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정신의) 집을 찾아서

christina

<크리스티나의 세계>라는 그림이 있다. 현재 뉴욕의 현대 미술관(MoMA)에서 전시 중이다. 이 그림은 미국을 대표하는 화가로 평가받는 앤드류 와이어스가 1948년에 그렸다. 앤드류 와이어스는 텅 빈 들판 위에 오도카니 자리 잡은 오두막과 같은 쓸쓸한 풍경에 주목한 화가였다. 그의 대표작이 바로 <크리스티나의 세계>다.

<크리스티나의 세계>는 선수와 관중이 모두 퇴장한 축구장의 그라운드처럼 황량한 들판이 화폭의 3분의 2 이상을 뒤덮고 있다. 그 위에서 앙상한 팔목을 드러낸 한 여성이 기어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어딘가를 응시하는 뒷모습에서 힘겨워하는 표정이 느껴진다. 그림의 상단에는 화가가 구겨 넣은 듯 농장이 자리하고 있다. 그림의 포커스가 중앙에 있는 여성에 맞춰진 까닭에 상대적으로 비율이 작은 농장까지의 거리는 꽤 멀어 보인다.

이 여성의 이름은 애나 ‘크리스티나’ 올슨이다.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아 두 다리가 불편했던 크리스티나는 앤드류 와이어스의 실제 이웃이었다. 앤드류 와이어스는 어려서부터 병치레가 잦아 정규 학교 교육을 받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그에게 크리스티나의 몸 상태는 남 같지 않았다. 그녀에게 양해를 구하고 <크리스티나의 세계>를 그린 이유다.

워낙 유명한 그림이어서 영화에도 많이 인용되었다. 대표적인 작품이 톰 크루즈가 출연했던 <오블리비언>(2013)이다.  <오블리비언>은 외계인 침공에 맞서 핵을 사용했다가 인류가 멸망한 미래가 배경이다. 주인공 잭 하퍼(톰 크루즈)는 자신을 인간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외계인들이 지구에 숨어 저항하는 사람을 찾아내기 위해 복제한 인간이다.

폐허가 된 지구를 정기적으로 정찰하는 잭이 유일하게 마음의 위안을 얻는 곳이 있다. 외계인의 감시를 피해 울창한 숲 속에 마련한 오두막이다. 이 오두막에는 책과 음반과 같은 예술품이 숨겨져 있고 중앙에 <크리스티나의 세계>가 걸려 있다. <오블리비언>은 이 그림을 통해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미래 사회를 작동하는 차가운 디지털 문화에 반해 책도 읽고 음악도 듣고 그림도 감상할 수 있는 따뜻한 아날로그 삶으로의 ‘회귀’다.

안 그래도 <크리스티나의 세계>가 품은 이야기 역시 ‘집으로의 돌아감’이다. 하지만 이 그림이 품고 있는 전체적인 분위기는 보는 이에게 이 주제에 대한 의문 부호의 감정을 남긴다. 크리스티나 홀로 들판 위의 저 먼 집으로 과연 잘 돌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이다.

불편한 몸의 자세와 더불어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그림 속 미장센은 크리스티나의 손이다.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대신해 몸을 지탱하려 손에 얼마나 힘을 쥐었는지 새하얀 팔목과는 다르게 시퍼렇게 멍이 들어 유난히 눈에 띈다. 회색빛으로 잔뜩 찌푸린 하늘과 크리스티나의 몸에 가시면류관처럼 드리운 그림자가 더해지면 멜랑콜리가 이 그림 전체를 지배하는 정서로 작용한다.

<크리스티나의 세계>에 대해서 길게 설명한 이유가 있다. 이 그림의 구도와 분위기를 생각나게 하는 두 편의 최근 영화 <암살>과 <셀프/리스>를 만났기 때문이다. 이 두 편은 각각 충무로와 할리우드라는 생산지 만큼이나 장르적으로나 규모 면에서 거리가 멀다. 예컨대, 시대극의 형태를 띤 블록버스터 <암살>과 다르게 <셀프/리스>는 저예산으로 만든 Sci-Fi물이다.

내용 차이도 상당하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를 다루는 <암살>은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독립군과 일본에 투항해 매국노 노릇을 서슴지 않았던 이들의 비극적 역사를 오락물의 외피로 담아낸다. <셀프/리스>는 미래의 뉴욕이 배경이다. 주인공은 지금의 뉴욕을 설립한 거물이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 주인공에게는 고민이 하나 있다. 병에 걸려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를 해결하고자 정신을 다른 이의 육체에 이식하는 방식으로 영생을 얻으려 한다.

