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캐릭터 활용법

2017년 한국영화계의 화두 중 하나는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다. 지난해 <우리들> <비밀은 없다> <미씽: 사라진 여자> 등이 좋은 평가를 받았고 올 초에는 <여교사>가 개봉하여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남성 영화 일색인 우리 영화 시장에 여성 영화의 등장은 그 자체로 반가운 소식이다. 브로맨스가 주목받는 한편에서 워맨스를 통해 한국영화 산업 다양성의 균형을 맞춰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한다.

하나 아쉬운 건 여성 영화들이 좋은 평가에 버금갈 만한 흥행 성적을 내놓지 못한다는 데 있다. 2017년 한국영화계의 과제라면 여성 영화가 관심을 받기 시작한 2016년의 흐름을 대중적으로 안착하기 위해 노력하는 데 있다. 한국 여성 영화가 흥행 면에서 미흡했던 부분은 무엇이었을까. 성공한 여성 영화를 살펴보는 것이 그 첫 번째가 될 것이다.

사실 한국뿐 아니라 할리우드에서도 여성이 원톱으로 나서거나 독립적인 캐릭터를 맡을 수 있는 영화들은 남성 배우들보다 상대적으로 그 폭이 좁다. 그런데도 그 좁은 틈을 뚫고 압도적인 박스오피스 기록으로 유의미한 결과물을 내놓는 것이 할리우드의 진짜 힘이다. 심지어 여성 혹은 여성주의를 굳이 강조하지 않으면서 영화 그 자체로 관객을 끌어모으는 노하우는 눈여겨볼 만하다.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이하 ‘<로그 원>’)와 <모아나>와 <컨택트>가 적절한 예라고 할 것이다. <로그 원>은 우주를 지배하려는 제국군에 맞서는 저항군 소속 진 어소(펠리시티 존스)의 활약을 다룬다. <모아나>는 모투누이 섬이 저주에 걸리자 이를 풀기 위해 바다로 나서는 소녀 모아나(아우이 크라발호 목소리)가 전면에 나선다. <컨택트>는 언어학자 루이스(에이미 아담스)가 지구에 나타난 외계인의 언어를 습득하며 이들을 알아가는 내용이다.

모두 여성이 주인공으로 나서는 영화이지만, 그 사실을 애써 강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객이 더 흥미를 돋울 만한 모험의 설정에 더욱 역량을 쏟아붓는 듯한 인상을 준다. <로그 원>은 우주에서의 전쟁을, <모아나>는 애니메이션의 모험을, <컨택트>는 SF가 주는 경이로움을 핵심 삼아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여성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영화가 특별하다는 인식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설정이 일반적이라는 느낌을 선사한다.

철저히 대중의 관점에서 여성 캐릭터를 설정하고 다루는 할리우드와 다르게 한국영화의 경우,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사실이 독특하고 특별한 접근으로 포지셔닝 된다. 이는 한국영화에서 여성 영화와 여성 배우가 남성 영화와 남성 배우에 비해 차별받아왔다는 사실을 역으로 증명한다. 그것은 곧바로 영화의 설정과도 연결되는 것이어서 다루는 내용을 보면 대개 남성적인 지배 구조 속에 일종의 계급 투쟁을 벌이는 여성의 모습으로 단순화된다.

엇! 그렇다고 나의 견해가 한국 여성 영화의 성취를 깎아내리려는 의도가 아님을 밝히고 싶다. 개인적으로 <우리들> <비밀은 없다> <미씽: 사라진 여자> <여교사>를 흥미롭게 관람했을 뿐 아니라 이들 영화의 존재가 남성 영화 일색인 한국영화 산업에 유의미한 족적을 남겼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다만, 소수의 관객만이 여성 영화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관객의 관심을 끌게 만들어 좀 더 건강한 한국영화계를 만들자는 제언이라고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로그 원>과 <모아나>에 대해 언급했지만, 이들 영화가 여성 주인공과 함께 하면서 큰 성공을 기록한 데에는 오랜 역사가 필요했다. 아시다시피, 이들 영화는 각각 <스타워즈> 시리즈와 디즈니라는 배경을 가지고 있다. (<스타워즈> 시리즈의 루카스 필름은 2009년 디즈니에 합병됐다!) J.J. 에이브럼스 감독은 이전 6편의 에피소드까지 백인 남자 일색이던 시리즈에 여성 레이(데이지 리들리)와 흑인 핀(존 보예가)을 투톱으로 내세워 새 시대에 걸맞은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를 선보였다. 그의 성공이 <로그 원>까지 이어진 셈이다.

그러니까,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의 말을 빌려 살짝 변형하자면, 지금은 2017년이다. 여성이기 때문에 주목받고 배려받는 것이 아니라 여성도 동등한 조건에서 경쟁을 벌이는 시대라는 의미다. 시대는 그렇게 그에 걸맞은 정신을 요구한다. 흔히 보수적이라고 알려졌던 디즈니는 시대 정신에 발맞춰 <모아나>에서는 백마 탄 왕자 ‘따위’ 등장시키지 않는다. 주인공 모아나는 마우이(드웨이 존슨 목소리)와의 ‘공조’ 속에 섬의 저주를 푸는 데 성공한다. 힘들다고 울지도 않고 사랑에 더 신경을 쓰지도 않으며 그저 자신이 맡은 일에만 충실할 뿐이다. 이를 꿈과 모험의 측면에서 풀어가니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라도 부담감 없이 즐길 수 있다.

한국에서도 오락에 충실한 여성 영화가 등장해 흥행한 예가 있다. <암살>(2015)은 극 중 한국 독립군 저격수 안옥윤(전지현)을 주인공 삼아 1천2백7십만 명의 관객을 기록하며 여성 독립군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끌어내기도 했다. 그 흐름은 공교롭게도 여성이 주인공이 아닌 일제강점기 배경에서 독립 투쟁을 벌이는 영화의 유행을 불렀다. 이는 한국 여성 영화의 갈 길이 여전히 멀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난 2월 중순에 <비밀은 없다>(2016)를 연출한 이경미 감독과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한 적이 있다. 한 관객이 한국에서 여성 영화가 제작되기 힘든 이유에 관해 물었다. 이에 대개 이경미 감독은 여성은 남성보다 물리적인 힘이 약해 역동적인 이미지를 얻기가 힘들다는 요지의 답변을 했다. 그러면서 이를 극복하는 이야기와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는 얘기를 했는데 바로 여기에 해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한국영화계에서 감지되는 분위기 중 하나는 남성 영화에 대한 관객의 피로도다. 브로맨스로 통칭하는 남성 투톱 영화에, 갈수록 자극적이 되어가는 남성 영화를 향한 관객의 발걸음은 조금씩 빠지는 추세다. 새로운 영화를 향한 기대감이 충만한 상태다. 아니, 제작 편수에서 독주하는 남성 영화와 균형을 맞춰줄 여성 영화의 출현이 절실하다. 판은 깔린 상태다. 좀 더 많은 대중과 만날 수 있는 이야기와 이미지의 여성 영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ARENA
2017년 3월호

2 thoughts on “여성 캐릭터 활용법”

  1. 여성 캐릭터 활용법에서 평론가님 말씀대로 스타워즈 시리즈도 그렇고 이 시리즈의 배급사인 디즈니는 어느 배급사보다도 잘 활용한단 생각이 드네요

    1. 예, 어제는 [미녀와 야수]를 봤는데 그 마저도 역시 진화한 디즈니라는 생각을 들게 할 정도였는데요. 여자 뿐 아니라 소수자에 대한 지지까지 드러낸다는 점에서 정말 엄지손가락을 들게 만들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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