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결국엔’ 변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주의! <11/22/63>의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지 한 달 정도가 되었다. 박근혜, 문재인 두 후보 간 격차 율이 3.6%밖에 되지 않아 선거 결과에 따른 후폭풍이 만만치 않다. 특히 원하던 결과를 얻지 못한 문재인 진영과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절망감과 낭패감이 대단하다. 왜 아니겠는가. 우리는 용산 참사, 민간인 사찰, 방송 장악 등 지난 5년간 MB정부 하에서 벌어졌던 몰상식하고 부조리했던 사건과 사고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같은 당 출신의 박근혜가 과반이 넘는 득표로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결과적으로 정당성을 얻고야 말았다.

그뿐인가, 박정희 전(前)대통령의 딸이라는 배경과 더불어 당시 유신정권 하에서 자행됐던 5.16과 인혁당 사건에 대한 부적절한 발언으로 선거운동 기간 내내 문제가 됐던 그녀의 역사관 또한 이번 결과를 통해 거의 문제없음에 가까운 면죄부를 받기에 이른 것이다. 항간에서는 우리 사회가 곧 유신시대로 회귀한다는 둥, 역사의 시계가 거꾸로 돌아가게 됐다는 둥의 한탄조가 이어지고 있다. 요컨대, 과거의 역사를 청산하고 새 시대로 나갈 절호의 기회를 우리 스스로가 놓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스티븐 킹의 <11/22/63>은 ‘1963년 11월 22일’ 댈러스 시가에서 벌어졌던 존 F. 케네디(이하 ‘JFK’) 대통령의 암살을 다룬 소설이다. 50년이나 지난 사건을 지금 다루는 이유? 그게 참 흥미롭다. 만약 JFK의 암살이 미수에 그쳤다면 이후 미국 역사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가령, 2000년 9월 11일에 월드트레이드센터가 무너지는 사건도, 그해 미국 대선에서 조지 W. 부시가 엘 고어를 꺾고 대통령에 오르는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수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서른다섯 살의 교사 제이크 에핑은 햄버거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친구 앨로부터 급히 와달라는 연락을 받는다. 그곳의 허름한 창고를 통과하면 과거로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 그러면서 말하길, 역사를 변화시키면 세상이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제시하며 JFK의 암살을 막아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역사라는 강물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여러 분수령 중에서도 변화를 일으킬 여지가 가장 다분한 사건이 암살이야. (중략) 1944년에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가 히틀러를 암살하려다 실패하는 바람에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지 않았나.”

그래서 뿅! 제이크 에핑은 앨의 바램처럼 과거로 돌아간다. 그리고 JFK의 암살범인 리 오스왈드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며 암살이 미수에 그칠 수 있도록 문제의 그날에 대비한다. 그러니까, <11/22/63>은 JFK 암살 사건을 다루지만 역사극이 아니라 타입슬립(Timeslip), 즉 시간여행물이다. 아마 이번 대선에서 문재인을 지지했던 사람 중에 <11/22/63>의 설정에 혹한 이들이 있다면 대선 결과를 바꿀 목적으로 극 중 제이크 에핑처럼 시간여행을 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안 그래도, 우리는 지난 한 해 동안 적지 않은 수의 시간여행 소재의 작품을 만났다. <옥탑방 왕세자> <인현왕후의 남자> <닥터 진> <신의> 등의 드라마가 한동안 브라운관을 장악했고 우디 앨런의 <미드나잇 인 파리>, 배리 소넨필드의 <맨 인 블랙3>와 같은 미국영화가 한국 팬들의 큰 관심을 모았다. 이렇게 타임슬립물이 인기를 끄는 배경 중 하나는 현실에 만족 못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현실에 불만이 있거나 만족 못하는 이들이 현재의 잘못된 부분을 초래한 과거로 돌아가 이를 개선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결국 타입슬림물은 현실에 결핍을 갖고 있는 이들이 대리만족하는 장르다. <11/22/63>이 나온 배경 역시 이와 무관치 않다. 제이크 에핑은 눈물이 없는 남자로 묘사된다. 주변의 평가에 따르면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 때문에 에핑은 아내에게 이혼까지 당한 상태다. 에핑이 느낄법한 바닥까지 떨어진 심정, 스티븐 킹은 이를 현재 미국 사회가 처한 직접적인 사태로 대입하지는 않지만 이것이 중산층 어느 가정의 사연이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는 추측 가능토록 한다.

