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다 보면 익히는 것들

hashima

소설에 재미를 붙인 건 대학교 때부터다. 책은 중학교 시절부터 읽었지만, 재미를 느끼기에는 의무감이 너무 컸다. 당시 읽은 소설을 생각나는 대로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다. 염상섭의 <삼대>,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김유정의 <동백꽃>, 이인직의 <혈의 누> 등이었다.

이들 소설을 기억하는 이유? 내 중고등학교 시절 국어 시간에는 매 학기 한 편씩 독후감 숙제가 있었다. 국어 선생님께서 한 편의 소설을 정해주면 그걸 읽고 정해진 기한 내에 독후감을 제출해야 했다. 시험 점수에 포함되다 보니 울며 겨자 먹기로 읽어야 했는데 어찌나 눈에 안 들어오던지.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라 남의 독후감 베끼기(?)는 언감생심 꾸역꾸역 읽어내고 어찌어찌 글을 써서 제출했지만, 그 후유증으로 열거한 소설의 제목과 달리 내용은 머릿속에서 집 나간 지 오래다.

그와 다르게 대학 시절에 읽었던 소설들의 상당수는 대략적인 이야기를 여전히 기억한다. 주로 추리물과 같은 장르소설이었다. 재미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들인 습관은 지금도 유효하다. 지하철이나 버스로 이동할 때면 대개 장르소설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는 한다. 중고등학교 시절 그렇게 책 읽기를 싫어했던 나를 알고 있는 어머니는 소설로 가득 채워진 내 방의 책장을 보면 경천동지할 일이라며 놀리고는 하신다. 그럴 때마다 내가 하는 얘기. 이 재밌는 걸 어떻게 끊어.

재미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주의다. 그런 생각을 키운 건 소설을 읽으면서다. 소설은 내게 일차적으로 킬링타임이다. 게임에는 별 관심이 없어서 무료한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는 데 소설만 한 게 없다. 그 정도로도 소설의 역할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요즘 심각할 정도로 책을 읽지 않는 한국의 풍토가 오락이 아니라 교양으로서 책 읽기에 너무 과한 의미를 부여해서 사람들을 질리게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근데 소설을 읽다 보면 재미 외에도 생기는 부수(?)효과가 뜻밖에 많다. 앤디 위어가 쓴 <마션>을 예로 들어보자. 화성에 홀로 남은 마크 와트니가 막사를 만들어 감자를 재배하고 산소 발생기를 만들고 통신기를 수리해 지구와의 교신을 시도한다. 변변한 우주 장비 없이 척박한 화성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연을 읽다 보면 나도 한 번쯤 우주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빠진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주에 대한 기본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연스럽게 관련 서적을 찾게 된다.

그래서 내가 고른 책은 닐 디그래스 타이슨이 쓴 <스페이스 크로니클>이었다. 부제처럼 ‘우주 탐험, 그 여정과 미래’에 대한 칼럼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새롭게 알게 된 우주 관련 지식이 적지 않다. 가령, 1969년 7월 닐 암스트롱과 에드윈 올드린 주니어가 탄 아폴로 11호가 최초의 유인 달착륙을 두고 날조라는 이야기가 많다. 그 이후 미국이 달에 유인 우주선을 발사하지 않고 있다는 게 근거 중 하나다. 이 책은 달 착륙 음모론에 관해서 설명하지 않지만, 미국이 달에 우주선을 보내지 않는 이유는 명확히 밝힌다. NASA의 예산이 부족한 탓이다.

가뜩이나 밖으로는 전쟁을 벌이고 안으로는 내수 진작이 시원치 않다 보니 당장 눈에 띄는 성과를 내기 힘든 우주 계획을 두고 의견이 갈리는 분위기라고 한다. 실제로 조지 부시 대통령이 재임하던 당시 2010년을 목표로 달에 유인 우주선을 보낼 계획을 세웠지만, 정권이 바뀌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새로운 우주 정책을 발표했다. “화성행 로켓 개발을 추진하겠다.” 다만 그날이 언제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은 피한 상황. <마션>과 다르게 실제 NASA의 화성행 유인우주선 발사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학교 시험이나 학과 공부 차원에서 접근했다면 꽤 고역(?)이었을 정보가 소설을 매개로 이어지다 보니 재미있게 다가온다.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내가 요즘 관심을 두고 있는 분야가 한국사다. 그중 일제강점기 한국인의 비극적 삶이 넘실거리는 하시마 섬, 즉 ‘군함도’다. 군함도를 알게 된 건 지난해 <무한도전> ‘배달의 무도’ 편을 통해서다.

