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이 앞서는 배우, 스티븐 시걸


본 기자 스티븐 시걸 좋아한다. 한마디로 스티븐 시걸 영화팬이다. 그러나 여지껏 그의 영화를 극장에서 입장료 지불해가며 관람한 적은 한번도 없다. 극장에서 스티븐 시걸 보기에는 입장료가 아깝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그가 출연하는 영화를 극장에서 볼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 어떻게 스티븐 시걸의 팬이라고 함부로 떠들 수 있냐고?

물론 의아해 할 수 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강조하건데 본 기자 스티븐 시걸 팬이다. 그래서 그의 영화가 출시되는 족족 비디오 대여점에서 몽창 다 빌려다 본다. 지금껏 동네 비디오 대여점에 들어온 스티븐 시걸 영화는 단 한 편도 빼놓지 않고 봤다고 감히 주장할 수 있다. 그러니까 시걸의 팬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그런 본 기자의 취향을 국내 스티븐 시걸 영화 수입사 측에서는 어떻게 간파했는지, 전작 <하프 패스트 데드 Half Fast Dead>도 그렇고 최근작 <아웃 포 킬 Out for a Kill>도 극장개봉과 동시에 소리소문없이 비디오 시장으로 보내버렸다.

이처럼 언제부터인가 국내에서 스티븐 시걸의 영화는 개봉과 함께 극장가에서 천대받고 곧바로 비디오 시장으로 좌천되는 불우한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개봉관에서 홀대받은 그의 영화가 비디오 대여점주들에게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 수준의 대접을 받는 이상현상을 불러왔으니 이 어찌 해가 동쪽에서 뜨는 일이라 아니 할 수 있으리요!

원래 극장에서 관객들에게 외면 받은 영화는 비디오 시장에서라고 대접이 크게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스티븐 시걸은 달랐다. 극장에서는 누구하나 거들떠 보지않던 시걸이 비디오 계에서는 송강호나 브래드 피트 못지 않은 높은 인기도를 과시한다. 왜일까?

1.

17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Aikido(우리말로는 합기도)를 배운 뒤 미국으로 건너와 이를 전수하던 스티븐 시걸. 그의 문하생 중에는 파트 타임 잡으로 엑스트라 배우 생활을 하는 이가 있었다. 그의 주선으로 영화 몇 편에서 액션연기에 대해 조언을 하게 된(그 중에는 007영화인 <네버세이 네버 어게인>도 포함되어 있다) 시걸은 후에 그 일이 인연이 되어 1988년 <형사 니코 Above the Law>로 정식 데뷔, 헐리웃의 새로운 액션스타로 각광받게 된다.

특히 <형사 니코>에서 보여준, 상대방의 팔꿈치나 무릎, 대구리를 켄터기 닭뼈 부러뜨리듯 가볍게 ‘톡’하고 꺽어버리는 관절꺽기는 그동안 스피드와 파괴력만이 액션의 전부인 것으로 인식되던 미국 액션영화계에 있어 굉장히 신선한 바람을 몰고 온다.

이에 상품가치를 인정받은 스티븐 시걸은 <복수무정 Hard to Kill>을 거쳐 <죽음의 표적 Marked for Death>으로 입지를 굳힌 뒤, 그의 최고작으로 평가받는 <언더시즈 Under Siege>로 세계 액션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월드스타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이처럼 세계적인 액션 배우로 자리 매김 한 뒤로도 그는 한눈팔지 않고 오로지 육중한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예의 그 관절꺽기를 주무기 삼아 선 굵은 액션 연기에 매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런 난리법석 액션 와중에도 머리카락 한올 흐트러짐 없는 올빽머리와 함께 이제는 트레이드 마크로 굳어진 무표정은 스티븐 시걸이라는 배우를 거의 컬트 수준으로 끌어올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하지만 예술의 경지에 올랐다는 그 무표정과 함께 차기작에도, 그 다음 차기작에도, 또 그 다음다음 차기작에도 전혀 변하지 않는 스티븐 시걸의 액션 및 외양에 혹자는 ‘머리보다 주먹이 앞서는 배우’라고 폄하하며 내려 깎았으니, 그의 영화가 평론가들에게 좋은 점수를 받을리는 만무하였다.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 시걸은 미국판 ‘토룡영화제’라 할 수 있는 최악영화상 ‘골든래즈베리’ 시상식에 지금껏 8번이나 노미네이트 되는 영광(?)의 소유자로 등극하기도 하였다.

2.

그러나 관객들은 이렇게 외쳤던가, 평론가들이 버린 영화는 우리가 알아본다고…. 스티븐 시걸은 평론가들이 뭐라 떠들어대든, ‘골든래즈베리’ 시상식이 그의 연기를 조롱하든 말든 이러한 악평에도 불구하고 우직한 돌쇠마냥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변함없이 자신의 액션 아니 관절꺾기를 묵묵히 시행해 보였다.

