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을 위한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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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비평은 죽었다, 고 혹자 들은 작금의 평론 문화를 진단한다. 이에 대해 동의 못하는 입장이다. 물론 영화 비평의 영향력이 줄어든 게 사실이다. 아니 영향력이 거의 없어졌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겠다. 최근 사례로는 <은밀하게 위대하게>가 적절해 보인다. 언론 시사회 이후 평자 들은 원작 웹툰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이야기와 이미지를 두고 혹평을 쏟아냈다. 정작 개봉 후 600만 이상의 관객이 몰렸고 이 영화에 대해 부정적이던 평자 들은 스타 마케팅과 멀티플렉스의 괴력이라며 개탄조의 기사를 게재했다. 이것이 영화 비평의 현재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영화 비평이 힘을 잃게 된 배경은 여러 가지다. 마케팅의 규모에 따라 블록버스터 영화의 흥행이 단시간 내에 좌지우지되고 있는 점, 인터넷과 스마트 폰이 일상화됨에 따라 장문의 글에 대한 사람 들의 피로감이 현저해 진 점, 영화가 지적 허영심을 채워주는 문화에서 현실을 잊게 하는 2시간여의 오락거리로 전락(?)한 점 등등. 비평의 위기를 논할 때면 지적된 문제 들이라 실은 하나마나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기에 하나를 더 보태고 싶다. 영화 언론 쪽에서 10년 넘게 종사하다보니 리뷰 기사의 형식이나 내용 면에서 크게 변화해온 양상을 감지할 수 있었다. 과거, 그래봐야 2000년대 초중반이지만 당시의 리뷰가 영화가 지닌 의미에 대해서 집중했다면 지금은 장점과 단점을 극명하게 부각하는 쪽으로 대세가 완전히 기울었다. 업계에서는 이런 리뷰를 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라고 비아냥조로 부르고는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천하기 망설여진다, 와 같은 식으로 영화를 평가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영화의 흥행 여부가 개봉 첫째 주 주말 사이에 단기적으로 이뤄지다보니 리뷰 역시 관객이 영화를 선택하도록 용이하게 장단점을 밝히는 쪽으로 진화(?)해 왔다. 이와 같은 풍토가 영 맘에 들지 않는다. 호와 불호, 단 두 가지 기준으로 영화를 판단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처사냐는 거다. 연출자의 개성이 다르고 메시지도 천차만별인 영화(를 비롯한 모든 문화)는 호와 불호 사이에 위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바로 거기에서 다양성이라는 게 생긴다. 그런데 이를 무 자르듯 평가하는 작품의 언론 환경에서 빠르게 사라지는 영화 들 만큼이나 비평은 영향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영화 비평의 죽음을 말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평론은 숨소리정도 크기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영화 주간지가 무려 4종(씨네21, FILM2.0, 무비위크, 씨네버스)이나 있었던 시절에 비하면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지만 여전히 비평을 필요로 하는 곳은 존재하며 소수지만 매년 새로운 평론가 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영화 비평이 죽었다는 진단에는 부연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지면으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의미의 비평이 맥을 추지 못하면서 그를 대체할 어떤 움직임이 감지되는 것이다. 극장에서의 영화 상영 후 평론가와 관객 사이에서 이뤄지는 ‘관객과의 대화’ 같은 행사가 대표적일 것이다.

관객과의 대화는 ‘시네 토크’ 또는 ‘시네마톡’ 같은 명칭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주로 평론가가 영화를 소개하고 해설하면 관객이 질문을 던지고 다시 평론가가 답해주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않던 고전영화를 상영하는 서울아트시네마와 같은 시네마테크에서 관객과의 대화가 시작된 이래 지금은 멀티플렉스에서도 광범위하게 이뤄질 만큼 인기 있는 행사로 자리 잡았다.

장병원 평론가는 관객과의 대화가 등장한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제 사람들은 영화에 대한 글을 읽기보다 직접 대화를 나누길 즐긴다. 영화를 수용하는 방식과 취향이 변하면서 비평의 방식이 관객과의 대화 쪽으로 옮겨가고 있다.” 또한 김성욱 평론가는 관객과의 대화가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은 배경에 대해 “지금처럼 다양한 작품에 관객 들의 관심이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워낙 많은 영화 들이 소개되고 있어 안내할 가이드가 필요하다. 비평가들이 이 역할을 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관객과의 대화를 비평의 영역으로 보아도 될 것인가?

