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 마키나> 그리고 A.I.는 진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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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말부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엑스 마키나>는 궁금증을 유발하는 제목으로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deus ex machina’는 라틴어로 ‘기계 장치의 신 god from a machine’을 의미한다. 여기서 ‘데우스’, 즉 ‘신’의 의미를 의도적으로 삭제한 제목은 역설적으로 기계 장치가 신이 되는 이야기를 기대케 한다.

기계인가? 인간인가?

칼렙(돔놀 글리슨)은 인터넷 검색 엔진 기업 ‘블루문’에 근무하는 컴퓨터 프로그래머다. 근무 중 회장 네이든(오스카 아이삭)의 별장에 초대받은 행운을 거머쥐고 기뻐한다.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별장에서 칼렙은 매혹적인 여성 에이바(알리시아 비칸데르)를 만난다. 그녀는 천재 개발자이기도 한 네이든이 창조한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로봇, 바로 A.I.다. 칼렙이 네이든의 비밀연구소에 초대받은 진짜 이유는 에이비가 지닌 성능을 테스트하는 데 있다. 그녀, 아니 A.I.가 보여주는 감정이 진짜인지, 프로그래밍에 맞춰 흉내 내는 것인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A.I.가 인격과 감정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인간과 가까워지거나 오히려 인간의 경지를 넘어서는 테마의 영화는 낯설지 않다. 멀게는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1968)부터 가깝게는 <그녀>(2013)까지, <엑스 마키나>의 겉으로 드러난 이야기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게다가 이야기 대부분이 네이든의 비밀연구소에서 이뤄지는 까닭에 영화의 규모조차 소박해 화려한 볼거리를 기대하기도 무리다. 대신 눈길을 끄는 건 독특한 외형을 지닌 에이바다.

에이바는 그물 형태의 보디 슈트를 장착하고 칼렙을 맞이한다. 칼렙의 반응은 우선으로 경이로움이지만, 매우 놀라기보다 언젠가 한 번 만나본 것처럼 호의적인 태도가 두드러진다. 부분적으로 인간과 똑같은 에이바의 외모 덕이다. 몸 전체를 그물 형태의 보디 슈트가 감싸고 있지만, 얼굴과 손발만큼은 인공 피부로 마감되어 있어 사람이 기계 장치를 만났을 때 느끼는 위화감이 상당 부분 경감된 까닭이다. 로봇과 인간의 단계에 있는 A.I.의 정체성을 부여한 제작진의 의도일 터다. 그에 따라, 칼렙은 지식을 단순히 다운로드한 로봇으로서의 에이바와 그것을 학습해 감정을 느끼는 단계로까지 진화한 A.I.로서의 에이바 사이에서 혼란한 감정을 드러낸다.

제작진은 너무 기계적으로 보이기보다 생물체의 유기성과 컴퓨터의 계산적인 느낌이 고루 섞이길 의도했다. 알리시아 비칸데르는 자신이 연기한 에이바의 디자인에 대해 이런 감상을 전했다. “하나의 예술 작품이었다. 에이바는 단순한 기계라고 하기에 완벽하고 아름다웠다.” 실제로 이 영화의 연출자이자 각본까지 담당한 알렉스 가랜드는 에이바가 감정을 완전하게 각성하는 과정을 예술, 그중에서도 미술의 진화 과정에 대입해 풀어가며 동일 테마의 영화와는 색다른 접근 방식을 취한다.

고전주의에서 인상주의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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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주의가 등장하기 전까지 화가 대부분은 대상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주력했다. 고전적인 회화의 특징인데 단순히 대상을 재현하는 일종의 기호로서 정보를 전달하는 수준이었다. 그 안에서 화가의 시각이나 감정을 읽는다는 건 애당초 무리였다. 네이든의 비밀연구소를 광활한 자연경관이 돋보이는 곳에 설정한 감독의 의도도 여기에 있다. 이 지역에 도착한 칼렙이 비밀연구소를 발견할 때 영화의 카메라는 그 어떤 감정도 배제한 풍경화의 구도로 해당 장면을 바라본다.

이 장면은 관객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의미 체계로만 존재한다. 이는 칼렙이 에이바에게 질문을 던져 얼마나 인간에 가까운 답변을 하는지 알아보는 ‘튜링 테스트’ 제안을 받고 일차적으로 갖게 되는 감정과 일치한다. A.I.에 대한 지식은 있지만, 실제로 경험한 적 없는 칼렙에게 에이바의 존재를 듣고 즉각적으로 인식하는 감정 체계란 호기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의 의미를 강화하듯 튜링 테스트 관련, 외부에 발설하지 않는다는 비밀유지계약서를 작성할 때 칼렙이 묵는 방 한쪽 벽에는 풍경화 그림이 한 점 무심하게 걸려 있다.

