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크백 마운틴>(Brokeback Mountain)





1.
 
애니 프루(Annie Proulx)의 동명 단편소설을 영화화한 <브로크백 마운틴(Brokeback Mountain)>은 상자 속에 몰래 숨겨둔 한 장의 그림엽서처럼 남몰래 마음속에 꿍쳐두고 있는 비밀에 대한 영화다. 어떤 비밀? 동성친구를 사랑한 슬픈 비밀. 근데 왜 동성친구를 사랑한 것이 슬픈 일이 되어야하며 비밀이 돼야하는 걸까? 일단 스토리부터 살짜쿵 살펴보기로 하자.

에니스(히스 레저 분)와 잭(제이크 질렌할 분)은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가는 하루살이 카우보이 인생들. 거미줄 친 입에 풀칠 좀 해보려고 인간 하나 없는 브로크백 산에서 양치기 임무를 수행하던 중 어느 날 새벽 버럭! 눈이 맞아 러브에 빠지고 마는데…


당 영화의 무대는 마초냄새가 코를 찌르는 카우보이 세계. 그 바닥에서 동성애는 놀림감이자 종국엔 사형감. 게다가 때는 1963년. 지금도 동성애가 자유롭지 못한 시절이니 주변 편견의 눈길 피하랴, 맘 놓고 러브 할 수도 없어 당시 잭과 에니스 커플의 사랑은 지금보다 몇 곱의 몇 갑절은 더 힘들었을 게다. 이들의 사랑이 슬프고 비밀스러울 수밖에 없는 이유.


특기할 만한 건, 영화가 이들 서서쏴 커플의 사랑을 보여주면서 이야기는 주로 에니스의 시점에서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 그럴까?


사실 에니스는 잭을 알기 얼마 전 알마(미셸 윌리엄스 분)와 약혼한 이성애자다. 더군다나 존나게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란 탓에 아버지로부터 게이는 불알이 찢겨져 죽어도 싸다는 교육(?)까지 받고 자란 몸. 그런 그가 잭과 충동적으로 한 빠굴 뛰고 난 뒤 얼마나 혼란스러웠을까. 그러니 에니스에게 잭을 사랑한다는 건 처음부터 고난이 따르는 일.


물론 힘들기는 잭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원래부터 동성애자였던 (것으로 보이는) 잭은 이런 상황에 혼란스러워하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던가 또는 정면으로 부딪쳐 극복을 해나가니 에니스처럼 정체성 혼란을 극심히 겪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고로 감독은 에니스의 시점을 중심에 두고 영화를 진행함으로써 관객에게 그런 슬픈 사랑이 더 잘 전달되게끔 설정을 했다는 얘기다. 그래서 카메라와 장면의 설정도 이들의 감정 특히 에니스의 그것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가령 영화 초반, 잭과 에니스가 처음 만나 첫 번째 빠굴을 하는 장면까지 카메라는 브로크백 산의 풍광 속에서 초원의 말처럼 자유롭게 러브를 나누는 모습을 입이 쩍 벌어지는 스케일에 담아 속 시원하게 보여준다. 반면 산을 내려와 후일을 기약한 뒤 홀로 남은 에니스를 비추는 카메라는 브로크백 산에서와는 다르다. 그가 좁아터진 골목으로 들어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주변의 건물을 이용 앞뒤로 에워싸은 뒤 속 좁은 소심처럼 답답하고, 공허하고, 쓸쓸한 느낌이 들게끔 촬영한다.

이처럼 당 영화는 잭과 에니스가 사회의 편견 속에서 맘 졸이며 닫혀 지낼 수밖에 없는 상황과 이들이 편견의 눈길을 피해 브로크백 산에서 마음 놓고 러브를 나누는 장면을 대조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두 상황이 극명하게 대비되어 우리 주인공들이 겪는 슬픔이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


다시 말해 <브로크백 마운틴>은 힘든 사랑에 대한 영화다.



2.

