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인간의 최후의 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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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을 향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 벌써 한 달도 더 전의 일이라 모두 잊으셨으려나.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 대결말이다. 사실 인공지능에 관한 관심이었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전 세계가 주목한 인공지능과의 대결 상대가 한국인이었다는 점 때문에 우리가 더 열광한 것 같다.

좀 시니컬한 반응인가. 기분 나쁘셨다면 사과 드린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다. 바둑의 ‘바 ’ 자도 모르면서 나도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을 관심 있게 지켜봤다. 더 정확히는 인간과 인공지능의 대국이 파생하는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세계적으로 활약하는 우리 선수에 필요 이상으로 감정을 이입하는 한국인 특유의 국민성도 이번 대국이 만들어 낸 수많은 이야기 중 하나였다. 나처럼 바둑의 문외한도 그와 같은 이야기 덕에 이번 대국을 재밌게 관전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뭐 이리 긴장감이 넘치던지. 이세돌의 표정을 살피는 것만으로도 대국이 어느 선수에 유리하게 진행되고 있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다섯 번의 대결 중 한 번 정도 져줄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으로 1국의 경기장에 들어선 이세돌의 표정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인사이드 아웃>의 감정 캐릭터들이 우왕좌왕하듯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침착함에서 긴장으로, 당혹감에서 낭패로, 그의 표정 자체가 대국을 설명하는 이야기의 요약판 같았다.

결과는 5전 1승 4패. 이세돌의 패배, 아니 인공지능의 4승 1패 최종 승리로 마무리되자 디스토피아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앞으로 10년간 1,000억을 투입해 한국형 알파고를 만들겠다는 정부의 무사안일한 소리는 무시하자!) 벌써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월등히 압도해버리니 조만간 인간은 기계의 노예로 전락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었다. 그러면서 언급된 영화들은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1968) <블레이드 러너>(1982) <터미네이터2>(1991) <엑스마키나>(2015) 등과 같은 디스토피아의 걸작들이었다.

근데 이들 영화가 묘사하는 디스토피아는 인공지능의 유해함보다는 이를 활용하는 인간의 악마성이 더 위험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능 게임에서 인공지능이 인간을 압도하는 지금, 인간의 삶을 지옥으로 변모시킨 원인은 다른 데 있다. 인간을 기계부품으로 소비하고 노예처럼 막 대하는 일부 사회 지도층과 재벌 인사들이 소위 ‘헬조선’의 원흉들이 아니던가. 오히려 이번 대국에서 증명된바, 각종 사건·사고로 다이내믹했던 한국사회에 모처럼 정신 건강에 이로운 이벤트로 재미를 가져다준 것이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이었다.

그런 방식으로 인공지능을 활용하고 실생활에 접목한다면 유토피아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가 걱정하는 디스토피아는 예방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내가 이번 대국을 보면서 떠올렸던 작품은 <미저리>이었다. 롭 라이너의 영화를 떠올리는 분들이 계시겠지만, 스티븐 킹의 원작소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싶다. 결론부터 말해, 나는 이번 대결을 보면서 인공지능에 맞서 인간이 우위를 보일 최후의 보루는 결국 이야기라고 확신했다.

<미저리>는 소설가를 집에 가둬두고 쥐덫에 걸린 쥐를 괴롭히는 고양이처럼 구는 미친 여자의 이야기가 아니었던가? 표면상 그렇지만, 그 기저에는 어떠한 순간에도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에 매혹되는 ‘호모 스토리텔러쿠스’와 ‘호모 리더쿠스’의 본능이 짙게 깔려 있다. 당연히 전자는 작가, 후자는 독자를 의미한다.

워낙 강렬한 작품이어서 대략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계실 텐데 그래도 다시 요악하자면, 폴 셀던은 <미저리> 시리즈로 베스트셀러에 오른 유명 작가다. 근데 폴은 부와 명성을 가져다준 <미저리>가 혐오스럽다. 대중의 기호에 영합한 싸구려 통속극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리즈 마지막에 극 중 주인공 미저리를 ‘라이헨바흐 폭포’의 셜록 홈스처럼 사망 처리하고 신작 작업을 서두른다. 우매한 대중은 진가를 몰라봐도 평론가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울 진짜 문학작품을 말이다.

유레카! 자신이 평가하기에 최고 작품을 완성한 폴은 기쁨에 겨운 나머지 최고급 와인 병을 들고 운전을 하다가 눈 폭풍이 몰아치는 외딴 지역에서 전복사고를 당하고 만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의 두 다리는 울퉁불퉁 부러진 뼈가 살 밖으로 삐져나온 채고 현실의 ‘미저리’ 애니 윌킨스가 먹잇감을 살피듯 그의 눈앞에 우뚝 버티고 서있다. 그리고 이후 이어지는 상황은 기억하시는 그대로다. 갇힌 방에서 탈출하려다가 도끼로, 안 그래도 성치 않은 다리가 무릎 아래로 잘려나가고 신작 원고는 애니가 불에 태워 없애 버리며 미저리를 되살리라는 그녀의 강요에 폴은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도 기어이 <미저리>의 신작을 완성한다.

