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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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요즘에는 영화보다 미국 드라마에 더 눈이 간다. 영화보다 흥미로운 ‘미드’가 더 많아서다. 원래 드라마는 안 보는 편이었다. 8년 전 <프리즌 브레이크> 시즌1을 처음 접한 후부터 화제가 되는 미드는 웬만해서는 찾아보는 편이다. 요즘에는 <왕좌의 게임> 시즌 5를 정주행 중에 있다. 특히 8회는 존 스노우와 화이트 워커와의 전투신으로 방영 전부터 역대 최고의 에피소드가 될 거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어찌 놓칠 수 있을까. ‘본방사수’를 위해 ’불금’의 술자리를 일찍 파하고 집에 들어왔을 정도다. 

과연, 존 스노우가 나이트워치의 사령관 자격으로 야인들을 설득하러 갔다가 화이트 워커와 맞붙은 장면의 스케일은 일찍 파한 술자리가 아쉽지 않았다. 그중 드라마가 끝나고 별똥별의 꼬리처럼 길게 잔상에 남는 장면이 하나 있었다. 화이트 워커의 왕이 두 손을 올리자 죽었던 야인들이 <워킹데드>의 살벌한 좀비들처럼 와이트로 변하는 장면? 아니다. 존 스노우의 발라리안 강철 검에 눈발처럼 산산이 조각나는 화이트 워커 왕의 최후, 도 아니었다. 존 스노우가 야인들과의 협상을 위해 하드 홈에 발을 디딘 순간, 화이트 워커와 와이트들이 쏟아져 나오고 이를 피해 배 쪽으로 도망가는 인파들을 풀 쇼트로 잡은 장면이었다. 

이 장면은 그동안 내가 보았던 미드의 스케일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흡사 <반지의 제왕 3: 왕의 귀환>(2003)의 곤도르 왕국 수도인 미나스 티리스에서 벌어지는 20만의 사우론 대군과 반지원정대의 전투를 보는 듯한 압도적인 인상을 받았다. 신기한 건 <왕좌의 게임>의 그 장면을 극장의 스크린이 아닌 TV 브라운관으로 접했다는 사실이다. 내가 보유한 TV는 47인치인데 HD 화면으로 보고 있으니 아이맥스가 제공하는 거대함까지는 아니더라도 제작진이 의도한 스펙터클을 만끽하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흔히 사람들은 미드를 만족스럽게 감상하고는 습관처럼 ‘영화 같다’는 표현을 쓰고는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미드가 문화의 최전선에 나선 배경에는 영화로부터 받은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스파르타쿠스>의 성공은 <300>(2007)의 흥행에 힘입어 고대 검투사들의 전투 활극을 브라운관으로 가져온 것이 한몫했다. <워킹데드>의 시청률 고공행진은 그간 영화에서 보았던 좀비 캐릭터에 시청자들이 익숙했기에 가능했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에서 함께 했던 스티븐 스필버그와 톰 행크스가 의기투합하여 제작한 것으로 유명하다. 

결국, 미드가 인기를 끈 건 극장에서나 볼 법한 장르와 스케일의 볼거리를 안방 소파에 편안히 앉아서 TV를 통해, 그것도 매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도 미드가 강세를 보이면서 지배력을 행사했던 영화와의 관계는 서서히 역전 현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드라마를 거들떠보지도 않던 영화감독과 배우가 경쟁적으로 투신하기 시작했다. 스크린의 스타를, 거장의 연출력을 브라운관에서 목격하는 건 이제 특별한 축에 끼지도 못한다. 오히려 미드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하면서 지금은 영화가 드라마를 따라 하는 추세다. 

요 몇 년 새 한국영화도 그렇고 할리우드영화도 시시해진 이유 중 하나로 영화의 드라마화(化)를 꼽고 싶다. 영화가 드라마를 따라 하고 있다는 징후는 꽤 된다. 방영 도중 타 채널로 이동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시청자를 붙들어 매는 드라마의 빠른 편집은 영화에서 이제 흔하게 볼 수 있는 방식이 되었다. 영화와 드라마는 우선으로 보는 이들에게 오락을 제공하는 매체다. 한편으로 영화는 드라마보다 상대적으로 사유가 가능한 매체이기도 하다. 예컨대, 드라마의 편집이 서사의 전달에 복무한다면 영화의 편집은 이에 더해 장면과 장면 사이, 즉 행간을 만들어 관객의 적극적 개입이라 할 만한 해석을 유도한다. 

안타깝게도 그런 영화들이 시장에서 살아남을 확률은 갈수록 희박해지고 있다. 요즘 관객들은 웬만해서는 영화로 사유하기를 꺼린다. 바쁜 업무와 스트레스로 지친 현대인들은 영화를 통해 위안을 얻으려 하지 극장에서까지 부러 생각하는 고생(?)을 사서 할 마음의 여유가 없어진 지 오래다. 그럴 시간에 차라리 집에서 치킨이나 피자를 시켜놓고 브라운관이든 모니터 화면이든 느긋한 자세로 미드를 보는 게 더 가치 있다고 여긴다. 미드와 같은 드라마가 어느 순간부터 주목받게 된 사회적 환경이 바로 여기에서 발생한다.  

