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 애듀케이션> <클래스> 교육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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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에 대한 고민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도 교육은 골칫거리인가보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영국과 프랑스 교육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영화가 한국을 찾았다. 영국의 <언 애듀케이션>(3/18 개봉)과 프랑스의 <클래스>(4/1)가 그것. <언 애듀케이션>은 발랄한 문체로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구가하는 닉 혼비(<하이 피델리티>)가 시나리오 작가로 참여했다는 점에서, <클래스>는 2008년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에 빛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모은다. 물론 이런 이유 때문에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한국 반대편에 있는 나라들의 영화지만 어쩜 그렇게 우리네 교육에 피가 되고 살이 될 만한 교훈을 남기는지, 그에 대해 한 번 써보고 싶었다.


<언 애듀케이션> 지나친 속박은 반발을 부른다

론 쉐르픽 감독의 <언 애듀케이션>은 교육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기보다는 17세 소녀의 성장담으로 우회한다. 때는 1961년. 제니(캘리 멀리건)의 목표는 옥스퍼드 대학 진학이다. 학교에서 공부도 잘해, 집에서는 부모의 지원도 적극적이어서 옥스퍼드 합격은 따 놓은 당상처럼 보인다. 연상남 데이빗(피터 사스가드)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비가 세차게 쏟아지던 어느 날, 비를 홀딱 맞으며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제니에게 생전 처음 보는 남자가 말을 건넨다. “차에 타지 않을래? 비싼 첼로가 비에 젖는 게 맘에 걸려서.” 이에 넘어가지 않을 여자가 있을까. 그 후로 공부는 뒷전, 제니는 자유로운 영혼과 문화적 안목을 지닌 데이빗과 가까운 사이로 발전하고 결국 연애를 넘어 결혼을 약속하는 사이가 된다. 

영화가 다루는 1961년의 영국은 비틀즈로 대변되는 영국의 팝 문화가 출현하기 전이다. 학교에서는 대학 진학을, 가정에서는 출세만을 지상 목표로 학생들을, 자식들을 속박해 들어가는 현실에서 영국의 청춘들은 별다른 해방구를 찾지 못했다. 쉬는 시간 몰래 담배를 피우거나 방문을 걸어 잠그고 프랑스에서 물 건너온 음반을 들으며 소박한 ‘일탈’을 맛 볼 뿐이다. 제니가 데이빗에게 반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또래의 남자친구와 달리 출세에 골몰하는 ‘범생이’과의 그렇고 그런(?) 남자가 아니다. 잘 빠진 브리스톨 스포츠카를 몰며 등장한 데이빗은 오페라와, 경마장과, 골동품과, 재즈의 신천지로 제니를 안내한다. 여기에 파리의 여행까지 추가되면 제니에게 옥스퍼드 입학은 무의미한 목표가 된다.

아닌 게 아니라, 극중 제니를 비롯해 영국의 학생들은 파리를 동경의 장소이자 탈출구로 삼는 발언을 수시로 한다. 미래에 대한 강박적인 고민 없이 사랑과 자유만으로도 미래가 보장될 것만 같은 낭만의 장소로 인식하는 까닭이다. 제니에게 데이빗은 장소로 치자면 프랑스 파리와 같은 품이었던 셈. 이게 괜한 시대 묘사인 것 같지는 않다. <언 애듀케이션>의 원안은 영국의 유명 저널리스트 린 바버가 어느 문학잡지에 실은, 자신의 첫 사랑을 회고하며 쓴 12페이지의 회고록이기 때문이다. 제니는 린 바버를 모델 삼은 캐릭터라 할 만한데 극중에서 그녀는 옥스퍼드에 합격만 하면 프랑스인처럼 자유롭게 살리라고 맹세한다.