공통점을 찾기가 참 쉽지 않은 영화들인데 ‘정신의 부재’를 키워드 삼아 접근하면 어떨까. <암살>과 <셀프/리스>는 모두 정신적 혼란, 즉 정체성 문제를 기반에 두고 이야기를 풀어간다. <암살>은 지금 현재 우리 사회의 상식과 도덕의 맑은 물을 원천에서부터 오염시킨 친일파의 활개 배경이 어디에서 시작했는지에 대한 내용으로 많은 이의 공감을 얻었다.

한국 역사라는 특수성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암살>과 다르게 <셀프/리스>는 보편적인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게 특징이다. 불멸의 삶을 위해 타인의 육체를 빌려 정신을 이식했을 때 그 모습을 온전한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의 유전자 복제 문제까지 갈 필요 없이 더 나은 외양, 더 어려 보이는 외모를 위해 성형수술을 감행하는 작금의 풍토에서 <셀프/리스>는 유의미한 질문을 제기한다.

질문은 그 자체로 답을 내포하고 있기 마련이다. 그와 같은 이유로 <암살>과 <셀프/리스>는 <크리스티나의 세계>를 연상케 하는 구도와 이미지로 자신들이 제기한 문제에 대한 해답의 힌트를 제공한다. 이와 관련, 내가 <암살>에서 흥미를 느낀 지점은 극 중 친일파 염석진(이정재)이 독립군 안옥윤(전지현) 일행의 저격을 받고 경성 거리에서 쓰러지는 장면에서였다.

총을 맞아 불편한 몸을 이끌고 경성의 후미진 골목으로 도망치던 염석진은 다급한 마음에 정체불명의 문을 밀고 들어간다. 그의 눈 앞에 펼쳐진 건 허허벌판이다. 이리저리 바람에 휘날리는 하얀 적삼이 황폐하여 몹시 쓸쓸한 기운을 강화한다. 이를 배경으로 관객을 향해 등을 보이며 쓰러진 염석진의 죽음이 관객에게 전달하는 감정의 정체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친일파가 처단되었다면 정의가 실현된 것인데 <암살>은 왜 이 장면에서 기쁜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걸까. 현실에서는 아직 발생하지 않은 허구이기 때문일 터다. 친일을 이유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서 재판을 받던 염석진은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석방된다. 이건 팩트다. 반민특위가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한 까닭에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에, 해방 뒤에는 미 군정에 붙어 보신을 일삼아 온 염석진’들’이 바퀴벌레와 같은 생명력으로 지금도 국가의 요직을 차지한 채 사회 기강을 무너뜨리고 있지 않은가.

북적이는 경성 거리를 배경으로 하던 염석진의 도주 장면이 별안간 허허벌판으로 옮겨간 이유가 여기에 있다. <크리스티나의 세계>의 크리스티나처럼 비틀린 자세로 쓰러진 염석진은 단순히 친일파의 의미를 넘어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역사로 앓게 된 한국인의 정신 장애를 나타내는 듯하다. 염석진의 죽음과 함께 주변에 펼쳐진 황폐한 대지는 역사 청산으로 우리가 가꿔야 할 밝은 미래일 터. 하지만 <암살>이 염원하는 역사 청산의 미래는 <크리스티나의 세계>의 농장처럼 화면의 소실점에 놓인 것 같은 기시감을 선사한다. 아무리 애를 써도 움직이지 않는 다리처럼 몰상식과 비도덕으로 정신의 그로기 상태에 놓인 선량한 한국인들이 도달하기에는 한없이 멀게만 느껴진다.

<암살>을 연출한 최동훈 감독이 이와 같은 메시지를 위해 <크리스티나의 세계>를 참조했을 것 같지는 않다. 의미를 전달할 가장 최적의 구도를 선택한 결과일 텐데 바로 그 점에서 <크리스티나의 세계>가 왜 명화인지 드러난다. 앤드류 와이어스가 <크리스티나의 세계>를 처음 공개했을 때 잔디 하나까지 그 존재감을 드러내는 사실적인 묘사로 인해 전혀 예술적이지 않다는 혹평에 직면해야 했다.