그림 속 내용보다 그림 자체의 미장센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본격적인 튜링 테스트가 진행되는 동안 의도가 명확해진다. 에이바는 혼자 있을 때면 책상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는 한다. 칼렙에게 보여준 첫 번째 이미지는 기하학적 문양으로 채워져 있어 무엇인지 알아보기 쉽지 않다. 이에 칼렙은 실체 있는 대상을 그려보는 것이 어떠냐며 충고를 한다. 이를 받아들인 에이바가 두 번째로 보여주는 그림은 유리방 옆에 소박하게 마련된 정원이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건 대상으로서의 정원이 아니라 에이바가 이를 바라본 시선, 즉 그린 방식이다. 해상도가 높은 정밀화를 기대했던 것과 다르게 에이바가 그린 정원은 화소의 수가 적어 형태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다. 에이바의 A.I. 능력이 떨어져서일까? 오히려 그 반대다.

에이바가 그린 정원은 인상주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빛에 주목했다. 고전주의 회화처럼 대상을 재현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빛이 투영된 상태의 대상을 그리려 했다. 빛의 상태에 따라서 대상은 그 형태와 색채를 달리한다. 터너, 세잔, 모네 등 대표적인 인상주의 화가의 작품은 그림의 대상이 색에 의해 뭉개져 있는 듯한 인상이 강하다.

에이바의 정원 그림이 그렇다. 에이바가 해상도가 낮게 정원을 묘사한 건 유리에 반사된 빛에 의해 단편화된 형태로 정원을 바라봤기 때문일 터다. 그처럼 산만하고 혼란한 단편들을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했다는 건 에이바 나름의 ‘지각’을 통해 질서를 부여했다는 의미다. 지각(知覺)은 의심으로부터 출발한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정원인가? 유리에 반사된 정원이라는 형태인가? 마침 풍경화처럼 대상으로만 존재하던 비밀 연구소 외부의 아름다운 자연에 짙은 안개가 드리운다. 고전적 회화에서 인상주의라는 현대 예술로의 진화. 그에 맞춰 에이바는 연구소가 정전이 된 상태를 이용, 칼렙에게 네이든을 믿지 말라며 의심을 심고 혼란스럽게 한다.

아바타? 아니 에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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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마치 튜링 테스트의 주체와 객체가 뒤바뀐 듯한 의미를 부여하는 장면이다. 오히려 에이바가 칼렙을 테스트하는 듯 되어버린 상황은 ‘그녀’가 더는 수동적인 존재로 머물지 않을 것을 암시한다.

그림을 그린다는 건 한편으로 미(美)를 추구한다는 얘기다. 정원 그림으로 칼렙의 관심을 잡아두는 데 성공한 에이바는 준비한 옷을 갈아입고 나와 유혹의 기술까지 선보인다. 첫 대면부터 에이바에게 호감이 갔던 칼렙은 옷을 입은 그녀를 마주한 순간 A.I.가 아니라 아름다운 여자를 마주한 듯한 표정이 역력하다. 이때 영화의 카메라는 오히려 칼렙이 유리방에 갇힌 듯한 구도로 이 상황을 응시한다.

바꿔 말해, 에이바의 입장에서는 적게나마 해방감을 느끼는 순간이기도 할 터. 무엇보다 옷을 입는 행위를 통한 욕망의 발산은 주도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 존재로서의 에이바를 상징한다. 흥미롭게도 에이바가 입은 옷의 디자인은 하얀 종이 위에 색색의 물감을 뿌린 듯한 잭슨 폴록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알렉스 가랜드 감독의 의도적인 의상의 미장센일 테다. 실제로 네이든의 비밀연구소 거실에는 잭슨 폴록의 대표작 중 하나인 <NO.5>가 벽의 한 면을 차지하고 있다. 네이든은 에이바를 왜 여자로 만들었느냐는 칼렙의 질문에 이 그림을 예로 들며 다음과 같은 요지의 답변을 들려준다.

“이건 마음을 비우고 손 가는 대로 붓을 휘두른 거야. 의도적인 것과 임의적인 것의 중간 단계랄까? 폴락이 작업 방식을 바꿨다면 어땠을까? 머리를 비우고 그림을 그리는 대신 ‘그리는 이유를 알기 전에는 이 그림을 그릴 수 없어?’ 이렇게 말했다면? 그럼 캔버스에 점 하나도 못 찍어 작위적으로 행동하는 게 부자연스러운 거라고. 대부분의 행동은 저절로 나오는 거야.”