<언 애듀케이션>은 제니의 그런 태도가 당시 영국의 교육환경이 좋은 대학 진학만을 지상 목표로 학생들의 자유를 박탈한 환경이 불러온 반발 심리라고 말한다. 제니의 반발 심리는 일탈을 부르고, 일탈은 판단을 흐리게 하며, 결국 마음 속 상처로 깊숙이 후벼 파고 만다. 그것이 단지 학생 당사자만의 문제일까, 그것은 교육 환경이 불러오는 필연적인 결과가 아닐까, 라는 것이 17세 소녀의 성장담 그 기저에서 흐르는 극중 ‘교육’(의 현실)이다. 물론 영화는 제니의 방황을 그 나이 대 학생들이 겪는 통과의례처럼 묘사하며 따뜻한 시선으로 끌어안는다. 다만 성장을 이루는데 있어 제니처럼 쓰디쓴 경험을 통과의례처럼 모두가 겪어야만 하는 것은 아닐 테다. 이를 미연에 방지해 좀 더 즐거운 학교생활을 보장하는 것은 교육의 의무다. 그러니까 여기서 방점은 교육이다. <언 애듀케이션>이 성장영화이면서 제목은 ‘교육’(An Education)으로 지은 이유가 여기 있는 것으로 보인다. 


<클래스> 선생과 학생 사이의 대화와 토론은 기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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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랑 캉테의 <클래스>는 <언 애듀케이션>과 달리 교육을 정면에서 응시한다. 프랑수아 베고도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클래스>는 프랑스의 학교라는 공간에서, 아니 교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가감 없이 담아낸다. 실제로 로랑 캉테는 <클래스>를 극영화가 아니라 그냥 실제인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우리가 소위 ‘다큐멘터리’라고 부르는 형식을 극영화에 적극 차용한다. 프랑스 이민자 자녀들이 많이 다니는 파리 20구의 한 중학교 교실을 무대로 삼았고 이 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을 모아 1년 동안 함께 그들의 생활을 카메라에 담았으며 원작자이자 10년 동안 교사생활을 한 프랑수아 베고도를 담임 역에 캐스팅했다.

영화 내내 학교를 벗어나지 않는 <클래스>의 주 무대인 교실은 다인종, 다문화로 이뤄진 프랑스 사회의 축소도에 다름 아니다. 선생은 가르치고 학생들은 배우지만 그런 기본적인 관계 속에서 바깥 사회에서 벌어지는 온갖 갈등이 교실에서도 벌어진다. 특정 상황을 묘사하는 예로 백인을 입에 담은 선생의 선택에 왜 흑인이나 아랍인이 아니냐고 따지는 해당 인종의 학생들부터 선생의 노골적인 학생 평가에 대해 거세게 항의하는 학생들, 그리고 끝내 여학생을 모욕하는 발언으로 궁지에 몰리는 남자선생까지, <클래스>가 보여주는 극중 교실의 일상은 선생과 학생, 백인과 흑인, 학생과 학생 등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관계의 갈등으로 시작해 갈등으로 마무리된다.

이를 통해 영화가 의도하는 바는 뭘까. 로랑 캉테는 데뷔작 <인력 자원부>부터 한결 같이  갈등의 최고조까지 묘사한 후 그 결과나, 결과가 초래한 이후 상황에 대해서는 결벽증에 가까울 만치 말을 아꼈다. <클래스>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는 뭔가 확 떨어지는 정답을 주지 않고 관객 각자의 몫으로 남긴다. 그것이 의도하는 바는 명확하다. 교육에 대한 질문 혹은 문제 제기를 할 테니 답은 관객이 구하라는 것. 그래서 이 영화에 대해서는 지극히 개인적인 답변이 필요한 것으로 보이는데 내가 <클래스>를 보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학교 내, 교실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평형 관계에서 선생이 학생들과 벌이는 대화와 토론이었다.

