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아니 위기의 개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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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가장 뜨거웠던 문화계의 키워드를 꼽으라면 단연 <위대한 개츠비>이었다. 동명의 영화가 발단이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토비 맥과이어, 캐리 멀리건 등 할리우드의 가장 뜨거운 남녀 스타가 동반 출연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관심이 얼마나 높았던지, 소설가 김영하가 새롭게 번역한 원작소설이 영화 개봉 즈음하여 모 대형서점 고전부문의 1위에 오르기까지 했다. 가히 ‘<위대한 개츠비>의 부활’이라는 수식이 과장이 아닐 정도였다.

사실 F. 스콧 피츠제럴드가 쓴 <위대한 개츠비>는 1925년 발표된 이래 자국 미국에서뿐만 아니라 전 세계 독자들로부터 꾸준히 사랑받아온 고전 중의 고전이다. 개인적으로도 고등학교 재학 당시 문학 수업 과제로 <위대한 개츠비>가 배당되어 꾸역꾸역(?) 읽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뿐이겠는가. 비슷한 기억을 공유한 이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럴 정도니 내용은 잘 모를지라도 이 ‘위대한’ 소설의 제목만큼은 적어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터다.

다만, 지난 한 달 동안 전 세계에 불어 닥친 <위대한 개츠비> 현상은 어딘가 기획된 성격이 강하다. 이는 ‘<위대한 개츠비>가 왜 지금 이 시점에 부활했는가?’라는 질문의 맥락과 맞닿아있다. 질문 속의 시점이란 곧 영화의 개봉을 전후한 시간대를 말한다. 특히 할리우드는 개봉 일 속에 해당 영화가 노리는 바를 의도적으로 심어놓기도 한다. 대통령으로서 버락 오바마의 뿌리가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알리는 <링컨>(2012)의 개봉이 미국 대선기간이었던 11월 둘째 주에 잡혔던 것처럼 말이다. <위대한 개츠비>도 다르지 않다.

<위대한 개츠비>는 국내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만한 내용은 아니다. 소설의 시점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위대한 개츠비>는 닉 캐러웨이(영화에서는 토비 맥과이어가 연기)가 친구였던 제이 개츠비(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이 둘은 세계 1차 대전에 참전했던 전우 사이였지만 그 후 연락 없이 지내다 개츠비의 저택 옆으로 닉이 이사를 오면서 다시금 연을 맺게 된다. 오랜만에 만난 개츠비는 미국의 신흥부호였다. 개츠비의 대저택에서는 매일 같이 화려한 파티가 열렸고 사람들은 개츠비를 만나기 위해 줄을 섰다.

그런데 개츠비가 흥청망청한 파티를 매일 같이 여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옛 연인인 데이지(캐리 멀리건)에 대한 사랑을 잊지 못해서다. 개츠비는 마침내 닉의 주선으로 그녀와 조우하는 데 성공하지만 데이지는 다른 남자와 이미 결혼을 한 상태다. 여전히 순수를 간직한 개츠비는 그녀가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을 거두지 않는다. 그러면서 데이지의 남편 몰래 사랑을 나누지만 그녀가 운전 부주의로 사람을 죽이고 만다. 개츠비는 오직 데이지를 향한 마음으로 사고를 뒤집어쓰기에 이르고 결국 이들의 관계는 비극적으로 끝을 맺는다.

요약한 이야기만 보면 <위대한 개츠비>는 로맨스(?) 소설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소설이 발표된 건 앞서 밝힌 대로 1925년이었다. 이 시기는 미국이 막 신흥 강대국으로 발돋움하던 때였다. 세계 1차 대전에 참전하여 유럽의 운명을 좌지우지했던 미국은 극 중 젊은 나이의 개츠비처럼 미천한 역사를 지닌 풋내기 국가에 불과했지만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무시할 수 없는 위치를 점한 상태였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위대한 개츠비>의 신흥부호 개츠비가 당시의 미국의 위상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위대한 개츠비>가 ’20세기 미국 문학의 최고 걸작’이란 평을 듣는 이유는 단순히 미국과 개츠비의 연관성 때문은 아니다. 당시 미국은 국가적인 위상이 날로 치솟고 있었지만 전 세계는 여전히 전쟁의 불씨를 안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미국인들 역시 언제 추락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잔존하고 있었다. 즉, 미국인들에게 필요했던 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무한한 긍정성, 즉 낙관주의였다. 데이지를 향한 개츠비의 무모할 정도의 일편단심이야말로 당시의 미국이 필요로 했던 시대정신에 정확히 부합하는 것이었다.

<위대한 개츠비>가 지금 미국인들에게 다시금 소환되는 이유도 그런 맥락이다. 미국은 1920년대 이후 누렸던 독보적인 강대국 위치에서 그 지위를 중국에 넘겨줄지도 모르는 국가 비상사태와 다름없는 위기 상황에 직면했다. 최강대국의 지위에 올라 이를 어떻게 지속적으로 유지할지 고심하던 1920년대의 상황과는 완전히 정반대가 되었다. 하지만 국가적인 위상과 관련해 가장 급변하는 시기를 맞고 있다는 점에서 2013년의 미국은 1925년의 미국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함정이 존재한다. <위대한 개츠비>의 주제는 개츠비로 상징되는 낙관주의지만 극 중 묘사의 8할이 파티 장면에 할애되어 있다. 피츠제랄드가 묘사한 개츠비 저택에서의 파티 묘사는 미리 터뜨린 샴페인과 비슷해서 거품이 다 가신 후에야 비로소 그 참 맛을 맛볼 수 있다. 로맨스 소설의 외양을 지니고 있지만 그렇다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피츠제럴드가 개츠비가 아닌 닉 캐러웨이를 소설의 화자로 삼은 이유가 드러난다.

