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하게 위대하게>는 조회 수가 4천만을 넘어설 정도로 인기를 끈 동명의 웹툰이 원작인 영화다. 남파간첩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되 20대 청년인데다가 특히 ‘꽃미남’으로 묘사돼서 젊은 여성 팬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었다. 그런 웹툰 팬들을 고스란히 극장으로 불러 모을 심산인지 영화는 원작을 훼손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북한에서 혁명전사로 길러진 원류환(김수현)은 남한에 간첩으로 잠입한다. 그의 임무는 바보로 위장하여 최하층 달동네로 스며드는 것. 이름을 방동구로 바꾸고 2년 동안 생활했지만 북한에서는 아무런 명령도 내려오지 않는다. 대신 그를 감시하겠다며 각각 가수지망생과 고등학생으로 변장한 리해랑(박기웅)과 리해진(이현우)이 내려온다. 때맞춰 북한 지도부로부터 임무 대신 자결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사실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영화적으로 봤을 때 그리 매력적인 작품은 아니다. 이미 언급했듯 원작을 그대로 따르는 까닭에 웹툰과의 차별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이 영화의 감독이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2010)로 칸영화제에서 먼저 주목했던 장철수라는 점을 감안하면 아쉬움이 더욱 크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굳이 <은밀하게 위대하게>를 주목한 건 한국의 첩보물 계보에서 특별한 위치를 점하는 까닭이다.
올해의 첫 한국영화 흥행작이었던 류승완 감독의 <베를린>은 800만 관객을 동원하며 첩보물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다만 과거 냉전의 상징 같은 장소인 베를린을 배경으로 한 <베를린>은 남북한 요원의 대치를 전면에 드러낸 정통 첩보물이었다. 그에 비해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첩보물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꽃미남 문화를 더해 일종의 장르 실험을 펼친다.
첩보물은 한국 외에도 할리우드(<본> 시리즈), 영국(<007> 시리즈), 홍콩(<무간도> 시리즈> 등 전 세계가 만들고 사랑하는 공용어 같은 장르다. 그래서 꽃미남 간첩의 등장은 한국형 첩보물에 대한 기대감을 높인 게 사실이다. 여성 팬들이 잘 생긴 남자 연예인에 열광하는 건 동서양을 통틀어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꽃미남이라는 용어까지 만들어 숭배하는 건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문화다. 이를 분단 상황과 절묘하게 이식하니, 작금에 처한 한국의 현실이 강하게 묻어난다.
간첩을 꽃미남과 이종교배(?)함으로써 얻게 되는 효과는 바로 ‘인간’ 혹은 ‘사람’이다. 간첩은 인간병기라는 편견 상 그 존재만으로 무시무시함을 전제한다. 하지만 ‘샤방샤방’한 미모를 지닌 꽃미남으로 존재의 충격을 완화하면서 관객은 감정이입이 용이해진다. 물론 간첩이나 꽃미남은 평범한 이들의 입장에서 모두 특별한 존재에 다름 아니다. 다만 꽃미남에 열광하는 문화가 팬들의 동경과 관심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간첩과 다르게 ‘꽃미남 간첩’은 우리와의 동일시가 용이해진다.
아니나 달라, 극 중 원류환은 어려서부터 사람을 살해하도록 훈련받았지만 가슴 속에는 늘 ‘오마니’를 향한 그리움으로 눈물이 마를 새가 없다. 북에 있는 가족이 보고 싶다며 눈물을 흘리는 동료 간첩에게는 사상이 의심스럽다며 반역 운운하지만 그 자신 또한 어머니를 잊지 못해 주소 없는 편지를 매일 같이 쓰며 장판 밑에 몰래 숨겨둔다. 꽃미남과 간첩이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개념의 결합으로 투영된 인간과 인간병기 사이에서의 정체성 혼란은 남과 북이라는 상반된 이념의 비극성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것이다.
원류환을 비롯해 리해랑과 리해진 역시 자결 명령을 받고도 순순히 따르지 않는 것은 그런 심적 어지러움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다. 가족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본능은 인간이 인간임을 증명하는 최우선 조건이다. 국가가 강제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인간병기로 길러지기 이전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문제는 한국이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분단국으로 존재한다는 데 있다. 안 그래도 장철수 감독은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메시지에 대한 입장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남북이 분단된 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이념 차이로 인해 전쟁과 상관없는 세대들까지 희생되고 있다. 이 영화를 보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이것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이런 일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면 한다.” 그런데 장철수 감독이 말한 ‘전쟁과 상관없는 세대’는 다만 북한의 청년들에만 해당할까. 그렇다면 꽃미남 간첩 삼인방은 서울의 그 많은 곳을 놔두고 왜 굳이 달동네로 들어와야만 했던 걸까. 북한에 비해 살만할지는 모르지만 생존에 대해 느끼는 주민들의 고통의 정도가 비슷하기 때문은 아닐까.
달동네 주민들 사이에 낀 원류환, 리해랑, 리해진의 모습은 전혀 이질적이지가 않다. 북한에 비해 먹을 것이 많다며 감격하는 모습이 간간히 웃음을 선사하지만 주민들 각자에게는 남모를 삶의 고민으로 하루하루가 버겁기만 하다. 원류환이 묵고 있는 구멍가게의 형은 자기들 상품을 쓰라는 깡패들의 협박에, 원류환의 짝사랑 녀는 ‘을’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는 회사 사장의 ‘갑’질에, 이웃집 싱글 맘은 국가의 도움 없이 홀로 쌍둥이를 키워야 하기에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남북의 이념 대립보다 기성세대와 청년세대 간의 갈등에 더 주목한다. 지금 남과 북의 청년들이 삶에 있어서나, 이념에 있어서, 종국엔 생존에 있어서 혼란을 겪는 건 전적으로 기성세대의 책임이다. 전쟁준비에 몰두하며 인민의 안위를 방치하는 북한의 기성세대, 빈익빈부익부가 날로 심화되어도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못하는 남한의 위정자들은 결코 다른 종류의 인간들이 아니다. <은밀하게 위대하게>에는 기성세대에 대한 분노와 청년세대에 대한 안타까움이 대립하는 청춘의 송가(頌歌)라고 할 만하다.
시사저널
NO. 1234
와… 글 좋다. 나뭉님 이제 유연하고 원숙하기까지 해. ^^
부럼삼.
좋은 글 계속 부탁드림.
버디 형, 이런 댓글은 공개적으로 써주셔도 되는데요 ㅋㅋ 농담이고요. 항상 버디님의 말씀은 제게는 힘이 돼요.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요. 다음 번 모임 때 참석하게 되면 연락주세요. 저도 꼭 참석해서 인사 드릴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