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의 여왕>은 <1999, 면회>(2013) <족구왕>(2014)에 이은 광화문 시네마의 세 번째 작품이다. 광화문 시네마는 현재의 청춘들이 맞닥뜨린 현실의 문제를 코믹하게 접근하면서 울림 있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재능을 보이는 독립영화 창작 집단이다.
<범죄의 여왕>은 그런 제작사의 정체성에 걸맞게 오락물이면서 소외된 인물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견지한다. 그것이 가능한 건 고시원이라는 배경에 엄마라는 캐릭터를 접목한 까닭이다. 아들의 수도요금 120만 원 때문에 서울 신림동 고시원에 상경한 ‘엄마’ 미경(박지영)은 사건을 해결한다는 명목으로 외롭게 ‘열공’ 중인 고시생들을 하나씩 찾아다니며 그들의 사연을 묻고 관심을 드러낸다. 합격에 대한 욕망은 넘치지만, 이를 분출하지 못한 이들의 어둡고 암울한 기운이 지배하는 고시원이라는 공간은 엄마의 출현에 분위기가 점점 개선되기 시작한다.
한국영화에서 엄마는 대개 주인공의 가족에 불과한(?) 주변 인물이었고 고시촌은 부정적인 이미지로 외면받은 공간이었다. 이요섭 감독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엄마 캐릭터와 고시원 배경을 전면에 내새워 <범죄의 여왕>이라는 개성 있는 영화를 만들었다.
개성의 산실 ‘광화문 시네마’를 찾아 이요섭 감독과 이야기를 나눴다.
광화문 시네마라고 해서 사무실이 광화문인 줄 알았는데 북촌에 있네요. (웃음)
전고운 대표(<범죄의 여왕>의 쿠키 영상에 등장한 <소공녀>의 연출을 맡았다!) 집이 광화문이어서 처음에는 ‘광화문 시네마’였어요. 그 후에 이쪽으로 오게 됐죠.
<족구왕>으로 좋은 흥행 성적을 거뒀어요. 형편이 나아지셔서 이쪽으로 옮긴 건가요?
<족구왕>은 최소 제작비로 만들어 약간의 수익을 냈어요. 여기에 참여한 배우와 스태프가 수익을 1/N 로 나눴어요. 이 사무실도 1/N 중 하나였기 때문에 월세로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에요.
<범죄의 여왕>에 대해 얘기하려면 <족구왕> 엔딩 크레딧에 나오는 <범죄의 여왕> 쿠키 영상을 언급 안 할 수 없죠. 어떻게 장편으로 발전시킨 거죠?
시나리오가 먼저였는지, 쿠키 영상이 먼저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아요. 러프한 형태의 시나리오 같지 않은 트리트먼트가 있었어요. 쿠키 영상의 예고편은 그 초안을 바탕으로 <족구왕> 마스터링 들어갈 즈음에 바쁘게 만들었어요. 처음 이 영화의 아이디어를 떠올린 계기가 있어요. 어머니가 제 수도요금 50만 원을 해결해주신 적이 있어요. 조폭이 관리하는 오래된 주상복합 건물에서 자취하고 있을 때였어요.
감독님의 경험에서 출발한 작품이군요?
어머니가 이들에게 소리를 지르면서 협의를 하는 과정들이 있었어요. 그때 어머니가 탐정처럼 얘기하시더라고요. “5분만 있다 들어와. 소리 질러도 놀라지 말고” (웃음) 저로서는 어안이 벙벙했죠. 5분 후에 들어갔더니 어머니가 관리소장이랑 커피를 마시면서 되게 차분하고 얌전하게 이야기 중이셨어요. 관리소장 왈, 이 문제가 뭔지 알아보겠다. 이 얘기를 듣고 사무실을 나오는데 어머니가 “저 사람 관리소장 아니야, 저 뒤에 컴퓨터 하고 있는 애 있지, 걔가 관리자야”
영화 속 관리사무소에서 아랫사람들에게 일 맡기고 등 돌린 채 컴퓨터 하고 있는 관리소장의 모습이 여기서 나온 거군요?
원래 시나리오는 더 장르적이었어요. 지금 영화에서 ‘십시’(고시 2차 시험을 10번 떨어진 고시생을 십시일반 도와야 한다는 뜻)로 나오는 고시생 캐릭터는 원래 시체 처리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었어요. 다만 배경이 고시촌이다 보니 극 중 살인을 관객들이 이해할 법한 일로 각색하는 과정에서 십시로 바뀌었죠. 시골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이었는데 김태곤 감독님(<1999, 면회> 연출)이 초고를 보시고는 엄마와 아들 관계가 중심에 놓이는 이야기니까 엄마가 상경하는 설정으로 바꾸는 게 좋겠다, 최초의 기획을 해준 거죠.