원폭 도시 (아니, 지금은 짬뽕으로 더 유명하려나?) 나가사키에서 멀지 않은 섬 하시마는 그 모양이 군함과 닮았다고 하여 군함도로 불린다. 징용으로 끌려 온 많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이곳 해저탄광에서 모진 탄압을 겪은 까닭에 ‘지옥의 섬’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군함도에 어떻게 해저탄광을 설치했을까? 그 살벌한 곳에 왜 초등학교가 있는 것일까? 이곳에서 조선인들은 얼마나 모진 삶을 겪었을까?

<무한도전>을 보면서 한국 근대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에 무지했다는 나 자신의 부끄러움이 군함도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호기심으로 감가상각 되었다. 그렇다고 관련한 역사서를 찾아 읽는다는 게 엄두가 나지않았다. 비극적 역사가 가진 무게감에, 한국 근대사에 대한 개인적인 의무감까지 더해지니 좀 더 가벼운 접근 방식이 절실했다. 마침 한수산 작가의 <군함도>가 소설로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당장에 구입했다.

<군함도>는 돈을 많이 주겠다는 일본인의 꼬임에 빠져 군함도에 들어왔다가 친구를 잃은 명국과 아버지를 찾기 위해 직접 군함도로 들어온 길남과 그리고 강제로 끌려온 지상까지, 군함도를 탈출하려는 세 인물을 중심으로 고난의 역사를 살핀다.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해저탄광에서 24시간에 가까운 중노동을 하는 것도 모자라 인근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그 피해까지 떠안아야 했던 명국, 길남, 지상을 포함한 식민지 조선인의 나라 없는 설움이 가감 없이 전달된다.

한수산 작가는 각각의 사연으로 군함도에 징용 왔던 이들의 사연을 따라가면서 이 섬에 얽힌 역사를 중간중간 밝히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군함도>의 설명에 따르면, 하시마 섬 해저탄광의 비극적인 역사는 한 영국인 사업가로부터 시작한다.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의 모델이 된 토머스 글로버다. 거대기업 미쓰비시가 타카시마 탄광을 개발하며 그 시설을 현대화할 때 토마스 글로버는 공동 경영에 참여했다. 그리고 일본 최초의 채탄터널, 배수펌프 등 근대적인 설비를 도입했다. 그것이 1868년의 일이다.

그런데 1873년 일본이 외국기업과의 합병을 금지하면서 타카시마 탄광은 관영이 되었다. 관에서는 타카시마가 섬이라는 것에 착안, 나가사키 교도소에 수감 중인 죄수들의 노동력을 착취했다. 그러면서 폭력이 횡행하게 되었고 미쓰비시가 타카시마에 이어 하시마 탄광을 매수하면서 이곳 역시 매질이 일상화된 지옥으로 악명을 떨쳤다. 한창 아시아대동영을 외치며 주변 아시아 국가를 식민지 삼고 미국과 전쟁을 벌이던 일본은 포탄과 어뢰 제조를 위해 더 많은 석탄 확보가 필요했다. 자국 내 부족한 노동력을 조선(과 중국)의 죄 없는 남자들을 강제로 징용해 와 해저탄광으로 몰아넣은 것이 군함도의 비극적 역사의 배경이다.

조선인 노동자가 착취당하기 전까지 군함도에서 작업을 하던 이들은 당연히 일본인 광부들이었다. 이들은 열악한 환경과 떠돌이 기질 탓에 군함도에 정착하지 못했다. 미쓰비시는 이들이 군함도에서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게끔 각종 편의시설을 제공했다. 그중 하나가 하시마 심상 소학교다. 자녀들 교육 문제가 해결되자 이곳에 머물러 사는 광부들이 늘었다. 일본인 광부가 인간다운 삶을 누릴 동안 타의에 의해 군함도에 정착한 조선인들은 노예 같은 삶을 견디거나 죽음도 불사하고 탈출을 감행하는 등 그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처럼 소설을 통해 역사를 접하는 건 교과서로 배우는 역사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교과서로 기술된 역사는 중요한 사건 위주로 연대의 순서를 좇는 까닭에 건조하고 무엇보다 민중의 삶이 추상적으로 다가온다. 그에 반해 <군함도>와 같은 소설 속 인물의 삶은 일정 부분 허구일지언정 자료 조사가 바탕(한수산 작가는 <군함도>의 아이디어를 떠올린 후 긴 자료조사를 거쳐 무려 30년 만에 완성했다!)이 되어 보편성을 획득하기에 보다 생생한 맛이 있다. 그러니까, <군함도>는 소설이지만, 우리네 삶을 재현한 살아 있는 역사다.

