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은 왜 핏빛 복수극에 나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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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영화계가 주목하는 소재는 다름 아닌 ‘복수’다. 사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복수는 영화가 시간을 가리지 않고 사랑해온 소재이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의 복수 소재 영화들이 과거와 다른 양상을 보인다면 복수의 주체가 남자에서 여자로, 개인에서 연대로 현저하게 변화하고 있는 까닭이다. 여기에는 힘없는 국민들을 보호해야 할 공권력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서 생겨난 민초들의 불신의 시선이 짙게 깔려있다.

지금 극장가는 복수가 대세

<늑대소년> 열풍에 빛이 바래기는 했지만 <내가 살인범이다>(11/8 개봉)는 개봉 7일만에 1백만 관객을 돌파하며 극장가의 복수 열기에 불을 지폈다. 정병길 감독의 <내가 살인범이다>는 연쇄살인범에게 여자 친구를 잃은 형사 최형구(정재영)의 복수 이야기다. 그런데 최형구가 쫓는 연쇄살인범 이두석(박시후)은 그야 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다. 공소 시효가 끝나자마자 자신의 악행을 낱낱이 고백한 자서전을 발표하고 베스트셀러 작가에 오른 것. 그동안 형사 일은 하는 둥 마는 둥 폐인처럼 지내던 최형구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다시금 이두석을 검거하기 위해 일선으로 복귀한다.

김용한 감독의 <돈 크라이 마미>(11/22)는 딸의 복수를 감행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여성 버전의 <아저씨>로 통한다. 유림(유선)은 남편과의 이혼 후 막 여고생이 된 딸 은아(남보라)와 서로 의지하며 오붓하게 살아가는 중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은아가 같은 학교 남학생들에게 성폭행 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곧 가해자 남학생들은 경찰에 잡히지만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솜방망이 처벌을 받는 데 그친다.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던 은아는 가해자들이 풀려났다는 소식에 결국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비상식적인 법의 처벌에 딸을 잃은 엄마 유림은 그 자신이 사적인 집행자가 되어 직접 응징에 나선다.

강풀의 동명웹툰을 원작으로 한 조근현 감독의 <26년>(11/29 예정)은 광주 비극의 주범 ‘그 사람’을 단죄하려 뜻을 모은 이들의 사연을 다룬다. 조직폭력배 곽진배(진구), 사격 선수 심미진(한혜진), 현직 경찰 권정혁(임슬옹)은 모두 1980년 5월 광주에서 부모, 형제를 잃은 아픔을 갖고 있다. 이들 앞에 대기업 총수 김갑세(이경영)와 사설 경호업체 실장 김주안(배수빈)이 나타난다. 광주 비극의 희생자들이 여전히 고통 받고 있는 지금도 온갖 특권과 혜택을 누리면서 가진 재산은 29만원뿐이라고 국민을 농락하는 그 사람을 그대로 둬서는 안 된다는 것. 진배와 미진과 정혁은 갑세와 주안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행동에 나선다.

스크린 수가 많지 않아 큰 주목을 끌지 못했던 <나쁜피>(11/1)와 아직 개봉일이 잡히지 않은 <공정사회> 역시 이 범주에 속한다. 강효진 감독의 <나쁜피>는 딸이 아버지에게 복수하는 내용이다. 자신이 강간에 의해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여대생이 아버지를 죽일 결심을 하는 것. 올해 부산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인 이지승 감독의 <공정사회>는 <돈 크라이 마미>와 함께 평범한 주부의 복수극을 다룬다고 해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역시 발단은 성폭행이다. 10대 딸을 성폭행한 가해자들이 부실수사로 인해 합당한 죗값을 받지 않자 전직 치과 간호사 출신의 엄마가 직접 사적인 처벌에 나서는 것이다.

