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는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얼마 전 <라디오스타>를 보다가 잠시 숙연해진 적이 있었다. 웃자고 덤벼드는 예능 프로그램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은 알지만 나와 같은 감정에 빠진 이가 적지 않았으리라. 왜냐. 각종 가수(라고 쓰고 가창력이라 읽는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1위를 차지한 이들이 게스트로 나온 에피소드였다. 그중 한 명이 오디션 당시 심사를 맡았던 김태원과 전화 통화를 하게 됐다. 이런 저런 잡담을 나누다 대화 주제가 막말 파문으로 모든 방송을 중단하고 자숙의 시간을 갖고 있는 김구라에게 옮겨갔다. 그때 김태원은 김구라 파문에 대해 “용서해줬으면 좋겠다.”며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은 용서받을 자격을 만드는 것”이라고 얘기를 했다. 그때 나는 그만 감동 비스무리한 감정에 빠지고 말았다.

김태원이 당연한 얘기를 했지만 당연히 느껴지지 않았다면 용서에 대해 알고는 있지만 왜 용서해야 하는지는 잘 몰랐기 때문일 터다. 실제로 한국 사회 여기저기에서 분노가 넘쳐나는 현상을 자주 목격하지만 서로 용서를 구하는 광경을 보기란 쉽지 않다.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한국 사회가 품고 있는 분노의 근원은 철저히 이분법의 논리에 근거하고 있다. 예컨대, 지금 국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종북 좌파 논란은 이미 시효가 만료된 빨갱이 개념을 가져와 쓸데없는 이념 논쟁을 펼치며 대립의 평행선을 긋는 경우다. 즉, 다양한 생각과 이념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란 얘기다.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인정 없이 용서를 논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그것이 비단 정치권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에 대한 비난을 아무렇지 않게 가하는 나조차도 누군가에게 용서를 행하고 구하는 것에 인색하기 때문이다. 축구선수 박주영의 병역 연기가 도마 위에 오르자 심기가 불편했고 배우 김정은이 온갖 특혜로 출범한 종편방송국에 대해 옹호하는 발언을 하자 비난 대열에 동참했으며 타블로 학력 위조 의혹이 일파만파로 번지자 처음엔 분노를 금치 못했다. 지금 와 생각하니, 여기에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인식하게 되는 피해의식 혹은 이분법의 적개심이 깔려있던 게 사실이다. 한국의 남자라면 갔다 오는 군대를 회피하다니,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여론도 조작하는 방송사를 감싸고돌다니, 딴따라 주제에 미국 명문대 출신 행세를 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

알고 보면, 박주영은 적법한 절차에 따라 병역을 연기한 것뿐이고, 김정은은 갈수록 여배우가 할 만한 역할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출연 선택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었고, 타블로의 스탠퍼드 대학 졸업은 사실로 판명되었는데, 나를 비롯한 우리는 왜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분노했던 걸까. 공정사회를 바라는 한국인들의 욕망이 도를 넘어선 결과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이들에 대한 비난과 분노는 지금도 인터넷을 조금만 찾아보면 ‘찌라시’ 언론의 기사와 그 밑에 달린 댓글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난 이런 현상이 ‘우리와 저들’이라는 이분법 논리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체화되어온 한국사회의 고질병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이는 ‘나와 너’를 분리하는 서양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개인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저들'(?)과 달리 ‘우리’는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며 개인을 개별의 존재가 아닌 종속된 인격체로 바라본다. 즉, 특정집단이 개입된 사건, 사고가 터져도 소수의 개인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면 무야유야 없던 일이 되고 마는 풍경은 한국사회의 비정상적인 위계질서를 여실히 드러낸다. 박주영의 병역연기가 국방부의 허락 하에 이뤄졌음에도 비난의 화살은 온통 박주영에게만 쏠리고 종편에 출연한 배우들 중 유독 김정은만 미운털이 박힌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 가능하다. 다양성의 가치가 애초에 부정되니 다수의 의견이 쏠리면 그에 반하는 의견은 묵살되거나 매도된 채 애꿎은 개인만 마녀사냥을 당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한국사회라는 이분법의 채에 거르면 남는 것은 결국 우리와 저들의 대립이다. 다양성의 가치는 타인에 대한 존중에서 나오고 존중이라는 덕목은 다름에 대한 용서를 내포하는 법이다. 하나 양보와 타협으로 하나가 되려는 덧셈보다 배제와 차별이라는 뺄셈으로 대립이 일상이 된 한국에서 용서는 개념으로만 존재할 뿐 실천의 사례는 극히 일부로만 남았다. 이런 사회에서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극과 극은 서로 통하는 법인데 그래서 우리와 저들은 모두 서로에게 거울상이기 때문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개원이 계속해서 미뤄지는 국회를 보자. 여당과 야당 모두 서로 다르다며 그 차이를 부각시키기 위해 어지간히 애들 쓰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국민의 생활 개선과는 하등 상관없는 내용과 방식으로 진행되는 작금의 싸움을 보면 그 다름을 분간하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나도 한때 그들처럼 사사건건 대립각을 세우며 아버지와 불화했던 적이 있다. (이 지면에 쓴 ‘불편하게 가족과 보낼 이유 있나요?'(2011년 9월호)를 통해 그 사연을 살짝 공개한 적이 있다.) 사업 실패 이후 아버지는 술에 취해 집에 귀가하는 날이 늘었고, 그런 당신이 못마땅한 나는 얼굴도 마주하기 싫어 피하기가 일쑤였으며 그러다보니 대화는 점점 사라지게 됐다. 어쩌다 말을 섞어도 감정이 앞서 고성이 오갔고 엄마는 나와 아버지 사이에서 입장만 난처해져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셨다. 변화의 계기는 엄마의 한마디였다. “욱하는 성격은 어쩜 그렇게 아버지를 쏙 빼닮았니.” 그 당시 아버지를 닮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던 나는 며칠간 마음속으로 꽁해 있다가 큰 맘 먹고 대화라는 걸 시도했다.