교실에서 벌어지는 선생과 학생 간의 신경전은 프랑스나 우리 한국이나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이에 대처하는 방식에는 실로 큰 차이가 존재한다. 한국의 교육 관계자 역시 날이면 날마다 대화와 토론의 장으로써의 교육 현장을 강조하지만 실제론 정치적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상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반면 <클래스>의 선생은 학생들의 강력한 항의로 구석에 몰리는 순간에도 결코 대화와 토론의 끈을 놓는 법이 없다. 그에겐 학생들이 일방적으로 가르치고 훈육하는 대상이 아니라 1:1의 동등한 인간관계다. 물론 영화도 이를 분명히 하는데, 대화와 토론과 설득과 소수 의견의 청취처럼 민주적인 방식이 반드시 선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프랑스 최고의 덕목인 톨레랑스를 체화할 것이고 또 한쪽의 누군가는 다인종, 다문화가 주는 문화적 소용돌이 속 스트레스를 이겨내지 못하고 학교를 떠날지도 모른다. 다만 결과 이전, 과정에서 이미 엉킨 실타래가 되어버린 한국의 교육을 경험한, 그리고 경험하고 있는 우리에게 <클래스>의 교육 환경이 시사 하는 바는 예사롭지 않다.


<언 애듀케이션> <클래스>에서 우리가 파악해야 할 것(들)

서두에서 밝혔듯 이 글은 영화에 대한 리뷰가 아니다. 두 영화의 작품성을 논하기 위해, 영화 전체를 해부하기 위해 쓴 글은 더더욱 아니다. 쓰던 버릇 때문인지 딱딱한 글이 되고 말았는데 <언 애듀케이션>과 <클래스>가 품고 있는 교육에 대한 어떤 지점의 묘사가 나름 이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교육 대혼란 – 연일 보도되는 교육 갱스터들의 소식, 사교육 열풍, 학생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지 않는 입시 위주의 학습 등등 -에 대해 어떤 시사점을 던져 준다고 판단했다.

한국 교육이 이 지경이 된 모든 원인의 꼭짓점에는 (주변 사람과의 동등한 관계를 전제해서 원만한 사회생활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경쟁을 통해 신분 상승과 출세 지향과 금전 지향 일변도로 학생들을 몰아붙이는 학습이 자리 잡고 있다. 수십, 수백만 학생의 목표가 하나로 수렴되는 교육 환경은 자유와 창조를 억압하고 규율과 규칙으로 빠져나갈 수 없는 울타리를 만든다. 우리 교육은 마치 학생들을 우리에 가둬두고 사육하는 인상을 준다. (<언 에듀케이션>이 보여주듯) 속박하는 교육은 반발을 부른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은 (<클래스>처럼) 선생과 학생 간의 동등한 관계 속에서 행해지는 대화와 토론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하지만 한국의 교육은 대화와 토론대신 은폐와 막무가내식 처벌로 지금의 입시 위주의 교육을 유지하려 한다.

<언 애듀케이션>의 론 쉐르픽 감독은 “이 영화에서 주인공 제니에게 격렬하게 일어나는 어떤 일이 그녀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나는 그녀가 영화에서 경험했던 것들을 너무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지 않았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씨네21> 745호 ‘비틀스 이전 영국 소녀의 성장기, 닉 혼비 각본의 <언 애듀케이션> 중 발췌) 나를 포함해 한국의 모든 이들은 입시라는 피 말리는 경쟁 구도 속에서 성장했고 그 속에서 뭔가 깨달음을 얻었으며 그 깨달음의 결과는 지금의 한국 사회라는 형태로 빚어졌다. <클래스>가 제대로 보여주듯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다. 더더군다나 <클래스>의 다인종 다문화 교실의 풍경은 한국에게 더 이상 낯선 것이 아니다. 

대화와 토론은 사회의 가장 기초적인 대화법이면서, 그렇기 때문에 가장 필요한 교육이다. <언 애듀케이션>과 <클래스>는 각각 15세와 12세 관람가이지만 오히려 더 많은 어른들이 먼저 관람하고 이를 아이들에게 추천했으면 하는 영화다. (마음 같아선 일방 소통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나라님께서 그 누구보다 먼저 보셨으면 좋겠다만 쇠귀에 경 읽기이려나.) 물론 <언 애듀케이션>과 <클래스>를 본다고 우리네 교육의 문제점이 바로 해결된다거나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에 앞서 사태를 파악하는 것도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언 애듀케이션>이 1961년을 배경으로 하면서 지금에 유효한 것도, <클래스>가 현상만 보여주면서 그에 대한 대답은 관객에게 넘기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내가 이 두 영화를 추천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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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일보
(201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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