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린>은 제작 초기 단계부터 시나리오가 뛰어나다고 충무로에 소문이 자자한 영화였다. 이를 뒷받침하듯 현빈, 정재영, 조정석, 박성웅, 정은채 등 지금 가장 각광받는 배우들이 캐스팅에 대거 이름을 올렸고 고락선 촬영 감독(<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 <관상>), 조화성 미술 감독(<신세계> <전우치>), 모그 음악 감독(<광해, 왕이 된 남자> <악마를 보았다>) 등 충무로의 대표적인 스탭들이 참여하면서 더욱 기대감을 높였다.
이름값이 아니더라도 한국 영화계가 <역린>에 주목한 이유는 분명했다. 2014년 한국 영화의 키워드 중 하나는 ‘사극’이다. <역린> 외에도 <군도: 민란의 시대> <명량-회오리바다> <협녀> <해무> 등 올해만 10편에 가까운 사극이 개봉할 예정이다. <역린>은 그 많은 사극 중 가장 먼저 개봉하는 작품이다. 아무래도 관심이 모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영화의 제목은 용의 턱 아래에 거슬러난 난 비늘, 즉 ‘역린 逆鱗’을 건드리면 용이 크게 성을 낸다는 전설에서 가져왔다. 임금의 분노를 비유하는 말로, <역린>은 정조 즉위 1년인 1777년 7월 28일 벌어진 ‘정유역변’을 모티브로 한다. 자객이 왕의 침전 깊숙이까지 숨어 들었을 정도로 역사상 가장 치명적이었던 암살 사건을 두고 이를 막으려는 정조와 그 주변의 반응 들을 딱 하루의 시간 동안 담아낸다.
<역린>을 연출한 이는 이재규 감독. 이 작품이 영화 데뷔작이지만 이재규 감독은 TV드라마 <더킹 투하츠>(2012) <베토벤 바이러스>(2008) <패션 70’s>(2005) 등으로 잘 알려진 연출자다. 특히 방영 당시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하며 드라마 팬덤을 양성했던 <다모>(2003)를 감독한 경력이 있다. 그런 점에서 이재규 감독의 <역린> 연출은 어느 정도 수긍할 만하다.
사실 TV드라마 출신들이 영화로 옮겨오는 경우는 예전부터 있어 왔다. <꽃을 든 남자>(1997)의 황인뢰 감독, <체인지>(1997)의 이진석 감독, <러브>(1999)의 이장수 감독,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2003)의 오종록 감독, <국경의 남쪽>(2006)의 안판석 감독 등이 이에 해당한다. 적지 않은 수이지만 그렇다고 잦은 경우도 아니다. 그만큼 흥행이나 작품성 면에서 성공한 사례가 없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TV 드라마 출신 영화감독들의 실패 사례 탓에 많은 이들이 <역린>을 기대작으로 꼽으면서도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이재규 감독에게는 TV 출신 영화감독에 대한 불신을 이겨내야 했던 셈인데 <역린>에서 보여주는 연출력을 감안하면 그 정도 수준은 아닌 것 같다. 선배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영화와 드라마의 매체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역린>은 꽤 많은 재료를 갖춘 영화다. 무수히 많은 작품을 통해 재조명 받고 있는 정조(현빈)를 비롯해 암살 위협에 시달리는 정조의 곁을 그림자처럼 지키는 상책(정재영), 사랑하는 여인을 구하기 위해 정조의 암살에 가담하는 살수(조정석)와 같은 다양한 인간 군상들, 무려 두 달 반에 걸쳐 거대하게 구현해낸 정조의 침전 ‘존현각’, 그리고 한낱 한시에 운명처럼 이곳에서 맞붙게 되는 주요 인물들의 스타일리시한 액션까지.
이재규 감독은 잘 차려진 밥상을 두고 머뭇거리는 듯한 인상을 준다. 드라마 연출 시절의 호흡법이 진하게 남아있는 것이다. 드라마는 기본적으로 긴 상영 시간을 보장받기 때문에 화법이 설명적이다. 그와 다르게 영화는 압축하는 매체에 가까운데 <역린>은 안 그래도 많은 인물 하나하나의 배경 설명에 집중하다보니 정작 정조 암살이라는 사건이 실종된 형국이다.
<역린>의 메인 포스터에 등장한 주요 인물 수만 해도 8명. 대개 16부작 이상으로 편성이 되는 드라마는 주요 인물 각자의 스토리를 한 회씩만 배정하더라도 사건을 설명하기에 충분한 시간을 갖는다. 하지만 상영 시간이 135분인 <역린>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많은 수다. 이중 두 세 명의 주인공에 집중하며 주변 인물을 조망하는 방식을 가져가야 했지만 그렇지 않다보니 마치 인물 소개 후 결말로 바로 넘어가는 듯한 불균형의 전개를 보여준다.
그리고 또 하나. 드라마 출신 영화감독들의 작품을 살펴보면 스타라는 볼거리에 많은 것을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이들이 연출한 영화에는 유독 배우보다는 ‘스타’가 출연한 경우가 많았다. <꽃을 든 남자>에는 개봉 당시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심혜진이, <러브>에는 당대 최고의 선남선녀로 평가받던 정우성과 고소영이,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에는 차태현과 손예진이 스타 캐스팅으로 각광을 받았다.
하지만 TV 드라마의 시청자들과 다르게 영화 관객의 요구는 단순히 스타의 얼굴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아무리 인기 높은 스타가 출연한들 관객은 티켓 값을 지불한 만큼, 아니 그 이상을 원하기 마련이다. 더 정확히는 TV에서와는 다른 연출력을 바라는 것이지만 그동안의 작품 들을 보면 신분을 초월한 맹랑한 로맨스(<꽃을 든 남자>), 성(性)이 뒤바꾼 남녀의 해프닝(<체인지>), 분단 현실의 가슴 먹먹한 사랑(<국경의 남쪽>) 등 굳이 영화가 아니어도 볼 수 있는 내용이 태반이었다.
그에 비하면, <역린>은 적어도 TV에서 볼 수 없는 영화적인 내용을 선택한 것에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이재규 감독의 변을 인용하자면, “각자 처한 입장이 다른 상태에서 어느 하루를 계기로 맞닥뜨리”는 이야기는 확실히 영화적이라 할 만하다. 하루라는 제한된 시간이 주는 긴장감은 함축적인 영화의 성격과 잘 맞아 떨어지는 까닭이다.
그렇기에 아쉬움이 남는 게 <역린>이다. 시대의 유행인 사극 드라마, 집단의 스타 캐스팅, 화려한 볼거리로 일정 정도의 관객 동원을 이뤘지만 더 나은 작품이 될 수 있었다. 영화와 드라마의 매체 차이를 극복하는 것, 여전히 TV드라마 출신 영화감독들에게 부가된 숙제다.
시사저널
NO. 12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