변화한 복수의 주체

2010년에는 지금 보다 더 많은 복수 소재의 영화가 등장했었다.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아저씨>와 <악마를 보았다>이었다. 두 영화가 각각 흥행 면에서, 이슈 면에서 우리 사회에 던진 충격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연쇄살인마가 활개 치는 사회, 이를 제어하지 못하는 공권력 부재의 사회, 그럼으로써 사적 복수가 당연시되는 사회, 결국 잔인함에 둔감해진 사회를 거울처럼 반영한 결과였다. 아닌 게 아니라, 이정범 감독의 <아저씨>는 마약 범죄에 연루된 옆집 소녀를 구하기 위한,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는 연쇄살인범에게 약혼녀를 잔인하게 살해당한 남자의 복수극을 잔혹할 정도로 묘사했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두 영화의 방점은 ‘남자’다.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아이 대상 범죄의 파렴치한과 연쇄 살인범 등 현실의 악한을 그대로 끌어들인 이 영화들은 하나 같이 복수의 주체로 남자가 등장한다. 그냥 남자가 아니다. <아저씨>의 태식(원빈)은 극비 특작부대의 섬멸요원으로 복무했던 전력을 가진 인간병기였고, <악마를 보았다>의 수현(이병헌)은 고위 간부를 수행하는 현직 국정원 경호원이었다. 태식은 혈연단신 마약조직에 맞서 이웃집 소녀 소미(김새론)를 구출하는 구원자로, 수현은 연쇄살인범 경철(최민식)을 가지고 놀듯이 고통을 주다가 결국에는 그의 머리에 단죄를 가하는 응징자로 묘사된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들 영화가 내세운 복수는 물리적인 힘을 가진 남자들의 전유물처럼 인식됐다. 바로 이 지점에서 2010년의 복수극과 2012년의 복수극은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복수를 전면에 내세운다는 점에서 공통된 장르로 묶이지만 이를 행하는 주체는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내가 살인범이다> 정도만 형사 출신의 남자 주인공이 주체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2010년의 복수극과 맥을 함께할 뿐 <나쁜피> <돈 크라이 마미> <공정사회>는 여자가, <26년>은 개별적인 인물이 아닌 힘없는 개인들이 연대해 복수를 행한다는 점에서 2012년의 복수극은 완전히 다른 양상을 보이는 것이다.

<내가 살인범이다>의 경우처럼 우리 사회는 여전히 연쇄살인범이 판을 치고 있다. 극 중 묘사에 의하면 심지어 사회적인 인기를 구가하며 명사의 지위까지 넘볼 태세다. 연쇄살인범뿐이 아니다. <돈 크라이 마미> <공정사회>의 성폭행 가해자는 그들이 행한 악행에도 불구,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는다. 안타깝지만 이는 관성이 되어버린 우리 사회의 곪아터진 환부다. <26년>의 그 사람은 대통령 권좌에서 물러난 후에도 여전히 살아있는 권력으로 군림하고 있지 않은가. 이를 예방하고 제지해야 할 공권력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태식이나 수현처럼 힘을 갖고 있지 못한 이들은 계속해서 희생을 당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몰린 것이다.  

남자에서 여자로, 개인에서 연대로

그것은 2010년과 2012년 사이의 변화한 사회상으로 풀어볼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공권력의 변화한 성격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아저씨>와 <악마를 보았다>에서 묘사되는 공권력은 극 중 마약조직이나 연쇄살인범을 검거하기에는 능력이 모자라는 집단이었다. 늘 주인공들이 문제를 해결한 후에야 뒤늦게 도착해 현장을 정리하는 것이 이들의 몫이었다. 현실에서 우리가 공권력에 갖는 인상이라는 것이 그랬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초월적인 능력을 갖춘 태식이나 수현 같은 인물이 필요했다. 요컨대, 암울한 현실에 판타지를 개입시켜 잠시나마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건데 그렇다고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될까.

그동안 공권력은 능력이 모자란 것은 물론 몰래 권력과 유착하고 범죄 집단과 손을 잡는 등 비리 집단으로 고착화되어갔다. <돈 크라이 마미>와 <공정사회>의 성폭행 가해자들은 각각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부실수사 때문에 강력한 처벌은커녕 금방 풀려났고 <26년>의 그 사람은 아방궁 주변에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경호집단을 세워두고 호의호식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이는 <아저씨>나 <악마를 보았다>에서 묘사되는 특별한 형태의 범죄가 아니라 바로 우리 이웃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것이기에 피부로 감지되는 분노는 더욱 크다.

