리 보일 것 같습니다.
샌드위치도 마찬가지예요. 정말 안 먹었으면 후회할 만큼 맛있더군요. 앞으로 샌드위치만 보면 감독님이 생각날 거예요. 손주뻘 기자에게 맛있는 걸 하나라도 더 먹이려고 손을 내미는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감독님의 모습 말이죠. 다음에 또 얻어먹을 수 있을까요? 농담입니다. 그 한 번만으로도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것으로 모자라 가는 길을 배웅까지 해주셨어요. 서울에서 이 먼 용인의 보정동까지 오느라 수고 많았다고. 수고는요, 무슨. 감독님을 직접 뵐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습니다.
요즘 일교차가 큽니다. 감독님 건강 살피시고요. 저는 11월에 개봉하는 <달빛 길어올리기> 기대하겠습니다. 102번째, 103번째, 그리고 그 이후의 영화도 물론이고요. 그럼 감독님 극장에서 뵙겠습니다.

ARENA
2010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