김영진 평론가의 얘기를 들어보자. “비평을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관객과의 대화가 일정하게 비평의 역할을 할 거라고 본다.” 이에는 한 가지 단서가 붙는다. “비평의 역할이 좋은 작품을 선별해 폭넓은 관심을 유도하는 것이라고 할 때 독립영화와 예술영화에 한해서는 그럴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유명 평론가가 참여하는 독립영화 혹은 예술영화의 관객과의 대화가 있는 날이면 평소보다 더 많은 관객이 극장을 찾는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그런데 결정적인 맹점이 하나 있다. 주류영화, 특히 마케팅과 배급 규모로 흥행이 좌우되는 블록버스터 영화는 대상 범위에서 완전히 배제된다는 점이다. CGV와 같은 멀티플렉스 극장이 관객과의 대화를 필요로 했던 건 블록버스터 영화에 비해 흥행력이 떨어지는 예술영화와 독립영화에 더 많은 관객을 끌어 모으기 위함이었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지금 관객과의 대화가 비평의 역할을 어느 정도 수행하고 있다고는 해도 애초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마케팅과 배급에 힘입어 흥행에 성공한 블록버스터 영화 중에서도 비평을 필요로 하는 영화는 존재한다. 서두에서 언급했던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경우, 완성도에는 의문 부호가 남지만 다루고 있는 내용 자체에는 우리가 한 번 음미할 만한 내용 들이 꽤 된다. 전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에서 꽃미남과 간첩을 결합해 스파이물의 새로운 장르 실험을 펼친 점, 남북의 이념 대립보다 기성세대와 청년세대 간의 갈등에 더 주목함으로써 청춘물에 대한 갈증이 대단한 젊은 관객 들의 감정을 건드린 점 등은 이 영화가 획득한 성취라고 할 수 있다.

그럴 때 비평이 가지는 또 하나의 가치는 영화가 단순히 수치로만 평가받는 상황에서 특정 영화가 품고 있는 의미를 찾아 이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다. 지면 비평의 영향력이 날로 줄어들고 있다지만 여전히 의미를 갖는 것은 이 때문이다. 비평의 방식은 어느 한쪽이 대체를 하는 것이 아니라 포괄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비평보다는 지면이 필요로 하는 비평, 관객과의 대화로 접근해야 하는 비평, 대중에게 크게 노출되지 못한 작은 영화를 발굴하기 위한 비평 등등 특화된 방식의 비평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이와 같은 흐름으로 가는 모색기이자 과도기로 보이는데 이 때문에 많은 이들이 비평은 죽었다고 착시 현상을 느끼는 것 같다. 그래서 이용철 평론가는 말한다. “영화 평론이 빈곤해서, 평론가가 살아남기 위해서 전략을 세워야 하는 것은 아니다. 평소에 하던 대로 평론가 들이 열심히 비평을 하다 보면 분명 길이 생길 것이다. 다만 특화된 자격이 필요하다. 모든 영화를 커버하겠다는 자세가 아니라 자기만의 방법과 색깔을 가지고 설명할 수 있는 특정한 비평 영역을 가져야 한다.” 이는 이용철뿐 아니라 김성욱, 장병원, 김영진 등 내가 얘기를 나눠본 모든 영화 평론가가 공유하는 생각이기도 하다.

이들은 하나를 더 첨언하길, 비평이 지면으로만 이뤄지던 과거와 다르게 좀 더 다양한 방식의 접근이 이뤄지다보니 이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거점, 즉 플랫폼이 필요하다고 얘기한다. 김성욱 평론가의 표현을 빌리면, “각각의 영역으로 제한을 뒀던 평론가 들이 경계를 넘어서는 관계의 형성이 중요하다.” 평론가 혹은 기자의 브랜드 가치가 높아지는 반면 영화 매체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다보니 담론 형성이라든지 이슈 파이팅을 하는 데 있어 총량을 모으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평의 거점은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이게 문제다. 거점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다들 인지하고 있지만 그 방법에 대해서만큼은 아직 확신을 갖지 못한 목소리가 다수다. 공공의 영역에서 영화 잡지가 됐든, 시네마테크가 됐든 안정적인 운영을 통해 지속적이면서 큰 흐름을 잡아낼 수 있는 비평 문화를 재정립하자는 쪽, 지면 외의 툴(tool), 그러니까 온라인, 팟캐스트 등 매체를 좀 더 가볍게 가져가 말과 글을 결합할 수 있는 그라운드를 만들자는 의견, 수십 년 동안 발행되고 있는 문학이나 미술 전문지처럼 영화 지면 매체의 지속 가능한 생존에 대해 좀 더 고민하자는 등 그 의견은 천차만별이었다.

이 의견 들에 답이 있다는 생각이다. 그중 하나가 영화 비평의 미래가 될 수도 있고, 이 모든 것이 다 합쳐진 형태가 영화 비평이 앞으로 나아갈 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영화 비평의 미래는 이미 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글에 대해서는 이렇게 마치고 싶다. 여전히 많은 평론가 들이 지면이 됐든, 관객과의 대화가 됐든, 140자의 트위터가 됐듯 영화에 대한 글을 올리면서 비평 문화를 이끌고 있다. 비록 비평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이들이 소수라지만 평론가 들은 다수와 소통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오늘도 글을 쓰고 있고, 내일도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할 예정이다. 비평은 여전히 살아있고 앞으로도 살아남을 것이다.

일러스트 허남준

ARENA
2013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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