다시 말해, 지금 우리 사회는 가해자가 피해자보다 더 큰 목소리를 내고 특권을 누리고 있을 만큼 비정상적으로 흘러가고 있다. 세상이 미쳐도 한참 미쳤다. 희생자, 그중에서도 힘없고 ‘빽’없는 약자들은 얼마나 더 억울할까. 쥐도 코너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 <내가 살인범이다>를 제외하면 서두에서 언급된 영화 속 복수의 주체는 모두 우리 사회의 소수자고 약자다. 그리고 이들이 복수에 나서는 시점은 <아저씨>의 태식이나 <악마를 보았다>의 수현처럼 감정적이고 그래서 즉흥적인 것도 아니다. 이들은 끝까지 법과 공권력을 믿고 억울함을 호소하려다가 오히려 뒤통수를 맞은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다보니 지금의 복수 소재 영화들은 극 중 주인공으로 하여금 복수를 추동하는 서사 자체가 완전히 변모했다. 애당초 이들의 목표는 복수가 아니다. 예컨대, <돈 크라이 마미>의 유림은 가해자들을 응징하겠다며 그 자신이 나서지만 살해가 최종 목표는 아니었다. 딸의 죽음에 대한 가해자의 책임을 묻는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르다보니 결과적으로 복수극이 되고 마는 것. <26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 단죄의 작전 설계자로 나서는 김갑세의 극 중 대사 “부끄러운 줄 알아. 더 늦기 전에 용서를 빌어”처럼 원래 목표는 사과를 받아내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공정사회는 과연 이뤄질 것인가?

그러니까 이들의 복수에는 복수 그 자체보다 시위하고 싶은 욕망이 더 짙게 깔려 있다. 국민의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어줘야 할 공권력에게조차 보호받지 못해 억울함을 호소하고 싶은 마음, 그리고 그것이 최종적으로 향하는 지점은 공권력이 바로 서고, 더 이상 억울한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하는 ‘공정사회’다. 하지만 이들의 복수를 통한 시위가 그들의 바램처럼 이뤄지는가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영화들이 유예하는 결말을 취한다. <아저씨>와 <악마를 보았다>가 결과적으로 복수를 완성하는 형태였던 것에 반해 <돈 크라이 마미>와 <공정사회>와 <26년>의 결말은 완성형과는 거리가 멀다.

이는 이들 복수의 주체가 사회적인 약자인 탓에 빚어진 필연적인 결과다. 이들에게는 뒤에서 돌봐줄 권력이나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여자 혼자의 힘만으로, 없는 자들끼리의 연대만으로 공정사회를 바라기에 이 세상은 이미 가진 자들의 것이 된 지 오래다. “이런 좆같은 나라에서 아이들을 키운다는 게 정말 좆같구먼. 이민을 가든지…….”(<돈 크라이 마미>의 유림), “어른이, 경찰이 돼서도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26년>의 정혁)라는 극 중 대사처럼 부르주아지의 장악력이 국가권력과 동급이 된 상황에서 공권력은 시민들의 안전에 복무하는 대신 자본주의의 재산과 사생활을 보호하는 선과 악 사이의 박쥐같은 존재로 전락했다. 이들 영화가 결과적으로 제한적인 복수극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이유다.

그래서 남게 되는 것은 ‘피해자 정서’다. <내가 살인범이다>의 폭발적인 관객 동원과 <돈 크라이 마미>와 <26년>이 개봉 전부터 뜨거운 관심을 모으며 미리부터 관객의 공감대를 사는 이유는 그만큼 우리 사회에 억울한 사연들이 많다는 방증이다. 그러다보니 이들 영화는 완성도 이전 사회적인 메시지를 부각하는 데 더욱 집중한다. 연쇄 살인범에 대한 공소 시효와 선정적인 언론에 대한 문제 제기(<내가 살인범이다>), 미성년들의 강력범죄에 대한 합당한 처벌 촉구(<돈 크리아 마미><공정사회>), 부끄러운 역사 청산에 대한 필요성의 역설(<26년>)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이 파생하는 효과는 결국 질문이다. 이들 영화들이 피해자 정서를 통해 관객들에게 불러일으키는 분노의 에너지를 과연 어떤 방식으로, 아니 어떻게 긍정적으로 전환시킬 것인가. 그런 점에서 <내가 살인범이다> <돈 크라이 마미> <26년> <공정사회>가 취하는 연출론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들이 관객이 분노를 생성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식은 ‘자극’이다. 자극적인 장면을 통해 관객의 분노를 조장하는 것인데 이들 영화들이 취하는 유예하는 결말에는 공정사회에 대한 촉구 대신 ‘눈에는 눈, 이에는 이’와 같은 방식의 폭력의 악순환만이 더 크게 다가온다. 이는 복수 소재의 영화들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론이다. 폭력에 둔감해지는 우리 사회의 또 하나의 반영일까. 분노를 잠시간 극복할 수 있는 극약처방은 될지언정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닌 것이다. 이들 복수 소재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의 마음이 사회적으로나 영화적으로 그리 편치만은 않은 이유다.  

movieweek
NO. 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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