하지만 에니스가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것만으로, 카메라가 그런 혼란을 황량하게 수놓는다고 그 사랑이 저절로 비극이 되는 것은 아닐 터. 에니스는 혼란을 겪는 것만으로 모자라 결국엔 어렵게 이룬 가정이 풍비박산 되는 꼬라지에 처하고 만다. 그놈의 동성애 때문. 어디 감히 아내가 있는 남자가, 그것도 카우보이 모자를 꾹 눌러쓴 그가 어떻게 같은 성인 서서쏴와 러브질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점에서 당 영화가 카우보이 세계를 무대로 삼고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카우보이는 미국의 개척정신을 보여주는 신화의 무대. 미국인들이 그런 자신들의 신화를 가슴에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이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자명한 사실. 근데 대만인인 이안이 보기엔 그렇지 않았나보다. 이미 <아이스 스톰>에서 콩가루 된 중산층 가족의 모습을 통해 미국 사회의 허약함을 들춰냈듯 당 영화에서도 이안이 보는 미국 신화의 세계는 허약하고 부실하기만 하다.


이와 같은 사실이 두드러져 보이는 부분이 바로 잭이 결혼 이후 텍사스를 본거지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텍사스는 카우보이의 중심지. 잭의 부인 로린(앤 헤서웨이 분)은 텍사스 출신이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탓인지 로린은 먼저 잭에게 적극적으로 껄떡대고, 잭과의 빠굴을 리드하며, 사업가로서의 면모도 과시한다. 여자이면서 도리어 더 사내대장부 같은 모습. 남자의 가치가 우선하는 그곳에서는 그렇게 키우는 것이 당연했나보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아버지는 계집애처럼 구는 잭이 맘에 들지 않아 사사껀껀 그를 무시한다. 보건데 남자의 가치와 동떨어진 동성애자 잭의 최후 역시 에니스처럼 어떻게 진행될지 안 봐도 비디오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이렇듯 미국의 신화는 자신과 다른 이들은 무시하고 배제하는 식으로 자신들만의 에덴동산을 완성했다고 영화는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브로크백 마운틴>은 잭과 에니스의 러브질로 인해 이들 가정이 붕괴되는 모습을 비추며 카우보이로 상징되는 미국 신화의 허약한 고리를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감독 이안이 이를 통해 대놓고 미국사회에 똥침을 놓는다든가 하는 뭔가 거한 주제를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대신 관객이 얼른 눈치 채지 못하게끔 간간히 사회의 편견을 드러낼 뿐 영화는 잭과 에니스의 비밀스런 러브를 중심에 두고 이들의 감정과 은밀한 감정교류를 담담히 영화적으로 보여주는데 집중한다.


그래서 카메라가 들이대는 공간은 카우보이의 전체적인 세계라기보다는 잭과 에니스가 러브를 나누는 브로크백 산의 한정된 공간과 이들의 사적인 공간만이 전부다. 그런 속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니 철저히 개인적이고 사적이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사랑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법. 그렇기 때문에 상처받기 쉬운 것이 또한 사랑이다. 그리고 그 상처의 가해자는 대개 사회가 만들어놓은 규범 또는 제약, 편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것이 나타나는 모습은 시대에 따라, 공간에 따라, 또 상황에 따라 가지각색일 것이다.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부운>은 2차 대전 직후 일본의 절망적인 시대상 속에서 비극적으로 끝맺음될 수밖에 없는 유키코·도미오카 커플의 러브를 보여줬다. 이창동 감독은 <오아시스>에서 메말라 버린 한국 현대사회에서 사회부적응자로 낙인 찍혀 처절하게 하지만 마술적으로 러브를 나누는 홍종두와 한공주 커플의 사연을 보여줬다. 이안 감독은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1960년대 미국 그것도 미국 신화의 상징적인 무대에서 벌어지는 동성애를 통한 에니스와 잭의 슬픈 사랑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들의 사랑이 사랑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면, 그 슬픔을 마음에 담아둔 채 이를 살아가는 힘 삼아 삶에 대한 그리고 가족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 모습(영화의 마지막, 에니스는 자신을 찾아온 딸의 결혼식 초대에 승낙하고 곧바로 잭과의 사연이 담긴 삐리리와 브로크백 산의 풍광이 담긴 그림엽서를 고이 간직한다) 때문일 테다. 본 우원 이런 표현하기 참으로 쑥스럽다만 우리는 이런 러브를 흔한 말로 시대를 초월한 위대한 사랑이라 불러마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당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을 두고 이 아니 훌륭하다 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이쯤에서 본 우원, 실로 간만에 검열보고 하는 당 영화에 베스트를 수여하며 짧은 소견을 마친다. 끝!


(2006. 3. 7. <딴지일보>)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