특별히 고시촌을 주목한 이유가 있나요?
그 당시에 고시촌과 관련한 사건들 얘기가 많았어요. 고시촌에 불을 피워놓고 놀란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면 칼로 찔러 죽이는 사건도 있었어요. 그와 같은 사건들을 계기로 고시촌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예전에는 고시공부를 하기 위해 사람들이 고시촌에 들어갔죠. 지금은 생계유지의 최소한의 것이 갖춰진 공간이 되었어요. 그전에는 고시 합격이라는 꿈을 안고 올라온 사람들이 많았죠. 지금은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 고시촌을 선택하는 사람들로 바뀌고 있어요.
고시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 캐릭터는 대부분 고시 공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죠, 사법고시 준비하는 아들과 이를 뒷바라지하는 엄마라는 설정은 익숙하죠. 사실 한국에서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사법고시를 보는 건 아니죠. 다만 대학을 졸업한 취업준비생을 가지고 개천에서 용 났다 식으로 크게 뒤틀어 보여줄 수 있는 게 사법고시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를 집대성한 공간이 바로 고시촌이죠. 영화의 배경으로 잡으면 흥미롭겠더라고요.
확실히 현실에서도 그렇고 이 영화에서도 고시촌이 주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어요. 이 안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의 내면에는 합격, 성공에 대한 욕망이 부글부글 끓고 있어요. 실제로는 그렇지 못해 부러 억누르고 있어 답답하고 어두운 느낌이랄까요?
영화 속 공간의 전체적인 룩 자체는 하드보일드를 흉내 냈으면 했어요. 시험공부를 위해 모인 사람들의 공간이잖아요. 그 사람들의 의식이 공간 안에 비주얼적으로 반영이 됐으면 했죠. 물론 영화에서 보여준 것과 같은 고시원은 없어요. 지금 고시원들은 잘 만든 모텔 같아요. 되게 깔끔해요. 영화에서는 하드보일드의 틀에 맞춰 암울하고 원색이 강한 느낌이죠. 저도 그렇고, 영화의 스태프들도 고시생이라고 했을 때 처음 갖는 느낌이 우울함이었어요. 근데 노량진이나 신림동에 가서 직접 조사를 해보니 이미지가 전혀 달랐던 거죠. 오히려 영화 찍는 사람들이 옷차림도 어둡고 고시생 같아요. (웃음) 실제대로 표현해서는 제가 원하는 비주얼을 얻을 수 없었던 거죠.
심정적으로 이해하는 접근을 하신 거군요?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부모님 마음은 대개 새카맣게 타들어 가는 상황일 거예요. 사시와 관련한 전문용어는 잘 몰랐는데 취재를 통해 접하면서 이해할 수 있었어요. 1년 넘게 범죄물 시나리오만 쓴 적이 있어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등을 질 수밖에 없었어요. 1년 뒤에 시나리오를 완성하기로 했는데 작업 중에 집에 누가 아프다고 해도 신경을 쓸 수가 없거든요. 그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더 다치게 돼요. 그러니까, 너무 맹목적이 되는 거죠. 외롭고 미쳐버릴 것만 같지만, 그렇다고 주변 사람들에게서 위로를 얻으면 잡고 싶은 걸 못 잡을 것만 같은 심정이 고시생들과 통하는 게 있었어요.
고시촌이 배경이지만, 주인공은 고시생이 아닙니다. 고시생의 엄마, 즉 미경이에요. 감독님의 경험에서 출발했지만, 이걸 영화로 만드는 건 또 다른 문제이잖아요.
어떻게 관객들이 공감할 인물을 뽑아낼까, 고민하던 차에 김태곤 감독님이 이렇게 얘기하더라고요. 엄마는 뭘 하고 다녀도 엄마다, 굳이 많은 설명을 하지 않아도 엄마만큼 이해할 수 있는 인물이 어디 있냐, 모자 관계에서 나올 수 있는 이야기가 많은데 엄마를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놀면 되지 않느냐. 그 얘기에 많이 공감됐어요. 많은 변형을 가해도 캐릭터가 유지될 수 있는 견고한 성 같은 존재인 엄마를 주인공으로 선택한 이유예요.
감독님이 각본까지 쓰셨어요. 아무래도 아들의 관점에서 엄마를 바라볼 수밖에 없잖아요. 거기서 오는 한계를 느끼지는 않으셨나요?