2000년 들어 강타한 9.11이라든지, 리먼브라더스 사태로 촉발된 금융위기라든지, 그로 인한 중산층의 몰락은 미국 사회 전체의 위기를 불러왔다. 그러니 많은 미국인들이 시간을 뒤로 돌려서라도 잘 사는 미국, 부강한 미국으로 바꾸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한 욕망이다. 그에 부응코자 <11/22/63>의 스티븐 킹은 제이크 에핑으로 하여금 리 오스왈드의 암살을 저지케 하여 JFK의 목숨을 극적으로 살리고야 만다. 그럼 이제 제이크와 그의 친구 앨이 원하던 바대로 미국의 현대사는 희망적으로 변모할까.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11/22/63>의 진가가 발휘된다. 스티븐 킹 왈, 역사는 단단한 거북이 등껍질과 같아서 변화를 잘 용납하지 않는다. JFK를 구했는데도? 이후 미국 현대사의 발전 과정은 다른 형태를 띄지만 지금 미국인들이 체감하는 비극에 준하는 결과로 수렴된다. 당연하다. 역사는 반복하는 법이다. 역사는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박근혜가 당선된 이번 대통령 선거 결과가 믿어지지 않는다고? 역사의 성질을 이해한다면 못 받아들일 이유도 없다.

역사는 보수적이다. 약간의 변화 의지만 보여도 그에 강하게 저항하려 든다. 야권이 문재인으로 단일화가 되고 20~30대 투표율이 지난 2007년 대선에 비해 20% 가까이 증가한 65.2%를 기록했지만 보수 성향으로 분류되는 50대가 90%의 투표율로 결집하며 정권 교체라는 변화를 이루지 못했다. 역사가 꿈쩍하지 않는 이상 그럼 변화를 바라는 이들의 열망은 더 이상 희망이 없는 것인가. 꼭 그렇지만도 않다. 역사는 반복되지만 늘 똑같은 형태는 아니다. 돌고 도는 사이클 사이에서도 미세하나마 차이는 존재한다.  

예컨대, 2007년과 2012년 대선 사이에서 20대와 30대의 투표율 변화는 어떤가. 각각 46.6% -> 65.2%, 54.9% -> 72.5%를 기록하며 큰 폭으로 증가했다. 그에 따라 문재인의 득표 수(14,692,632명)는 당선된 박근혜(15,773,128명)를 제외하면 역대 대통령 당선자보다 더 높았을 정도였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선전한 셈이다. 여권과 야권 후보 사이에서 득표 수 격차가 현저했던 2007년과 비교해 변화를 바라는 이들의 입장에서 적어도 희망은 보았으니 말이다.

역사가 허락하는 일말의 변화 가능성을 인정한다면, 이번 대선의 결과 여부를 떠나 과정 또한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것은 또한 인간의 본성이기도 하다.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이라지만 급격한 변화를 따라 잡기에 인간의 적응 예열 능력은 그리 신속한 편이 아니다. 오히려 사는 방식이 굳어져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역사가 보수적인 것이 아닐까. 역사를 만들고 쌓아올리는 것은 결국 인간이니까 말이다.

<11/22/63>에는 이와 관련한 꽤 흥미로운 설정이 등장한다. 과거로의 시간 여행은 항상 1958년 9월 9일 11시 58분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과거에서 얼마간의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면 현재에서 흘러간 시간은 단 2분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이크 에핑은 오스왈드의 JFK 암살 저지 후 현재로 돌아와 예상과 다르게 참혹하게 변한 현재를 보고는 다시 1958년 9월 9일로의 시간 여행을 감행한다. 그럼 역사는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리셋이 되고 현재로 돌아오면 2분이 지난 상태에서 JFK 암살이라는 레일 위의 역사를 되찾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제이크는 역사의 성질을 뼈저리게 인식하고 더 이상의 시간 여행을 단념하지만 단 하나 유혹을 떨치지 못하는 것이 있다. JFK의 암살을 막기 위해 과거에서 머무는 동안 깊이 사랑하게 된 또래의 여인이 있는데 이제는 할머니뻘이 되었을 현재의 그녀를 찾아나서기로 한다. 역사에 또 어떤 부정적인 효과를 미칠지 모르지만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애정은 강제한다고 포기되는 것이 아니다. 스티븐 킹은 그렇게 역사의 보수성에 손톱만한 유예를 둠으로써 긍정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이를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의 가능성 정도라고 표현해도 좋을까. 계란이 깨지는 거야 불 보듯 뻔하지만 그것이 계속 된다면 언젠가 바위 표면에 작게나마 균열이 일어날 것이고, 또 언젠가는 마침내 바위가 깨지는 날도 도래할 것이다. 나는 그것이 역사의 변화 속도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역사라는 단단한 바위를 생각하면 이는 결코 느린 속도가 아니다. 그런 시도 속에 역사도 변화할 거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변화에 대한 의지만 놓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마치 누군가를 절절히 사랑하는 감정처럼 말이다.
 

ARENA
2013년 2월호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