그 어느 때보다 역사에 대한 필요성이 중요해진 시기다. 졸속으로 진행된 위안부 협상은 말할 것도 없고 서울 도심의 대형 호텔에서 진행될 예정인 일본 자위대 창설 기념행사의 바탕에는 역사에 대한 무지가 전제되어 있다. 역사를 망각한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그래서 역사는 중요하다. 하지만 교과서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입시 위주의 교육 환경에서 역사 수업을 주입식으로 진행하다 보면 관심과 흥미를 잃은 학생이 속출하기 마련이다. 달달 외워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는다고 해도 그 기억이 오래갈 리 없다. 그것을 제대로 된 역사 교육이라 말하기 민망한 수준이다.

역사에 대한 좀 더 유연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혹자는 역사를 오락화하는 접근에 대해 불편한 속내를 비치기도 하지만, 역사에 대한 경직된 사고가 초래한 결과를 우리는 지금 이 현실에서 뼈저리게 목격하고 경험하고 있다. 시대가 변하듯 역사에 대한 접근도 변화하는 법이다. 천만 관객을 넘게 동원한 영화 <암살>이 친일파 청산의 필요성과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무명의 독립투사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켜 화제가 됐었다. 그게 지금 사람들이 역사를 대하는 태도다.

소설도 역사를 배우는 좋은 창구다. 이는 꼭 우리 역사를 아는 데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소설 중에 <경관의 피>와 <경관의 조건>이 있다. 이 소설은 전후 경찰관이 된 일본인 4대가 주인공이다. 각각의 세대가 50년대, 70년대, 90년대, 그리고 현재 일본의 특징적인 범죄를 수사하며 일본의 근현대사를 횡단하는 이야기다. 사립탐정 켄지 & 제나로 시리즈로 유명한 데니스 루헤인의 역사소설도 있다. <운명의 날>과 <리브 바이 나이트: 밤에 살다>와 <무너진 세상으로>이다. 경찰관 커글린과 그의 막내아들 조 커글린이 주인공으로 나서는 이 삼부작은 20세기 초 격랑에 휘둘렸던 금주법 시대의 보스턴을 배경으로 미국의 어두웠던 근대사를 파헤친다.

<군함도>를 포함해 이들 소설은 역사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취하면서도 재미를 놓지 않기 위해 적재적소에 흥미로운 사건을 배치하고 독자들이 해당 인물에 감정 이입할 수 있도록 정교하게 이야기를 전개한다. 재미에 역사까지 습득할 수 있으니 독자로서는 그야말로 일거양득이다. <삼대>와 <운수 좋은 날>과 <메밀꽃 필 무렵>과 <동백꽃>과 <혈의 누>도 시험에 상관없이 재미로 읽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책을 잘 읽지 않는 환경도, 역사 인식이 갈수록 희미해가는 풍토도 결국 해결책은 재미에 있다고 생각한다. 재미로 접근하는 역사는 가벼울 수밖에 없다고? 작고 가벼운 발걸음이 모여 큰 줄기를 이루고 변화를 이끌었던 건 역사가 증명한다. 나는 오늘도 소설을 읽는다. 그리고 역사를 읽는다.

 

arena homme
2016년 8월호

2 thoughts on “읽다 보면 익히는 것들”

  1. 저도 올해와 내년에 치를시험준비한단 핑계로 책을 안 읽었는데 다시 한번 너무 책을 의무적인것으로 여긴게 아닌가 되돌아보게 되네요

    1. 저는 아무래도 스마트폰보다는 책 읽는 거에 익숙한 세대라서 위의 글을 쓴 거예요. 너무 책 읽어야겠다 의무감으로 접근하면 더 어려울지도 몰라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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