이제 영화는 적극적으로 드라마를 벤치마킹하기에 바쁘다. 적게는 3편에서 많게는 24편까지 시즌으로 운영되는 드라마에 맞춰 영화는 시리즈로 관객을 유혹한다. 대표적인 예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아이언맨>(2008)을 시작으로 국내에서 천만 관객을 동원한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2015)까지, 모두 11편의 작품을 선보였다. 곧 개봉할 <앤트맨>으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2기를 마감할 마블 영화는 2016년 6월로 개봉이 예정된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를 필두로 3기에서 10편의 영화를 선보인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작품들은 영화뿐 아니라 <에이전트 오브 쉴드>와 같은 드라마와도 연계되어 있다. 그래서 마블의 작품은 스크린으로 감상하는 미드라는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영화가 드라마를 좇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다. 영화가 드라마 때문에 위기를 겪었던 적은 예전에도 있었다. 미국에서 TV가 한 가정에 한 대씩 보급되던 1950년대 후반이었다. 집에서 TV를 볼 수 있게 되자 미국인들은 여가를 보내기 위해 즐겨 찾던 극장으로의 발길을 뚝 끊었다. 영화는 금세 사양산업으로 몰렸다. 그 대책으로 고안된 것이 3D로 부르는 입체영화와 70mm로 대표되는 대형영화였다. 

먼저 관심을 끌어 붐을 일으킨 건 3D였지만, 당시의 미국인들이 더 열광한 건 70mm 와이드 스크린으로 상영되는 대형영화였다. 표준 35mm 필름 폭의 2배가 되는 화면으로 영사되는 활동사진은 입을 쩍 벌리게 할 만큼 화려하고 압도적인 볼거리였다. 그에 맞춰 가장 색채가 아름답고 풍부한 ‘테크니컬러 Technicolor’가 적극 활용되면서 영화는 TV에서는 진가를 만끽할 수 없는 뮤지컬과 같은 순수한 영화적 장르로 집 나갔던 관객을 다시금 돌아오게 하는 데 성공했다. 

TV 매체의 위협적인 도전에 직면해 위기를 겪었던 당시 할리우드의 대응법이 지금 미드에 밀리는 영화에 주는 교훈은 자명하다. TV가 흉내 낼 수 없는 볼거리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 이에 대한 모범 사례는 그리 먼 곳에 있지 않다. 한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화제를 일으키고 있는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다. 이야기는 간단하다. 인류를 지배하는 독재자에 맞서 우리의 주인공들이 해방을 이루고 자유를 쟁취한다. 한 문장으로 요약 가능한 이야기에 깊이를 부여하는 건 액션이다. 그냥 액션이 아니다. 미친 듯한 액션이다. 질주하는 자동차 위에서 배우들이 맨몸을 굴리고 심지어 장대에 매달려 죽음도 불사한 연기를 펼친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의 흥행에는 아이러니한 면이 있다. 영화의 촬영부터 후반 작업까지, 심지어 배우의 연기까지 디지털로 대체가 가능해진 디지털 시네마의 시대에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는 필름 시대로 회귀한 듯 CG를 최소화하고 아날로그 한 방식으로 영화를 완성해 현대의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바로 여기에 해답이 있다. 이 글 초반에 언급했듯이 이제 미드도 브라운관을 통해 화려한 볼거리를 재현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은 더는 영화가 테크닉적인 측면에서 TV를 압도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영화가 관객에게 줄 수 있는 영화만의 재미라면, 기술의 힘을 최소화한 채 인간의 한계를 최대한으로 밀어붙인 볼거리가 대안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것을 증명한 작품이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였다.  

한국영화는 할리우드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2015년의 한국영화는 침체를 면치 못하는 상황이다. 관객의 기대를 충족할 만한 작품을 오랫동안 내놓지 못하고 있다. <매드 맥스 : 분노의 도로>의 경우처럼 할리우드가 미드의 공세에 맞서 영화가 줄 수 있는 메리트를 찾기 위한 시도에 우호적인 것과 다르게 한국영화는 여전히 크게 히트한 장르를 답습하고 흥행에 성공한 요소를 모방하는 안일한 행태를 반복하고 있다. 심지어 최근에 만난 한 영화인은 한국영화를 두고 “영화는 영화다워야 하는데 TV 드라마를 다루는 듯하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이는 한국의 드라마를 비하하기 위한 비교가 아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TV 드라마는 전 연령대를 대상으로 하기에 서사의 효과적인 전달을 우선한다. 이야기를 대변하는 알맞은 룩(look)에 대한 고민보다는 화면을 밝게 가져가 최대한 쉽게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요즘 영화 중 많은 수가 천만 관객으로 대변되는 흥행의 수치에만 함몰되다 보니 더 많은 관객 동원을 위해서 드라마의 방식을 따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학적인 투자를 하는 대신 더 많은 돈을 출혈해서라도 어떻게 하면 더 유명한, 관객 동원이 용이한 배우들을 캐스팅하는지에만 신경을 쓰는 것이 대기업이 장악한 한국영화의 현실이다.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영화는 예전만큼 독보적인 문화 콘텐츠의 지위를 많이 상실했다. 할리우드는 미드의 공세에, 한국영화는 창의력을 억누르는 내부 제작 환경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해결할 방법은 하나다. 영화는 영화의 길을 갈 때 영화다울 수 있다. 의지만 있다면 전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할리우드는 보여줬다. 한국영화계도 이를 증명할 수 있을까?   

일러스트 JUN

ARENA HOMME
2015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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