미경이 미움받으면 안돼, 미운 아줌마로 보이게 할 수 없어,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포장해야 할까. 고민을 많이 했고 잘 안 풀렸어요. 시나리오 1고가 나온 후 전고운 대표님이 각색 작업을 하면서 미경 캐릭터가 디테일하게 바뀌었어요. 영화 속에서 미경이 어느 여자에게 이년, 저년 하면서 “말년에 다 외로워지고” 하는 대화가 있어요. 전고운 대표님이 양념을 친 거예요. 엄마이자 여자로 동시에 보이는 역할을 한 거죠. 미경을 연기한 (박)지영 선배가 워낙 귀여운 구석이 많은 여자예요. (웃음) “나 오늘은 더는 힘들어서 못 할 것 같아. 그래도 니가 시키니까 해야지” 하고 열심히 연기한 후에 널브러지면서 이렇게 얘기하세요. “나 오늘 괜찮았어?” 제가 지영 선배를 미경으로 대하는 태도가 편해지더라고요. 제가 생각하는 엄마 이미지와 부합했어요.
그런 성격을 알고 처음부터 미경 역에 박지영 배우님을 염두에 두신 건가요?
마음에 두고 있던 배우들에게 시나리오를 돌렸어요. 그중에 지영 선배가 있었죠. 지영 선배는 시나리오 받은 지 하루 만에 연락을 주셨어요. ‘너희 나 좀 보자’ 이런 느낌이었어요. (웃음) 그래서 갔죠. 얼굴에 손을 괴고 앉아 계셨어요. 예전에 <장녹수> 같은 TV 드라마에서 봤던 이미지 때문인지, 어우~ 너무 떨리는 거예요. 보자마자 “나 이거 재밌게 봤어. 근데 감독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그렇게 말씀하는 방식이 미경 같은 거예요. 그날 지영 선배랑 저랑 PD님이랑 셋이 밥도 안 먹고 다섯 시간이나 얘기를 나눴어요.
미경 역에 따로 모델이 있었을 거라는 심증이 드는 게 미경이 입고 있는 옷의 패턴이 <친절한 금자씨>(2005)의 금자(이영애)를 떠올리게 해요.
미경의 캐릭터를 어떻게 맞출까, 엄마인데 너무 여성스럽게 가도 괜찮을까. 전 겁이 나더라고요. 그때 의상을 맡았던 지지연 실장님(<피에타>(2012))이 영화적으로 접근하면 되지 않느냐는 말씀을 하셨어요. 그 말에 용기를 얻어서 저는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귀향>(2006)에서 페넬로페 크루즈가 연기한 엄마 느낌이 났으면 좋겠다고 구체적으로 얘기했어요. 고시원의 캐릭터 구성이 진숙(이솜)을 제외하면 모두 남자잖아요. 그래서 미경에게 모종의 성적 긴장감이 드러나기를 바랐어요. 그래서 붉은 계열에 어깨 정도 노출하는 옷으로 꾸몄죠.
그 때문에 미경 캐릭터가 눈에 띄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인 것이 고시생들의 외양이 대부분 비슷해 보여요.
전체 밸런스를 잡을 때 익수(김대현)와 하준(허정도)의 콘셉트가 비슷했어요. 저는 누가 살인범이고 아니고는 인간의 악함이 아니라 상황이 만든다고 생각해요. 익수의 방이 노멀하다면 하준의 방은 노멀에서 시험을 수십 번 떨어진 형태로 반영한 거죠. 하준이 여자였다면 진숙의 방이 되는 거고요. 그래서 익수와 하준의 의상은 거의 비슷해요. 다만 둘 사이의 차이는 대화할 수 있는 상대가 있느냐, 없느냐에 있었죠. 익수에게는 엄마라는 소통의 창구가 있는 데 반해 그렇지 않은 하준은 섬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캐릭터 배치는 그렇게 잡아갔어요.
좋은 장르물은 캐릭터와 공간이 조응하면서 이야기를 만들어 가잖아요. <범죄의 여왕>이 그런데요. 감독님께서 연출자 이전에 장르 팬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영화라는 생각도 드네요.
장르물을 너무 좋아해요. 그래서 장르물을 만들되 좋은 게임이 될 수 있으면 하는 게 궁극적인 목적이에요. 크든, 작든 확실한 성격을 가진 공간을 배경으로 좋은 장르물을 쓰고 싶어요. 하드보일드 작품을 보게 되면 담배 연기와 금발 머리와 여자와 선글라스와 빨간 립스틱 그런 것들이 등장하죠. 옛것 같은 느낌이 너무 좋아요. 제가 기억하는 영화의 풍광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 같아요. 다만 <범죄의 여왕>의 미경처럼 고시촌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에 마음이 가요. 그럼으로써 공간에 부여하는 엇박자의 느낌으로 접근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NEXT plus
(2016.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