근데 완성한 <미저리>를 처리하는 방식이 기상천외하다. 폴은 애니가 보는 앞에서 완성한 미저리의 원고를 불에 태워버린다. 힘들게 글을 써봤던 이라면 원고를 스스로 없애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 잘 아실 거다. 그러니까, 폴에게 이는 인간으로서, 또한 작가로서 생명을 건 모험이다. 다만 승산 없는 게임이 아닌 것은 폴이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을 기다리는 독자의 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애니는 단순 독자가 아니다. 광적인 독자다. 사람 하나 죽이는 걸 벌레 잡듯 여기는 애니는 사이코패스로 태어났다. 그와 다르게 이야기에 대한 욕구는 모든 사람이 갖고 태어난다. 이 두 개의 성향이 결합하니, 애니는 그동안 자신이 살해했던 사람들의 기사를 모아 일종의 자서전을 만들 정도로 이야기에 대한 이상 집착 증세를 보인다. 폴이 생명과도 같은 자신의 소설을 불태우면서까지 일을 꾸민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정상적인 경우지만, 인간은 그렇게 이야기에 살고 이야기에 죽는 이야기의 존재다. 이야기와 전혀 무관해 보이는 듯한 영역에서도 이야기를 강조하는 건 이유가 있다. 가령, 프로스포츠, 그중 스토브리그가 정규 시즌 못지않게 관심을 끄는 데에는 경기에서는 맛볼 수 없는 또 다른 이야기가 존재하는 까닭이다. 1년 동안 맹활약한 선수는 대박 연봉을 기록하는가 하면 더 높은 리그에 진출해 전국민적인 관심을 끈다. 그와 다르게 활약이 미미해 코칭 스태프와 갈등을 빚었던 선수는 소속할 팀을 찾지 못해 안타까움을 자아내며 명성을 날렸지만, 새로운 리그에서  적응이 수월치 않아 제대로 된 출전기회를 얻지 못해 팬의 애간장을 녹이기도 한다.

혼자 살 수 없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관계를 맺는다. 관계에서는 늘 이야기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고로 이야기는 인간의 감정을 쥐락펴락하는 매체다. 감정 습득이 쉽지 않은 인공지능이 넘볼 수 없는 영역이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 이후 언론은 인간의 창의적인 영역까지 넘보는 인공지능의 능력을 경쟁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소설 쓰는 인공지능, 그림 그리는 인공지능, 심지어 예능 프로그램에서 끝말 잇는 인공지능까지, 이런 식이면 얼마 못 가 인간이 설 영역이 모두 없어질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도 문제는 아니다.

인공지능에 대한 공포를 만드는 것이 결국 이야기다. 나는 여기에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너무 거창하게 말했나. 인공지능이 지배하는 미래 사회에 대한 불안은 앞서 언급했듯이 인공지능을 악용하는 인간의 악마성을 전제한다. 이는 역으로 인공지능이 인간의 삶에 도움이 되는 미래에 대한 기대감의 반영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이처럼 다채로운 감정을 효과적으로 담아내는 인간 삶의 방파제 같은 것이다.

감정이 존재하는 한 사람은 이야기를 떠나서 살 수 없다. 이야기는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출근길의 버스에서, 퇴근길의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을 정신없이 들여다보는 것도 결국 이야기에 대한 욕구 때문이다. 손 한 뼘 크기의 액정에 담긴 연예인의 가십 기사에서도 우리는 이야기를 발견하고 ‘카톡’거리면서 키득키득 주고받는 메시지 속에 관계를 생성해 상대방과의 역사를 만들어간다.

결국, 이야기는 인간이 살아가는 원동력이자 동굴에 갇힌 삶에 비추는 빛과 같다. <미저리>의 폴 셀던이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가는 와중에도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건 그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를 알리겠다는 욕구의 발현이었을 테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에 촉각을 곤두세웠던 이유는 살아생전 쉽게 볼 수 없었던 이야기가 거기에 존재했던 까닭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도 연필을 들고 종이에, 엄지손가락으로 스마트폰 액정에, 키보드를 두드려 모니터에 쓰고 또 쓰고, 그렇게 쓰고 있다. 모두가 하나같이 자신의 삶의 작가인 것이다. 그래서 인류 최후의 날에도 인간은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 속에서 희망을 찾으려 애쓸 것이다. 인공지능은 넘볼 수 없는 이야기를 각자의 영역에서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인간이 살 길이 아닐까.

 

ARENA HOMME
2016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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