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희>(Our Sun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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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선희>는 홍상수 감독의 열다섯 번째 영화이고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 이은 2013년에 발표한 두 번째 영화다. (그리고 홍상수는 카세 료와 정은채가 출연하는 열여섯 번째 영화의 촬영을 이미 마친 상태다.) 제목만 놓고 보면 <우리 선희>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과 <옥희의 영화>를 묶어 ‘여자 이름 삼부작’이라고 칭해도 좋을 듯싶다. (사실 범위를 초기작으로 확장하면 <오! 수정>(2000)도 이에 포함될 것이다.) 또한 건국대와 그 부근을 배경으로 정유미와 이선균이 주요 인물을 연기하고 이름의 ‘희’자가 동일하다는 점에서 <옥희의 영화>의 속편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졸업생 선희(정유미)가 모교를 찾는다. 미국 유학을 준비 중인데 추천서를 받기 위함이다. 자신을 예뻐했던 최 교수(김상중)를 찾아가 추천서를 부탁한 후 그녀는 홀로 술집에 들어갔다 과거에 사귀었던 문수(이선균)를 만나 진탕 술을 마신다. 다음 날 최 교수로부터 추천서를 받은 선희는 내용이 영 시원치 않자 술자리를 빌어 다시 써줄 것을 요구한다. 그 과정에서 최 교수는 선희에게 애정을 느끼고 이를 재학(정재영)에게 털어놓는다. 최 교수와 헤어진 재학은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우연처럼 선희를 만나고 별안간 길가에서 오랜 동안 키스를 나눈다.
 
최 교수와 문수와 재학, 이 세 남자가 선희에게 느끼는 감정은 같다. 사랑이다. 그런데 선희는 셋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다. 아니 선희가 이중 한 명에게라도 정말 관심이 있기라도 한 걸까?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 선희>라는 제목이 주는 묘한 뉘앙스가 발생한다. 선희의 감정은 별개로 이 세 남자 개인에게는 각자의 ‘우리 선희’일지 모르지만 전체 구도에서 보자면 ‘우리(들)의 선희’의 형태를 띄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영화가 주는 상당량의 재미는 선희의 남자관계와 그 의도를 알 리 없는 이들이 서로에게 선희에 대해서 내리는 지극히 개인적인 평가다.

문수는 우연으로 만났지만 선희가 자신을 못 잊어 찾아온 것으로 철석같이 믿고 있고 최 교수는 선희와의 관계를 사랑으로 단정 짓는다. 재학은 문수나 최 교수처럼 선희와의 특별한 관계를 입 밖으로 내지 않지만 “선희? 잘 알지”라고 말함으로써 착각의 대열에 동참한다. 홍상수는 이를 두고 “정리하고 정의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런 정의 내리기가 우리의 한계가 되는 것 같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 확실히 <우리 선희>의 ‘성인’ 남자들에게서는 여자들에 비해 철들지 못하는, 좋은 말로는 순수, 나쁜 말로는 어수룩한 면모가 느껴지는 것이다.

이처럼 겉으로 드러난 사실 뒤의 이면을 폭로하는 홍상수의 화법은 꽤 익숙한 것이지만 그것이 주가 되는 구조는 오랜만에 보는 것이기도 하다. <극장전>(2005) 이전까지 홍상수의 영화는 <생활의 발견>(2002) <오! 수정>(2000) 등과 같은 남녀관계의 이중성을 드러내는 형식으로 미학을 쌓아왔다. 바로 그와 같은 초기작의 기운이 <우리 선희>에서 목격되는 것이다. 물론 이를 두고 홍상수가 초심으로 돌아갔네, 퇴행의 신호네, 라고 평가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홍상수의 전체 필모그래프에서 조금씩 확장되는 변화로 읽는 것이 더 생산적일 것이다.  

언제부턴가 홍상수의 영화는 살아 숨 쉬는 생물의 경지에 오른 듯한 인상을 준다. 그래서 특정 영화 한 편을 두고 그의 작품을 평가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우리 선희>에 대해 초기작의 면모가 느껴진다고 했지만 여자 캐릭터의 경우, 대상으로 존재한다(<여자는 남자의 미래다>(2004)의 선화(성현아) 캐릭터가 특히 그랬다.)는 당시 일부의 비판이 지금은 유효해 보이지 않는다. 극 중 재학의 입을 빌려 얘기하듯, “여자는 남자와는 달라. 여자의 선택을 따라가면 되는 거야”라며 동등한 존재, 아니 더 현명한 존재로 여자를 바라본다. 하나의 사례를 예로 들었지만 이것은 사람을 더 깊이 알아가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사람은 오래 만나고 좀 더 깊이 있는 대화를 지속해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홍상수의 영화 역시 필모그래프 전체를 관통하는 시선으로 읽을 때야 비로소 흥미로운 텍스트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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