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대통령이 될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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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결말을 밝히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광해, 왕이 된 남자>의 반응이 뜨겁다. 그만큼 잘 만들어졌다는 얘기다. 이는 영화의 만듦새가 뛰어나다는 의미도 되지만 한편으로 많은 이들이 보고자, 듣고자, 원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다뤘다는 얘기도 된다. 지금 우리사회의 화두는 100여일이 채 남지 않은 대선이다. 이와 연결해 <왕이 된 남자>를 보면 꽤 흥미로운 해석이 도출된다.

제목은 <광해, 왕이 된 남자>(이하 ‘<왕이 된 남자>’)이지만 이 영화는 폭군으로 인식된 광해를 개혁가로 재조명하는 영화가 아니다. 대선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지금 한국사회가 욕망하는 대통령의 조건이 무엇인지를 사극을 경유해 발언한다. 즉, 왕이 ‘될 만한’ 이에 대해 다루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제시하는 조건에 가장 가까운 왕, 아니 대통령감은 누구일까.

현실을 겨냥한 사극

<왕이 된 남자>는 광해군의 명으로 조선왕조실록에 실리지 않은 15일간의 행적에서 출발한다. 공란으로 남은 페이지를 작가적 상상력을 동원해 채워 넣은 것. 영화에 따르면, 그 15일 동안 광해(이병헌)는 왕위를 둘러싸고 대립하는 정적에 의해 독살 위기를 맞는다. 이에 허균(류승룡)은 이 사실을 비밀에 붙인 채 의식을 잃은 광해를 외딴 곳에 고이 숨겨놓는다. 대신 광해와 똑같이 생긴 광대 하선(이병헌 1인 2역)을 왕위에 앉히고 가짜 왕 노릇을 할 것을 명령한다.

조선의 역사라기보다 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의 내용에 더 가까운 <왕이 된 남자>는 역사적 사실이 별로 중요한 영화가 아니다. 원래 ‘팩션 faction’이란 게 그렇다. 최소한의 역사적 사실을 구실삼아 현실을 겨냥하는 장르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황조윤 작가도 그 의도를 숨기지 않는다. “현대극에서 할 수 있는 소재들은 다 차용이 됐기 때문에 공간과 소재는 옛것으로 하되, 해석되는 것은 현대의 것으로 한다.”

앞서 밝힌 바, <왕이 된 남자>가 의도하는 해석의 지점은 다름 아닌 차기 대통령의 조건이다. 실제로 추창민 감독은 “우리가 원하는 왕은 어떤 모습일까?”에 초점을 맞췄다고 의도를 밝혔다. 궁금한 건 우리가 원하는 대통령의 상(象)을 제시하기 위해 소환하는 과거의 왕이 왜 하필 광해이냐는 거다. 사실 우리에게 광해의 이미지는 ‘폭군’에 가깝지만 한편으로는 ‘개혁가’로 재평가하는 움직임 또한 활발하다. 아닌 게 아니라, 광해는 농지의 소유 여부에 따라 세금을 더 많이 내게 하는 대동법이나 명과 청나라 사이에서의 중립외교로 각각 개혁과 실리를 우선했던 왕으로 알려진다.

흥미로운 건 영화가 이를 다루는 방식이다. 정적들이 자신의 목숨을 노린다며 날로 신경이 예민해지는 진짜 왕을 난폭하게 묘사하는 반면 개혁을 추진한 장본인으로 광해의 탈(?)을 쓴 하선을 지목하는 것이다. 한국역사에서 광해처럼 극단적인 평가를 받는 리더의 사례는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바로 그 점이 광해에 대한 해석의 다양한 관점을 가능케 한다. 이렇게 <왕이 된 남자>는 광해의 양면성을 내세워 좋은 왕과 나쁜 왕의 실례를 흑과 백처럼 대비시킨다. 다만 이런 대비 효과는 우리가 대통령을 선출할 때마다 잡았던 평가의 기준과 유사한 방식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우리가 원하는 리더

돌이켜보면, 우리는 이전 대통령에게서 부재한 어떤 것을 채우기 위한 욕망을 작동시켜 차기 대통령을 선출해왔다. 야합과 권력 투쟁에 피로감을 느끼자 민주화를 위해 앞장 선 리더를 선택했고, 그럼에도 사회에 비상식이 만연하자 탈골될 상식을 바로 잡아줄 지도자에게 지지를 보냈으며, 경제가 휘청거리자 한 푼이라도 돈을 더 벌 수 있게 해줄 이에게 표를 몰아줬다. <왕이 된 남자>가 진짜 왕과 가짜 왕의 차이를 부각해 보여주는 이야기의 형식은 그런 우리의 욕망을 반영한 결과다.

