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로의 리처드 파커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파이씨, 당신의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정말 감동적이더군요. 이런 마음 저뿐만이 아닐 거예요. 요즘 한국에서는 당신의 사연을 담은 이안 감독의 <라이프 오브 파이>에 대한 상찬의 이야기가 쏟아지고 있어요. 당신이 들려준, 소년 시절에 겪었던 ‘리처드 파커’와의 표류기 속에 담긴 삶의 성찰이 위안이 된다는 겁니다.

망망대해에서 살아가는 법

안 그래도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지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지금 한국에는 심란한 마음을 달랠 길 없어 방황하는 사람들이 참 많아요. 의견을 달리한 나머지 절반의 사람들과 어떻게 소통하고 융화해야 할지 막막하다는 거죠. 저도 그중 하나였고요. 그런데 당신의 사연을 듣고 나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알겠더군요. 당신이 그 좁은 구명보트에서 리처드 파커, 그러니까 벵갈 호랑이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운 것처럼 말이죠.

많은 이들은 이를 ‘공존’이라고 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저는 이 단어를 막연히 사이좋게 살아가는 법으로 ‘이해’하고 있었어요. 그렇게 틀린 의미는 아닌 셈이죠. 다만 사이좋게 살아간다는 게 꼭 상대방을 100% 이해해야만 이뤄지는 게 아니더라고요. 오히려 이해보다는 차이를 인정하고 그걸 존중해줄 때야 비로소 함께 살 수 있다는 걸 들려줬어요.  

망망대해에서 227일 동안 함께 사투를 벌였던 파커가 멕시코의 어느 해변에 도착하자 당신의 감정은 살필 것도 없이 정글 속으로 그대로 사라져버렸다는 대목이 바로 그랬죠. 우리의 이해 수준이란 딱 그 정도일 거예요. 내 입장에서 이해가 안될지라도 받아들여야 하는 게 우리네 삶인 거죠. 당신은 그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거죠. 그래요, 인간이 어찌 호랑이의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 있겠어요.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공존이 의미를 갖는 것이겠죠.

함께 살아간다는 게 그런 걸 거예요.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 이해하지 못함을 인정하는 것. 파커가 정글로 들어가는 순간 파이 당신이 슬펐던 건 망망대해에서 200일 넘게 생활하며 무려! 벵갈 호랑이를 이해했다고 생각했던 탓이 아니었던가요. 하지만 후에 당신은 말했죠. 그건 우정이 아니라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기 때문에, 적정 거리를 유지했기 때문에 생겼던 일종의 평화였다는 것을 말이죠.

<라이프 오브 파이>를 본 후 원작소설인 <파이 이야기>를 읽어보니 당신은 이렇게 표현했더군요. “동물이 덮치는 거리란 동물이 적으로 인지한 대상과 유지하고 싶어 하는 최소한의 거리를 말한다. 동물마다 덮치는 거리는 다르며, 각각 다른 방식으로 거리를 잰다. 이것이 잘 되면, 동물들은 감정적으로 안정되고 스트레스 없이 동물원에서 잘 지낸다.”

표류하는 동안 리처드 파커와 함께 했던 구명보트 안에서 당신이 살아남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을 거예요. 당신은 허기에 지친 파커에게 생선을 줄 때마다 호루라기를 불어 먹이를 주는 대상이 누구인지 서로의 영역을 확실히 인식시키는 데 주력했죠. 그것은 비단 동물과 동물 간에, 인간과 동물 간에만 해당하는 사항은 아닐 거예요.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삶이라는 정글에서 살아가야 하는 일종의 룰인 거죠.  

리처드 파커와 함께 사는 법

그러고 보니 우리 인간들은 서로에게 참 무례하게 굴며 각자의 영역을 침범해 왔던 것 같아요. 이번 대선 때만 해도 각자 지지하는 후보의 차이를 비교하기보다는 흠집을 찾는 데 혈안이 되어 비난하기 바빴죠. 그 결과, 지금은 어떤가요. 선거에 승리한 측에서는 패배한 측에 대한 위안이나 배려가 별로 없어 보이고, 패배한 측에서는 승리한 측에 대한 인정이나 승복이 여의치 않아 보여요. 공존한다는 것은 곧 원을 그린다는 걸 텐데 지금 우리의 상태는 원은커녕 각자의 선이 삐죽빼죽 날카롭게 서로를 겨냥하고 있는 모습인 거죠.
   
이는 마치 태평양 한가운데서 침몰했던 당시 열여섯 살이었던 당신이 하이에나 한 마리와 오랑우탄 한 마리, 다리가 부러진 얼룩말 한 마리, 그리고 리처드 파커와 구명보트 안에서 아슬아슬하게 함께 있는 것으로 보여요. 결국 하이에나가 얼룩말과 오랑우탄을 먹어치우고, 파커가 하이에나를 먹어치운 것도 좁은 보트 안에서 서로의 영역을 나누지 못해 벌어진 일이었던 거죠. 그만큼 지금 우리 사회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고 있어요. 우리 모두가 한국이라는 구명보트 안에서 벵갈 호랑이 리처드 파커와 함께 있는 파이인 셈이죠.  

누군가는 100%의 한국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선언했지만 바로 그 때문에라도 사람들은 상처받고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급기야 대립하기에 이를 거예요. 서로가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는데 완전한 화합이라는 게 어디 있겠어요. 재벌은 재벌의, 서민은 서민의, 사용자는 사용자의, 노동자는 노동자의 영역을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것이 중요하죠. 예컨대, 대기업들이 자꾸 골목 상권을 넘보며 서민의 영역을 침범하니 사회적인 문제가 생기는 거 아니겠어요. 그래서 또 다른 누군가에게 100%의 한국은 일방적인 폭력으로 받아들여질 거예요.  