사진을 보는 듯한 생생한 느낌이 드는 건 사실적이지만, 그 속에 있는 불안감과 안타까움은 사실적인 붓 터치와 다르게 어딘지 모를 비현실적인 느낌을 제공한다. 그런 이유 때문이다. <크리스티나의 세계>는 유독 Sci-Fi나 시대극에서 자주 차용되고는 한다. Sci-Fi와 시대극은 동시대를 벗어난 시간대가 주요한 시간대로 작용하지만, 실은 미래나 과거를 우회해 현재에 대해 언급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장르다. 바로 여기에 ‘회귀’의 주제를 품은 <크리스티나의 세계>와 맞아 떨어지는 데가 있다.

회귀는 인간의 본능이다. 집 밖을 나가면 결국에는 돌아와야 하듯이 내 삶의 가치가 혼란할 때 제 자리를 찾아주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게 인지상정이다. 상식과 도덕과 질서는 이에서 출발한다. 그것이 보편이다. 보편은 어디에서나 통한다. 상관관계가 별로 없어 보이는 <암살>과 <크리스티나의 세계>는 그럼으로써 연결된다. 안간힘을 다해 집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크리스티나의 마음은 친일청산이라는 상식의 집을 향해 힘겨운 걸음걸이를 옮기고 있는 우리네 마음과 통하는 지점이 있는 것이다.

<암살>과 다르게 <셀프/리스>는 <크리스티나의 세계>의 차용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셀프/리스>를 연출한 타셈 싱 감독은 <더 셀>(2000)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2008) 등 초현실적인 이야기를 주로 다루고 미적으로 뛰어난 화면을 구성하는 게 특징이다. <셀프/리스>는 Sci-Fi이되 저예산을 지향하다 보니 볼거리의 빈약함을 감추기 위해 <크리스티나의 세계>와 같은 명화의 구도와 색감을 의도적으로 가져와 화면의 ‘때깔’을 높이는 한편, 메시지를 강화한다.

젊고 건강한 육체로 다시 태어난 <셀프/리스>의 주인공 다미안(라이언 레이놀즈)은 이식 중 생긴 부작용에 시달린다. 육체의 원래 소유자이었던 이의 기억이 불쑥불쑥 되살아나 그를 괴롭힌다. 악몽에서 벗어나려 기억의 파편을 단서 삼아 다미안은 자신의 육체의 주인이 살았던 집으로 찾아가니. 타셈 싱은 바로 이 장면에서 <크리스티나의 세계>를 가져온다.

<크리스티나의 세계>를 알고 있는 이들에게 이 장면은 불안감을 자아낸다. 다미안이 문제의 집까지 안전하게 다다를 수 있을지, 어렵게 도착하더라도 충격적인 사실을 접하지 않을지 걱정이 앞서는 것이다. 아니나 달라, 다미안이 새로 얻은 육체는 정당한 과정이 수반되지 않았다. 이식을 집도한 의사의 설명과 다르게 육체 당사자의 동의 없이 생명 연장의 혜택을 입은 다미안의 입장에서는 심한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럼으로써 찾아온 딜레마. 육체를 돌려주고 나는 죽음으로써 사라져야 하는가, 불법에 눈감고 뻔뻔하게 영생의 길을 걸을 것인가.

다미안의 선택은 전자다. <셀프/리스>는 이와 같은 선택을 통해 더욱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불멸의 삶을 위해 남의 육체를 빌려 정신을 이식했을 때 그것은 온전한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인터넷과 SNS의 발달로 여러 개의 정체성을 갖게 된 시대, 다미안의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마음만 먹으면 젊음의 시기를 연장할 수 있는 의료 발달의 시대에 <셀프/리스>가 <크리스티나의 세계>로써 전달하는 메시지는 선명하다.

요람에서 태어난 우리는 결국 무덤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생과 사의 시간이고 인간의 운명이며 본능이다. 회귀, 즉 땅으로 돌아가야 하는 게 우리의 숙명이거늘 언제부턴가 상징적인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인간의 행보가 더뎌지고 있다. 나만 잘살겠다는 지나친 욕심으로, 욕심으로 얻은 부와 명예를 천년만년 지속하고 싶다는 허욕으로, 인간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온갖 탐욕으로 우리가 돌아가야 할 집까지의 거리는 한없이 멀어지고만 있다. 발표된 지 70년 가까이 된 <크리스티나의 세계>가 영화를 통해 다시금 주목받는 이유가 여기 있지 않을까. 집을 향하는 당신의 발걸음은 지금 어떠한가.

 

ARENA HOMME
2015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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