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 카우리스마키, 사랑과 연대의 동화를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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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처음 본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는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1989)였다. 세상에, 영화를 이렇게도 만들 수 있나 하는 생각에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김무쓰’ 헤어스타일의 원조 격에 해당하는 캐릭터들, 안면을 싹 씻고 쏟아내는 코믹한 행동과 말들, 무엇보다 뉴욕이 배경이면서 화려한 스카이라인을 보여주는 대신 “온갖 쓰레기들이 다 집결하는 곳”이라는 독설과 함께 황량한 도시로 묘사하는 카메라의 시선은 영화가 재미 외에 또 다른 기능을 지닌 매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했다. 그러면서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작품을 블랙 코미디로 이해했는데 그의 영화를 보면 볼수록 현대의 동화 같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변하지 않는 스타일

<나는 살인청부업자를 고용했다>(1990)에는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세계관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회사에서 일방적으로 해고당한 앙리(장 피에르 레오가 연기했다!)는 자살 시도가 실패로 끝나자 전문킬러를 찾아가 그 자신을 살해해 달라고 청부한다. 돈을 주기에 이를 받아들이지만 황당한 요청에 청부업자들은 왜 스스로 목숨을 끊느냐며 앙리에게 이런 충고를 한다. “꽃도 있고 동물도 있는 이 세상이 아름답지 않나. 만약 죽는다면 이 시원한 맥주도 마실 수 없지 않은가.” 당연한 얘기지만 척 보기에도 선한 앙리에게 비열하게 살아온 이들이 아름다움 운운하며 세상을 논하는 광경은 충고의 주체가 바뀐 듯한 인상을 준다.

뭐, 어쩌겠는가. 그것이 지금 세상 돌아가는 이치다. 아니,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첫 장편영화 <죄와 벌 Crime and Punishment>(1982)을 발표하던 그때부터 세상은 이미 비정상적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힘없는 노동자들은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했고 박봉에 노동을 착취당했으며 그 결과, 일자리를 빼앗기거나 쫓겨나기 일쑤였다. 그래서 이들은 정착하지 못하고 늘 도망가듯이 어딘가로 떠나야만 했다. 이는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에서 거의 매번 볼 수 있는 설정으로 원형에 해당하는 이야기라고 할 만하다. <죄와 벌> <햄릿, 장사를 떠나다 Hamlet gets Business>(1987)는 고전을 현대적으로 각색했다는 점에서 좀 다를 수 있지만 배경을 현대 자본주의 사회로 옮겼을 뿐 블랙코미디의 면모는 여전한 것이다.

실제로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를 보면, 그의 스타일이 확립된 ‘프롤레타리아 삼부작’, 즉 <천국의 그림자>(1986) <아리엘>(1988) <성냥공장 소녀>(1990) 등의 초기작이나 가장 최근에 발표한 <르 아브르>(2011)나 그 모양새나 완성도에 있어서 변화라고 할 만한 것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스산하게 부는 바람 소리로 영화가 시작되면 무표정한 얼굴의 주인공들이 등장하고 그들의 반복적인 노동행위가 무력하게 묘사된다. 이에 더해, 극 중 공간은 외부이든, 내부이던 대기업의 사무실처럼 칸막이로 구획된 듯 차갑게 묘사되고 그와 같은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고통 받는 우리의 주인공들이 이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현대 자본주의의 비극이 펼쳐지는 장소가 헬싱키 공장지대(<성냥공장 소녀>), 런던 하층민 거주지(<나는 살인청부업자를 고용했다>), 르 아브르 항구(<르 아브르>) 등 공간을 달리 가져가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일까. 30년의 연출 기간 동안 변하지 않는 스타일을 두고 혹자는 뻔하다는 혹평을 내리기도 하지만 이는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가 반영하는 사회적 속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처사다. 그가 보여주는 일련의 스타일은 그 자신의 취향이라기보다 (물론 매 영화 밴드의 음악이 빠지지 않는다는 점은 예외다.) 그만큼 이 세상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황혼의 빛>(2006)의 극 중 대사를 빌리자면, “주말에 어디 놀러갈까? 파리나 로마…….”, “당신이 결정해, 어디든 다 똑같으니까.”

