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스 24] <로스트 인 더스트> 퇴장하는 서부 사나이를 향한 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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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호퍼의 명화처럼 황량하기 그지없는 서부 텍사스의 작은 도시. 2인조 강도가 은행을 턴다. 한 명은 은행 강도질에 익숙한 듯 행동에 거리낌이 없다. 다른 한 명은 오늘이 처음인 것마냥 서툴게 움직여 은행직원으로부터 멍청하다는 비아냥을 듣는다.

2인조 강도는 태너(벤 포스터)와 토비(크리스 파인) 형제다. 알고 보니 형 태너는 ‘갓 출소한’ 전과자다. 동생 토비는 범죄 세계에 ‘갓 입문한’ 초보 은행털이다. 범죄가 일상인 태너야 그런 인간입네 넘어갈 수 있지만, 토비가 걸린다. 그는 내내 침통한 표정이다. 그러니까, 그의 범죄 행각에는 사연이 있다는 얘기다.

경찰의 추적을 피해 도주하는 태너와 토비 형제의 차량 옆으로 세움 간판 몇 개가 스쳐 지나간다. ‘빚이 있습니까?’, ‘빠른 현금 대출을 보장합니다’ 등등. 그렇다, 토비는 가족의 유일한 재산이자 어머니의 유산인 농장의 소유권이 은행에 압류될 위기에 놓이자 역으로 은행을 털기로 한다. 동생을 끔찍이 아끼는 태너는 토비가 돈을 훔치자는데 안 나설 이유가 없다.

<로스트 인 더스트>의 각본을 쓴 이는 테일러 쉐리던이다.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2015)로 화려하게 데뷔했던 각본가다. 그는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를 필두로 서부 몰락 삼부작을 기획하고 두 번째로 <로스트 인 더스트>를 썼다. 사실 이 영화의 원제는 ‘헬 오어 하이워터 Hell or High Water’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정도로 해석하면 될 것 같다. 한때 서부를 주름잡았던 서부 사나이들이 범죄자 따위로 몰락한 배경을 토비의 입장에서 반영한 제목인 셈이다.

서부는 미국 신화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배경이다. ‘서부극 Western’은 모래와 자갈만이 가득한 서부에 철도 길을 깔고 그 위에 문명을 건설한 백인 남성의 개척정신을 찬양한 장르였다. 챙이 둥근 모자를 쓰고 갈기 휘날리는 말을 탄 채 대지를 달리는 서부 사나이는 영화의 인기를 등에 업고 신화화되었다.

그와 같은 신화에 역풍을 날린 건 ‘수정주의 서부극 revisionist western’이었다. 원래 서부의 주인은 인디언이었는데 백인들이 원주민을 학살하고 피의 미국을 세웠다는 논지의 영화들이었다. 서부 사나이의 표정은 비열해졌고 정의를 지키던 그들의 총구는 죄 없는 이들을 향해 무참히 발사됐다.

<로스트 인 더스트>는 수정주의 서부극에서 더 나아가 산전수전을 겪은 서부 사나이들의 퇴장에 대해 다룬다. 이 영화에는 태너와 토비 형제 외에 이들을 쫓는 베테랑 형사 해밀턴(제프 브리지스)이 등장한다. 은퇴가 며칠 남지 않은 해밀턴은 평화로운 이 마을에 은행 강도가 발생했다니 가만있을 수 없다. 특유의 모자에 말구두를 신고 말 대신 경찰차를 모는 해밀턴은 영웅적인 서부 사나이의 인상이 강하다.

반면, 밥 먹듯 범죄를 일삼고 사람 죽이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태너는 수정주의 서부극의 비열한 서부 사나이를 연상시킨다. 다시 말해, <로스트 인 더스트>는 서부극과 수정주의 서부극을 상징하는 인물을 각각 앞세워 신화화된 미국을 갈기갈기 찢어발긴다. 그렇다면 토비가 의미하는 미국의 현재는 어떤 상황일까?

(스포일러 주의!) 토비의 표정에 피로감이 역력한 건 서부 사나이의 신화가 효력을 다했기 때문이다. 서부 사나이는 몰락했다. 1세대 해밀턴은 은퇴가 코 앞이다. 2세대 태너는 자신을 쫓는 경찰에 맞섰다가 장렬하게 전사한다. 토비도 곧 사라질 운명이다. 뱀처럼 온갖 독을 뿌리고 다니는 자본의 탐욕 앞에서 버텨낼 재간이 없다. 서부 사나이의 신화란 한낱 껍데기에 불과하다. 마지막 몸부림으로 토비가 형을 꾀어 시도한 게 바로 은행 강탈이었다. 훔친 돈으로 농장의 소유권을 되찾은 토비는 이를 자식들에게 유산으로 남긴다. 범죄자 신세가 된 자신과 다르게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살 수 있게끔 안정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한국 제목 ‘로스트 인 더스트 Lost in Dust’는 이 영화의 OST에 실린 ‘레이 와일리 허버드 Ray Wylie Hubbard’의 <Dust of The Chase> 중 가사 일부다. ‘먼지 속으로 사라지다.’ 아메리칸 드림으로 칭송되던 미국 신화는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서부 사나이의 존재를 지워버렸다. 마지막 장면에서 <로스트 인 더스트>의 카메라가 비추는 대지의 풍경에는 이제는 돌아가지 못할 영광스러운 서부(혹은 미국)에 대한 향수와 더불어 상실감의 감정이 짙게 배어있다.

 

예스 24
‘허남웅의 영화경(景)’
(2016.11.10)

“[예스 24] <로스트 인 더스트> 퇴장하는 서부 사나이를 향한 비가”에 대한 2개의 생각

  1. 평론가님 말씀대로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처럼 황량하면서도 대낮에 벌어지지만 어두우면서도 쓸쓸한 느낌이 좋았어요.
    사실 시카리오가 재밌었던 것은 배우들의 연기와 드니 빌뇌브의 연출이 90% 가까이 차지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요번 영화를 보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각본도 그에 못지 않게 훌륭했다는 것을. 3부작의 마지막이 기대되네요

    1. 각본을 쓴 이는 테일러 쉐리단인데 3부작의 마지막은 본인이 직접 연출까지 맡는다고 하네요. 앞으로 주목해야 할 감독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에드워드 호퍼의 경우에는 앤드류 와이어스의 [크리스티나의 세계]로 할까 갈등하다가 호퍼로 정했는데요. 아직도 어느 걸로 하는 게 더 알맞은 건지는 잘 모르겠네요 ^^; 글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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