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 안 한국을 넘어서자

사용자 삽입 이미지프로야구의 한국시리즈도 이제 막을 내렸고 한 해를 결산하는 각종 시상식이 줄을 잇고 있다. 어떤 선수가 잘했는지, 어디 팀의 코치진들이 뛰어났는지를 평가하는 자리라는 점에서 팀의 순위 결정 못지않게 관심을 끄는 것이 시상식의 묘미다.

많은 이들이 주목하는 행사인 만큼 심사를 하는 데 가장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은 공정성이다. 야구가 아무리 기록과 통계의 스포츠라지만 수치로 잡히지 않는 공헌도가 있기 때문에 의외의 결과로 놀라움을 주기도 한다. 여기에는 심사하는 개인의 주관적인 견해가 개입할 수밖에 없는데 그런 까닭에 종종 시상의 공정성 문제가 제기되고는 한다.

올해에는 신설된 ‘최동원상’이 그렇다. 최동원상은 3년 전 작고한 한국의 전설적인 투수 최동원을 기리며 시즌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펼친 투수에게 주는 상이다. 미국 메이저리그의 ‘사이영상’, 일본 프로야구의 ‘사와무라상’과 같은 영예와 권위를 가진 상을 만들어보자는 의미에서 최동원 기념 사업회가 만들었다. 그러면서 최동원상의 초대 수상자로 기아 타이거즈의 양현종 선수를 선정했다.  

양현종 선수는 올해 29경기에 선발로 나와 16승 8패를 기록했고 평균 자책점 4.25를 찍었다. 기록으로 보건대 좋은 성적이지만,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기에 방어율이 못 미치는 것이 사실이다. 오히려 양현종보다 뛰어난 실력을 발휘한 선수는 넥센 히어로즈의 밴 헤켄이었다. 수치로도 이는 명확히 드러나는데 2007년 두산 베어스의 다니엘 리오스 이후 7년 만에 20승을 올리며 다승 1위를 차지하였고 방어율은 3.51을 기록했다.

그럼에도 초대 최동원상 수상자로 양현종이 선정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최동원상의 가장 중요한 선정 기준이 바로 ‘한국인 투수’이기 때문이다. 이를 의식하였는지 수상자를 한국인 투수로만 제한한 것에 대해 최동원 기념사업회의 관계자도 ‘비판이 많다는 것을 안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충분히 예상했던 반응이라는 얘기다.

내가 최동원상 선정 기준 회의에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그 과정은 어느 정도 그림이 그려진다. ‘선정 대상은 어디까지 할까요?’ ‘모든 투수를 대상으로 해야겠죠.’ ‘에이, 그래도 최동원상인데 국내 선수에게 힘을 쏟아주는 게 좋지 않을까요?’ ‘초대 수상자로 외국인이 받으면 모양새가 이상할 것도 같죠?’ ‘그럼 한국 투수로만 제한해서 수상자를 선정합시다.’ 쾅쾅쾅!

이래서는 상의 권위를 인정받기 힘들다. 메이저리그 사이영상의 경우, 펠릭스 에르난데스(베네수엘라, 2010), 요한 산타나(베네수엘라, 2006, 2004), 바톨로 콜론(도미니카 공화국, 2005), 에릭 가니에(캐나다, 2003), 페드로 마르티네즈(도미니카 공화국, 2000,1999,1997) 등 미국 국적이 아님에도 뛰어난 실력만으로 수상의 영예를 안은 선수들이 즐비하다.

대상 자격이 (모두에게!) 동등하고 기준은 (당연히) 엄격하다 보니 사이영상은 메이저리그에서 활동하는 투수라면 현역 시절 동안 한 번은 받고 싶어 할 만큼 권위 있는 상으로 통한다. 그에 따라 받는 선수 또한 당당할 뿐 아니라 타 선수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다. 통산 511승으로 메이저리그 사상 최다승을 기록한 사이 영(Cy Young)을 기리기에 사이영상은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다.

그와 다르게 최동원상은 1회 수상자부터 시끄럽다. 아니 별다른 관심을 끌지 받지 못하고 있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다른 시상과 달리 최동원상은 NC와 LG의 준플레이오프가 한창이던 때 발표되어서 이슈를 타지 못했다. 게다가 정작 수상자인 양현종은 최동원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은 성적이 신경이 쓰였는지 “내년에는 부끄럽지 않은 활약을 펼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고(故)최동원이 프로야구 현역 시절 보여줬던 뛰어난 활약을 고려하면 최동원상이 오히려 누가 된 것은 아닐까 안타깝다.

이는 비단 프로야구의 경우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외국인 선수 제도를 도입한 프로 스포츠 종목을 살펴보면 한국인 선수를 우대하고 상대적으로 외국인 선수를 홀대하는 시상의 결과를 종종 목격할 수 있다. 외국인 선수를 일러 ‘용병’, 즉 돈을 벌기 위해 남의 나라에 온 이방인 개념으로 대하는 풍토에서 한국인과 동등한 대접을 기대한다는 건 애초에 무리였을 것이다.