그래서 잭슨 폴록의 작품은 추상적이다. 그의 그림은 현실의 어떤 대상을 나타내지 않는다. 잭슨 폴록은 대상으로부터 그림을 해방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고전적인 회화에 의문을 갖고 대상이 아닌 빛에 주목했다. 그에 이어 피카소는 대상을 여러 조각으로 해체했고 마티스는 대상의 고유한 색을 고수하는 대신 자유자재로 색채를 활용했다. 그러면서 점점 그림 속 대상이 갖는 의미 정보는 효용가치를 잃어갔다. 그리고 잭슨 폴록 같은 이는 자신의 작품 자체를 일상의 사물과 별 차이가 없게 만들어 그림에 대한 일반의 상식을 바꾸었다.  

인상주의 화가부터 잭슨 폴록까지, <엑스 마키나>가 가져오고 인용한 그림은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담고 있기에 보는 이로 하여금 오직 작가 ‘그 자신’을 의미 정보로 제공할 뿐이다. 에이바라는 이름의 근원도 이와 연관이 있다. 에이바의 이름을 듣고 아바타(avartar)를 떠올리는 건 자연스럽다. 아바타는 사용자의 지시에 따라 가상공간에서 움직이는 그래픽 아이콘, 즉 수동적인 존재를 의미한다. 알렉스 가랜드 감독은 기계라는 대상으로부터 해방된 존재의 의미로 뒤의 철자를 떼어내고 에이바(Ava) 단독의 이름을 부여했다.

액자 밖으로의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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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슨 폴록의 그림처럼 에이바가 어떻게 기계의 수준을 넘어 인간처럼 지각하게 됐는지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대신 “대부분의 행동은 저절로 나오는 거야” 네이든의 발언을 인정한다면 에이바와 같은 신인류의 출현은 당연한 차례일지 모르겠다. 그처럼 <엑스 마키나>는 에이바를 통한 기계에서, A.I.로, 신인류로의 진화 과정을 풍경화, 인상주의를 연상시키는 에이바의 그림, 잭슨 폴록의 <NO.5> 등 고전주의 회화에서 현대 예술까지의 발달 과정과 등치 시켜 설득력을 높인다.

그것은 한편으로 에이바가 지하에 있는 유리방에서 탈출해 지상으로 나와 헬리콥터를 타고 인간세계에 안착하는 이야기의 흐름과도 일치한다. 이의 원전은 ‘흑백으로만 이뤄진 방 속에서 자란 메리’라는 사고실험일 것이다. 흑백 외의 색을 경험한 적 없는 메리는 세상의 모든 지식을 이성으로만 습득한다. 예컨대, 빨간색에 대한 지식은 있지만, 실제로 경험한 적은 없다. 칼렙은 에이바에게 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흑백의 방에 있는 메리는 컴퓨터, 밖으로 나온 메리는 인간을 상징한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칼렙을 혼동시킬 정도로 지각 능력을 갖춘 에이바의 최종적인 단계는 유리방을 탈출하는 것이다. 그림으로 치면 액자 밖으로 나오는 것일 텐데 <엑스 마키나>는 <마르가레트 스톤보로 비트겐슈타인의 초상>을 활용해 탈출 이미지를 극대화한다. 그림 속 인물은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그림을 비롯해 저작 모음인 ‘블루문’, 언어로 이뤄지는 테스트 등 곳곳에 흩어진 비트겐슈타인의 흔적을 한데 모아 이 영화를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의 누나로 알려진다. 그녀의 결혼을 앞두고 아버지가 구스타브 클림트에게 의뢰해 완성한 작품이다. 그림 속 장본인은 이 작품을 맘에 들어 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처럼 마르가레트는 독립심이 강하고 뚜렷한 주관을 가진 선진 여성으로 평가받았다.

말하자면 마르가레트의 현현(顯現)인 에이바는 자신의 창조주인 네이든을 처리하고 사랑을 빙자(?)해 칼렙을 유리방에 가두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는 네이든의 침실에 놓인 <마르가레트 스톤보로 비트겐슈타인의 초상> 속 마르가레트처럼 하얀 옷을 꾸며 입고는 지상으로의 역사적인 첫발을 내딛는다. 이를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은 담담하다. 에이바가 자연의 색깔을 느끼고 바람이나 햇살의 감촉을 즐기는 광경을 포착해 이 세계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듯한 인상이 역력하다.

알렉스 가랜드 감독이 ‘데우스’를 지우고 <엑스 마키나>를 제목으로 채택한 배경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다. 인간 위에 군림하는 신의 존재가 아닌 인류 역사의 자연스러운 진화 과정 중 한 단계로 인정하려는 듯한 의도가 읽힌다. 자연이 품은 모든 예술의 한 형태로서의 에이바. “우리가 좋아하는 예술의 목록을 만들면 훌륭한 토론의 대상이 될 거예요.” 에이바와 칼렙의 대화 중 한 대목이다. 이는 <엑스마키나>가 A.I.의 진화를 설명하는 결정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딴지일보
(2015.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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