생각보다 쉬운 게 아니었다. 일단 아버지의 술 냄새를 견뎌야했다. 그리고 갈수록 약해져가는 당신의 모습을 인정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가 사업 실패와 재기의 중압감, 무엇보다 가족에 대한 죄책감을 견디기 힘들어 술에 의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때문에 아버지를 이해하게 됐다, 고 말하면 너무 뻔한 수순이지만 적어도 동정과 연민에 가까운 감정을 갖게 됐다. 아버지가 이전과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정도 아버지의 입장에 서서 당신을 바라볼 수 있게 됐다고 할까. 내가 아버지를 향해 이전보다 살갑게 다가가니 당신 또한 조금씩 손을 내밀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실망하고 싫어했던 모습을 점차 줄여나갔고 엄마는 큰 시름 하나를 덜었다며 좋아하셨다.

김태원의 용서 발언이 내게 좀 더 특별하게 다가왔던 것은 아버지 사이에 있었던 일련의 일들이 오버랩 됐기 때문이다. 웃는 낯에 침 뱉지 못한다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조건 없는 화해의 손길을 내밀면 그에 상응하는 답례를 받는 날이 오게 마련이다. 말 그대로 용서를 통해 용서받을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박주영이 좀 더 높은 성취를 위해 불가피하게 병역을 연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에, 김정은이 연기할 기회를 얻기 위해 종편 행을 택했던 것에, 그리고 지금은 과거의 발언을 후회하고 뉘우치고 있는 김구라에 대해 더 많은 이들이 너그러운 시선을 건네기를 바란다. 정치권에 대해서는, 특히 곡소리 나는 국민들의 생활에 아랑곳없이 자기 배 불리기에 여념이 없는 정치인들에게까지 용서 운운하고 싶은 순진한 생각은 없다. 다만 정치에 대해서는 적어도 감시와 관심의 끈은 놓지 말아달라는 당부는 하고 싶다.

최근에 아버지가 컴퓨터에 관심을 가지면서 페이스북 사용법을 알려드렸더니 더 친해질 기회가 생겼다. 반목했던 아버지와의 생활은 서로 부딪히지 않으려는 그 목적 하나 때문에 지리하고 불안정했지만 지금은 다양한 삶의 재미를 발견해가는 중이다. 용서가 지닌 쓸모는 단순히 죄를 빌고 벌을 사하는 행위 자체에만 있지 않다. 용서는 세상에 대한 시각을 넓혀주고 다양한 생활의 발견을 선사한다. 용서를 말로만 떠들지 말고 당장 실천에 옮기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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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ENA
2012년 7월호

2 thoughts on “용서는 있다”

  1. 매우 공감합니다~
    저 역시 요즈음 아버지와 말을 안하고 있습니다.ㅠ 허남웅님과 같은 이유로 아버지와 늘 반목하고 어머니는 쩔쩔 매시고, 아버지와 저 둘 다 욱하는 성격이라서
    서로 소리지르고… 못볼꼴 보고…
    어떤 단추부터 잘 못 끼워진 것인지 모르겠어요.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너무 멀리 온것이 아닌가. 어느 순간부터는 돌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고 어느정도 포기하고 있었는데 가족간에 완전한 포기란건 존재하지 않겠지요.
    이제는 용기를 내보려고 해요.
    허남웅씨 칼럼 늘 잘읽고 있습니다. 꾸벅~~

    1. 안녕하세요 보라님 처음 봬요 ^^ 저도 얼마전까지 그렇게 지냈어요 근데 눈 딱 감고 말부터 걸어보니까 생각보다 어렵지 않더라고요 보라님도 행운을 빌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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