그러다보니 스티븐 시걸의 영화를 고정적으로 찾는 두껍고 탄탄한 시장층이 형성되었고 시걸은 이를 발판 삼아 오히려 그 이전보다 출연하는 작품수가 늘어나게 되었으며 무엇보다 굳이 극장 개봉작이 아니라 비디오로 보급이 되더라도 본전회수…가 다 모야, 극장개봉 효과 못지않은 수익을 올리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에서 스티븐 시걸의 액션영화가 그것만의 시장을 형성하게 되었을까?

아시다시피 요즘 사람들 스트레스 장난 아니다. 사회에서 낙오되지 않으려면 남보다 일찍 일어나야 되고, 남보다 더 일해야 하고, 남보다 더 잔머리 굴려야 한다. 설상가상으로 요즘엔 아침형 인간이다, 몸짱이다 해서 유행에 뒤쳐지지 않으려면 바쁜 시간 쪼개 이에 발맞추어야 하니 스트레스가 갑절로 불어난다. 살 낙(樂)이 없는 거다.

해서 스트레스나 풀 겸 영화 한 편 보려고 하면 아, 글씨! 이번엔 입장료가 7,000원이다. 한 푼 벌기 힘든 이때 7,000원이면 짱깨가 거진 세 그릇이요, 맛난 꿀짱구가 14봉지, 민족의 드링크 박카스가 무려 23병이다. 그래도 간만에 큰맘 먹고 영화를 볼작시면 되려 스트레스를 더 쌓아 가지고 나오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니….

이 상황에서 스티븐 시걸의 영화는 관객들이 보기에 굉장히 만만한 홍어좃이다. 무슨 소리인고 하니, 시걸은 영화에 출연하면 오로지 관절꺾기를 향한 액션에만 전념, 매진 할 뿐이다. 그는 결코 연기력에 한눈파는 일이 없다. 이렇게 뽀개기 액션에만 전념하니 보는 관객의 십 년 묵은 체증이 쑤욱 내려가듯 후련할 뿐 아니라 쳐지는 연기력을 커버하려 별다른 표정변화 없이 주먹이나 휘두르고 있는 꼴(?)이 여간 귀여운 것이 아니다. 만만해 좋다.

물론 시걸이 출연하는 영화는 열이면 열 모두 극중 배역 이름 외울 필요 없어 좋고, 줄거리 꽈배기마냥 배배 꼬여있지 않아 이해하기 단순하니 아무 생각 없이 영화 보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그뿐이랴, 또한 그의 영화는 단돈 천원(동네에 따라 오백원 혹은 삼백원)이면 만사 오케이다. 플레이 시켜 놓고 후줄근한 츄리닝 차림에 아랫목에 응뎅이 지지고 누워 무장해제 한 후 보는 시걸 영화 한 편의 여유는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뛰어넘는 스트레스 때려잡는 명약이요, 지친 이들의 엄마 품인 거다.

다시 말해 스티븐 시걸은 병든 환자 혈맥 짚듯 요즘 관객들이 자신에게 원하는 바를 요소요소 꿰뚫어 보고 이를 성실하게 실천하고 있다는 얘기다. 데뷔작인 <형사 니코> 때나 최신작인 <아웃 포 킬>이나 늘어난 머리숱만 예외로 둔다면 변한 것이 대체 뭐가 있던가.

그런 전차로 스티븐 시걸 영화만의 비디오 시장층이 형성되는 건 당연한 거다. 고로 ‘머리보다 주먹이 앞서는 배우’라는 스티븐 시걸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혹평이라기보다는 장본인에게 있어 최고의 찬사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3.

이렇게 해서 본 기자가 극장에서 스티븐 시걸의 영화를 한 편도 안 본 주제에 그의 팬이 된 이유에 대해 알아보았다. 우스개 소리 비스무리하게 표현하긴 했지만 이 글을 읽는 독자 중 시걸의 팬 다수 역시 극장에서 그의 영화를 잘 보지 않을 것이다.

물론, 요즘 극장가에서 시걸의 영화를 틀어줄리 별로 없겠지만 개봉한다고 해도 보러 갈 일은 없을 것이다. 만만한 그의 영화를 극장에서 본다는 것은 거짓말 조금 보태 사치에 가깝기 때문이다. <반지의 제왕>과 같은 대서사 스펙터클 영화는 극장에서 관람해야 제 맛이듯 스티븐 시걸의 영화는 마룻바닥에 디비져 콧구멍 후벼가며 보아야 제 맛이 아니냔 말이다.

이 말은 스티븐 시걸에 대한 놀림의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 독자들은 잘 알고 계실테다. 스티븐 시걸은 그럼으로써 그의 팬들과 눈높이를 맞추고 있기 때문이니, 이는 그에 대한 본 기자의 헌사에 가깝다.

이런 본 기자는 오늘도 하루 종일 업무에 시달린 피로를 덜기 위해 스티븐 시걸의 영화를 빌리러 동네 비디오 대여점으로 향하고 있다. 무릎팍 너덜해진 후줄그레한 츄리닝 차림에 쓰레빠 직직 끌고서….


<딴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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