사실 제 식구 감싸는 문화는 한국의 고질병 중에 하나다. 어디 프로스포츠 무대에만 해당할까. 영화잡지에서 기자로 재직하던 시절, 매년 연말이면 그해 가장 뛰어난 영화를 꼽는 베스트 작업을 진행했다. 대개는 한국영화와 비(非)한국영화를 구분해 한국영화 베스트 10, 외국영화 베스트 10 식으로 뽑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개인적으로 이와 같은 방식에 불만이 컸다.

2000년대 이후 한국영화는 질적으로 엄청난 발전을 이뤘다. 전 세계 영화 팬들이 한국영화에 주목하는 현상이 이젠 그리 낯설지 않다. 다만 1년 동안 국내에 개봉했던 모든 영화를 반추하다 보면 ‘좋은 good’ 한국영화는 많아도 ‘뛰어난 best’ 작품은 고작 한두 편에 지나지 않는다. 거의 전 세계에서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을 고려할 때 이건 결코 적은 수가 아니다. 베스트 10에 들지 않는 나라가 부지기수라는 얘기다.  

그럴진대 외국영화 베스트 수에 맞춰 한국영화 베스트를 선정하다 보면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급이 맞지 않아 변별력이 떨어져 우스꽝스러워지는 게 보통이다. 그럼에도 고치지 못하는 건 생각의 범위가 한국을 넘지 못해서다. 이는 한국인의 국제화 감각이 떨어지는 수백, 수천 가지 사례 중 하나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호황을 누렸던 영화잡지 시장이 현재 고전을 면치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잘 나가는 몇몇 한국영화에만 기대다 보니 극장가가 한산하기라도 하면 이들 작품 외의 것에서 이슈를 찾거나 만들지 못하는, 결국 한국을 넘어서는 콘텐츠 개발에 실패한 탓이 크다.

물론 우리 것이기에 더 관심이 있는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지나칠 경우 도리어 시야를 한국으로만 제한하는 역효과를 가져온다. 그런 현상이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게 바로 뉴스와 역사 교육이다. TV를 켜면 온종일 뉴스를 볼 수 있는 시대이지만, 방송 대비 우리가 시청하는 꼭지의 종류는 제한적이다. 국내에서 벌어지는 이슈에 시간 대부분을 할애한 후 구색 맞추기 식으로 국제뉴스를 배치하는 게 보통이다. 그렇다고 모든 국내 뉴스가 해외 소식의 중요도를 앞서는 것도 아니다. 국내에서 벌어진 일개 교통사고(?)와 같은 단순 보도를 해외 소식보다 앞서, 더 길게 전하는 게 보통이다.

입버릇처럼 세계화의 필요성을 역설(力說)하면서 한국 사회 전반에 걸쳐 한국제일 주의가 판치고 있는 현실은 역설(逆說)적이다 못해 부조리한 지경이다. 우리의 시야가 얼마나 편협하게 한국으로’만’ 제한되어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국사 교육의 필요성만큼이나 세계사에 대한 중요성을 설득하지 못하는 상황은 자라나는 우리 세대들 또한 한국이라는 찻잔 속을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불안한 예감을 들게 한다.

물론 그렇게 최악으로만 가지는 않을 것이다. 대학 입시와 기업 입사를 위한 영어에만 치중해 문법과 해석 위주로 공부했던 내 세대와 다르게 젊은 친구들은 외국인과의 회화가 자연스러울 정도로 많이 바뀐 모습이다. 그러니까, 기성세대들은 젊은 세대가 가진 가능성을 더  폭넓게 활용할 수 있도록 장을 마련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말해 무엇할까. 한국은 반도이지만, 남한은 삼면이 바다이고 위로는 북한이 있어 실제로는 고립된 섬나라와 다르지 않다. 그런 지형적 한계가 우리에게 미친 영향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세계화는 진작에 이뤘어야 할 국가적 과제다.  

그럴진대, 정작 내부에서는 언급한 최동원상 논란부터 역사 교육까지 거의 전 분야에 걸쳐 여전히 우물 안 한국을 벗어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고립된 형국을 자초하고 있는 상황이 초래할 결과는 자명하다. 우리는 이미 남한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이분법의 논리에 빠져 안으로만 대립을 키워 폭발 직전에 이르고 있다. 특히 자기 사람 챙기기의 극단을 보여주는 정치권과 사회 지도층의 경우, 의도적으로 한국식 마인드를 조장함으로써 이득을 극대화하는 악랄한 짓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세계화는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세계화가 한국의 모든 문제점을 개선하는 만능열쇠는 아니다. 다만, 시야를 밖으로 돌려 내재한 에너지를 폭발시킬 때 우리에게는 지금보다 더 넓을 가능성이 있을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단번에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이 글에서 언급한 작은 부분부터 우선으로 고쳐나간다면 적어도 우리의 젊은 세대는 더 넓은 시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과 한국인을 넘어 더 넓은 세계관을 가져야만 한다. 적어도 무덤에 있는 최동원만큼은 외국인 선수와 동등한 조건에서 승부하는 후배들의 활약을 더 흐뭇하게 바라보지 않을까.  

일러스트 허남준

arena homme
2014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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