한마디로 닉은 개츠비와 다르게 현실에 발을 디딘, 다시 말해 객관적으로 자신이 처한 현실을 살필 수 있는 인물이다. 독자는 개츠비가 아닌 닉에게로 자연스럽게 감정을 이입한다. 개츠비는 살아 숨 쉬는 인물이라기보다 혼탁한 시대에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표지판’에 가깝다. 그래서 <위대한 개츠비>의 형식을 구상하는 데 있어 피츠제럴드에겐 개츠비를 바라보고 진가를 이해해줄 화자가 필요했을 터다. 대신 화자는 우리처럼 범인(凡人)이어야 해서, 개츠비를 표지판 삼아 뿌옇게 안개 낀 현실로부터 밝은 미래로 나아갈 수가 있는 거다.

실제로 지금의 미국인들은 닉처럼 삶이 불안하고 미래가 불투명해서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심정으로 현실을 버티는 중이다. 이들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건, 개츠비의 회상을 마무리하는 닉 캐러웨이의 소설 속 맺음말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그러므로 우리는 물결을 거스르는 배처럼, 쉴 새 없이 과거 속으로 밀려나면서도 끝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미국의 불안을 직접적으로 반영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던 두 편의 소설이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일 것이다.    

지난해 영화화되어 아카데미 시상식 주요 부문의 후보에 오를 정도로 좋은 평가를 받았던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은 동명소설이 원작이다.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의 초반부에는 <위대한 개츠비>에 대한 인용이 등장한다. 주인공 팻은 지금 막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상태다. 앞으로 그의 목표는 하나. 정신병을 앓고 있는 그를 떠난 전(全)부인과 재결합하는 것. “제발 문학작품 좀 읽어보라”고 닦달하던 전부인의 잔소리를 떠올린 팻은 <위대한 개츠비>를 읽기 시작한다.  

국내에서도 많은 독자를 거느리고 있는 폴 오스터의 신작 <선셋 파크>에서도 <위대한 개츠비>가 언급된다. 28살의 마일스는 형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끼고 집을 나와 미국 전역을 떠도는 중이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졸업반인 필라를 만나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10살이 훌쩍 넘는 나이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마일스가 필라에게 관심을 갖게 된 건 순전히 그녀가 읽고 있었던 <위대한 개츠비> 때문이었다. 마침 마일스도 똑같은 책을 읽는 중이었고 자연스럽게 이 소설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커플이 된다.

두 소설에서 우연처럼 <위대한 개츠비>가 언급되는 건 작금의 미국을 반영한 주인공들의 현실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선셋 파크>의 마일스는 친구들과 함께 집세를 내지 못해 주인이 쫓겨난 빈 집에 몰래 들어가 전전하며 산다. 이런 설정은 경기침체로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내몰린 미국의 무주택자들을 연상시킨다.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의 팻은 앞서 설명한대로 전(前)부인 문제로 정신병을 앓고 있고 티파니의 경우, 남편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회사 사람들과 모두 잠자리를 가질 정도로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상태다.

<선셋 파크>를 쓴 폴 오스터나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의 저자 매튜 퀵이 바라보는 미국은 계속된 불안의 여파로 영혼이 바스러지기 일보직전의 상태다. 다만 이들 작품은 현실에 고개 숙이고 비관하기보다 <위대한 개츠비>를 미래의 표지판 혹은 진통제 삼아 한줌의 희망이라도 건져 올리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개츠비로 상징되는 미국의 낙관주의를 지금 미국인들의 가슴에 불어넣고자 할리우드가 <위대한 개츠비>의 영화화를 기획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미국에서는 추락한 가치를 바로 세우기 위한 작업이 한창이다. 지금의 고통이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밑거름이 된다(<선셋파크>)고 설파하는가 하면 사랑으로 이를 극복하자(<실버라이닝 플레이북>)고 말하기도 한다. 좋은 말이다. 하지만 작품의 인기를 떠나 실의에 빠진 미국인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다.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역습이 거세고 내부적으로는 금융시장의 불안정에, 그에 따른 경기 침체에, 종국엔 국민들 간의 불평등 심화로 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봐야할지 모를 지경이기 때문이다.

지금 미국에게 필요한 건 이상적인 형태의 메시지가 아니다. 무조건적인 낙관주의가 들어설 마음의 여유가 지금 미국인들에게는 없다. <위대한 개츠비>를 앞세워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움직임은 흡사 돈만 펑펑 썼지 실속 없이 끝난 파티처럼 공허할 뿐이다. 영화가 극장에서 내려가자 거짓말처럼 사그라진 <위대한 개츠비> 현상이 이를 증명하지 않나. 오히려 <위대한 개츠비>의 소환은 지금 미국인들이 느끼는 위기감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려주는 바로미터처럼 비친다. 위대한 개츠비? 위기의 개츠비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ARENA
2013년 7월호

2 thoughts on “위대한 개츠비? 아니 위기의 개츠비”

  1. 허남웅 칼럼니스트님. 평소 글 잘 읽고 있어요. 완전 팬이랍니다. 오늘 생일이라고 건너건너 전해들어서 부끄럽지만 이렇게 댓글 남겨요. 생일 정말 축하드려요. 건강하시고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써주세요. 늘 응원할게요. 화이팅! 생일 축하!!

    1. 와~ 생일 축하 감사합니다. ^^ 이왕 선물까지 주시면 더 좋을 텐데 ^^; 농담이고요. 제 팬이라고 커밍아웃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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