이쯤 되니 당신이 왜 피신 몰리토 파텔이라는 이름을 고수하는 대신 ‘파이’를 선택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아요. 피신이라는 이름 때문에 오줌싸개(pissing)라는 놀림을 받기 싫어서만은 아니었죠? 사람들은 각자가 모두 개별 존재라서 고유한 세계를 가지고 있잖아요. 파이 당신에게는 당신만의 우주가 있고, 리처드 파커에게는 호랑이만의 우주가 있고, 저에게는 저만의 우주가 있는 것처럼 말이죠. 각자의 고유한 세계는 3.141592… 즉, 파이(π)처럼 무한성을 갖고 있어서 별명 하나로 사람이 규정된다는 건 불행한 일인 거죠.

결국 나 자신을 포함해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세계의 끝에 도달한다거나, 이해한다는 건 결코 불가능한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착각하고는 하죠.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종종 등을 돌리고는 해요. 이를 두고 서로 평행선을 긋는다고 하던가요. 그럼 그것이 서로에 대한 무관심이고, 외면일까요? 오히려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요. 당신 입장에서 리처드 파커의 행동이 이상했던 것처럼 리처드 파커의 입장에서도 당신의 행동은 이해 불가능했겠죠.

그럼으로써 우리는 서로의 거울이 되고는 하죠. 이번 한국에서의 대선 역시도 그랬답니다. 일대일로 갈라진 대결이었지만 이들의 목적은 같았어요. 사회구성원 모두가 잘 사는 나라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죠. 다만 그 과정이 정책 대결보다는 비방전 양상으로 흘렀다는 점에서도, 과거의 유령을 소환한 대리전이었다는 점에서도 양측이 결코 달라 보이지 않았던 거예요. 그런데도 생각이 다른 이들과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사람이 많으니 참으로 슬프지 않나요?  

그 광경을 멀리서 풀 숏으로 바라보면 서로가 서로의 등을 바라보며 쫓는, 말하자면 원을 그리는 모습이겠죠. 당신도 이와 비슷한 그림을 이미 태평양 한가운데서 목격한 적이 있어요. 보름달이 뜬 밤이었던가요, 바다 속 해양생물들이 중구난방으로 움직이는 것 같아도 실은 원을 그리며 신비롭게 운동하는 광경을 말이죠. 거기서 당신은 자연의 위대함을 목격했어요. 비로소 세상의 이치를 알아차렸죠. 아니, 종교의 참뜻을 깨달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까요?  

이야기라는 진실의 당의정

당신은 캐나다로 이주하기 전까지 기독교과 이슬람교와 힌두교를 믿었어요. 그러면서도 혼란스러워했죠. 당신의 아버지께서 서로 다른 종교이기 때문에 동시에 믿어서는 안된다고 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신의 보살핌 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죠. 신의 영혼에 도달하기 위해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은 기독교도, 이슬람교도, 힌두교도 모두 마찬가지죠. 그렇게 자신을 가둔 덮개를 벗어던지게 되는 거죠. 불교에서는 이를 해탈하거나 윤회한다고 말하죠.    

그렇게 종교도, 인간도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창(窓)이에요. 이건 진실에 해당하죠. 그런데 사람들은 이와 같은 진실을 믿기 싫어해요. 기적적으로 살아난 당신의 체험담을 믿지 않는 일본 보험사 직원들의 반응이 대표적이었죠.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보는 강박관념 때문인 거예요. 그럴 때 필요한 게 바로 ‘이야기’죠. 당신이 구명보트 안에서 겪었던 동물들을 사람들로 바꿔 이야기하자 그제야 보험사 직원들은 수긍합니다. 그러니까 ‘이야기’라 함은 쓰디 쓴 진실에 입히는 당의정 같은 것이겠죠.
 
그래서 당신은 우리가 서로에게 호랑이라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대신 리처드 파커라는 사람 이름을 덧씌워 ‘이야기’한 것이겠죠. 호랑이는 우리의 거울, 그러니까 함께 하는 이들인 거잖아요. 이안 감독이 당신의 체험담을 영화화하면서 ‘이야기의 3D 효과’라고 명명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거예요. 극 중에서 당신이 일본 보험사 직원들에게 겪은 에피소드로 이야기를 끝맺음하자 그동안 3D로 진행되는 영화는 현실로 돌아오는 마지막 장면에서 2D로 전환이 되죠. 사람들은 이야기라는 입체가 없는 현실의 진실은 믿지 않기 때문이죠.  

그래서 실망했냐고요? 설마요. 당신의 사연을 다룬 <라이프 오브 파이>를 본 많은 이들이 이 험한 세상 위안을 받고, 살아갈 힘을 얻었으니까요. 삶이란 게 하늘에서는 폭풍우가 쏟아지고 정면으로는 집채만 한 파도가 덮치고 아래로는 상어들이 달려드는 환경과 비슷하게 느껴져요. 당신이 들려준 이야기처럼 삶이라는 망망대해의 구명보트 안에서 벵갈 호랑이들과 잘 살아볼게요. 이런 제 다짐의 이야기가 당신에게 전달될 수 있을까요. 그럴 거예요. 우리의 삶은 원처럼 돌고 돌잖아요. 당신의 이야기가 한국에 사는 저에게 당도했던 것처럼 저의 편지 역시 당신에게 잘 전해질 겁니다.

movieweek
NO. 563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