이 같은 전제를 이해하고 <왕이 된 남자>를 보게 되면 지금 우리가 원하는 리더의 조건이 고스란히 은유되어 있다. 극 중 광해군 8년 왕위를 둘러싼 권력 다툼과 당쟁으로 정국이 혼란한 건 정치 공학적으로 함몰된 정치인들 때문이다. 즉, ‘하나를 주고 하나를 받아오는 것’을 정치라고 이해하는 이들에게 본인과 본인이 속한 집단의 안위가 중요할 뿐이지 민초들의 근심과 걱정은 관심거리도 아니다. 그게 꼭 광해군 8년에만 해당할까. 정치를 위한 정치가 만연하는 지금 역시도 고통을 감내하는 건 절대 다수의 못 가진 자들이다.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내줄 것도 없고, 그렇기 때문에 뭐 하나 변변히 누릴 수 없는 이들은 늘 정치에서 배제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왕이 된 남자>는 ‘사람을 위한 정치’가 절실하다고 항변한다. 그래서 <왕이 된 남자>는 등장인물의 매력, 즉 사람의 가치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쪽을 택한다. 그러니까 하선이 연기하는 광해의 주변에서 도움을 주는 측근은 대부분 우리 사회의 소수자를 대변한다. 예컨대, 고리대금업(지금의 사채)으로 가세가 기울어 15살 나이에 궁궐에 들어온 나인 사월(심은경)은 부모 대신 생활 전선에 뛰어든 어린 가장을, 조내관(장광)은 성소수자를 연상케 한다.

사람에 대한 정치라는 것은 결국 존중이다. 천민 출신인 하선이 비록 가짜 왕이지만 사람 대 사람으로 신하와 소통하다보니 어떻게 보면 직급이 위일 수 있는 조내관 같은 이가 비밀을 알면서도 충성을 바친다. 그에 맞춰 영화 역시 조내관에 대해 성기를 가지고 갑 싼 웃음을 끌어내는 대신 정체성에 대한 사연만 은근히 암시하며 사생활을 지켜주는 쪽을 택한다. 이게 다 함께 잘 살자는 정치의 원래 목적을 끄집어내기 위함인데 영화는 특히 사월이를 대하는 광해와 하선의 차이를 들어 우리가 원하는 리더의 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철수야 놀자?

사월은 일찍이 죽었을지도 모를 운명이었다. 광해의 수라상을 관리하던 중 팥죽에 독을 탔다는 혐의를 받고 모진 고초를 당하는 것이다. (이때 분에 못이긴 광해는 사월을 향해 마치 재떨이를 던지듯 놋그릇을 내동댕이친다.) 반면 하선은 그를 제거하기 위해 반대파가 풀어놓은 독을 대신 먹은 사월이 혼수상태에 빠지자 직접 그녀를 안아 어의에게 넘긴다. 그러면서 하선이 하는 말, “살아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야 한다.” 사월의 에피소드가 의도하는 바는 명약관화하다. 정치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이들에게 평등해야한다는 것.

하선이 왕위에서 행하는 일련의 지도력을 목격한 허균은 급기야 이렇게 권유하기에 이른다. “백성을 하늘처럼 섬기는 왕, 진정 그것이 그대가 꿈꾸는 왕이라면 진짜 왕이 되시던가.” 이 지점에서 우리가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건 극 중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현실에서 진행 중인 대선정국과 맞물려 들어가는 탓이다. 왜 아니겠는가. 차기 대통령으로 거론되는 새누리당의 박근혜(왕이 될 여자?)나 민주통합당의 문재인 같은 후보들은 각각 평등한 세상, 사람이 우선인 정치를 내세우며 서로가 유력한 대통령감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왕이 된 남자>가 지명하는 이는 따로 있는 듯 보인다.

하선은 광대다. 방점은 하선이 광대라는 사실보다 (광대는 흉내 낼 수 있는 특기를 지녔다는 점에서 착안된 직업으로 보인다.) 정치와는 거리가 먼 출신이라는 점에 있다. 사실 <왕이 된 남자>는 우리가 목격해 온 정치와는 전혀 다른 이상(理想)에 대해서 말한다. 여기에는 정치, 사회적으로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는 순진함이 묻어있다. 어디 영화뿐이랴. 지금 우리 사회는 때 묻지 않은 이상을 향한 순수함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높다. 허균의 권유 발언에 “왕이 되고 싶소이다”로 응답하는 하선을 보며 안철수를 떠올린 건 어디 나뿐일까.

안철수를 향한 우리의 욕망은 하나를 주고 하나를 얻는 거래로서의 정치에 피로감을 느낀 반작용의 결과다. 도덕적으로 검증된 삶을 살아온 안철수에게 우리는 권력을 이용해 자신의 배를 불리기보다 국민의 노예로써 인본주의를 행동에 옮길 이상적인 정치가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왕이 된 남자>가 안철수에 대한 영화라고 말하는 것은 비약에 가깝다.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추창민 감독은 자신의 영화가 정치적으로 해석되는 것을 경계한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왕이 된 남자>의 결말은 하선이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광해가 복귀함으로써 다소 모호한 형태를 취한다.

다만 이런 얘기는 할 수 있겠다. <왕이 된 남자>를 보며 안철수를 떠올리는 건 왜일까. 대선을 앞둔 지금 왕의 조건을 이야기하며 (그를 지지하건, 반대하건) 안철수를 도마에 올리는 건 그만큼 그가 대선과 관련한 가장 뜨거운 인물이라는 맥락에 맞닿아있다는 뜻이다. <왕이 된 남자>는 바로 그런 사회의 욕망을 건드린다. 이건 대통령이 누구인지를 맞추는 예측 게임이 아니다. 팩션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추창민 감독이 그린 ‘우리가 원하는 왕의 모습’을 간파하는 자야말로 대통령의 자리에 가까이 다가선 인물일 것이다.

movieweek
NO. 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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