혁명의 순간

비극적 상황에 직면하고도 무심한 척 재치 있는 대사를 날리는 장면을 두고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에 대해 블랙 코미디라고 규정하는 부분일 터. 다만 이에서 그쳤다면 동어를 반복하는 그의 스타일이 30년 가까이 지지를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에는 코너에 몰린 주인공들이 자본주의 시스템에 균열을 가해 살 길을 모색하는 설정이 등장한다.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그런 영화 속 설정에 대해 ‘혁명’이라고 규정하고 싶어 하는 듯 하다. 실제로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에는 ‘혁명’이라고 소제목을 붙인 챕터가 등장한다.

고국에서 인정받지 못해 ‘온갖 쓰레기들이 집결하는’ 뉴욕에 온 브라스 밴드 레닌그라드 카우보이는 매일 같이 공연을 하지만 그에 걸맞은 보수를 받지 못한다. 하루에 한 끼 식사도 버거울 정도인데 알고 보니 함께 온 매니저가 공연비를 챙겨 자신의 배를 불려왔다는 사실을 눈치 채게 된다. 그러면서 밴드는 매니저를 자동차 뒷좌석에 포박하고 공연에 나서게 되니,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은 이를 혁명이라고 본다. 그러니까,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생각하는 혁명이란 사회 시스템을 교란하고 자본주의를 붕괴시키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일한 대가에 대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챙기든가 종국에는 살 길을 모색하는 것이야말로 소박할지언정 진정한 혁명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한 가지 전제가 따라 붙는다. 가난한 자, 노동하는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신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살인청부업자를 고용했다>에서 앙리를 살해하려는 킬러는 “신이 존재한다고 믿나?’라는 질문을 받는다. 그에 대한 킬러의 대답은 “그런 게 무슨 상관인가?”이다. <르 아브르>에서 신의 구원에 대한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견해는 부정(否定)을 넘어 거의 경멸하는 지경에까지 이를 정도로 과격해졌다. <르 아브르>는 아프리카에서 넘어온 난민 소년을 엄마가 있는 영국 런던으로 보내기 위해 지역 주민들이 돕는 이야기다. 그동안 성직자들은 예배당에 앉아 “신의 가호를”과 같은 기도나 읊어대고 있을 때 감독은 들을 가치도 없다는 양 가차 없이 뚝 편집해버리는 것이다.  

신의 영향력이 미비해진 세상, 말로만 구원을 바라고 심판을 외치는 성직자들의 태평함, 그렇기에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스스로가 신이 되어야 하고 구원을 구해야 하며 심판을 내려야 한다. 이를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혁명이라고 표현하는 것인데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처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의 영화에는 늘 혁명의 순간이라고 하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발표하는 작품마다 꽤 여러 가지 형태로 변주되고는 하는데 <성냥공장 소녀>의 이리스의 경우는 그중 가장 과격한 쪽이라고 할 만 하다.  
   
성냥공장에서 단순 공정 업무를 맡고 있는 이리스의 유일한 낙은 퇴근 후 바(bar)를 찾아 맥주를 마시면서 남자들에게 선택되어 함께 춤을 추는 것이다. 공장에서는 기계보다 못한 취급을 받아, 의붓아버지는 딸에게 생활비만 요구해, 이리스는 직장에서건 집에서건 사랑을 받지 못하니 술의 힘을 빌려서라도 사람의 온기를 느끼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이리스의 바람과 달리 남자는 하룻밤의 대가를 돈으로 지불하며 그녀를 떼어내려 한다. 유일한 희망마저 사라진 이리스는 결국 세상에 복수하기로 마음먹는다. 약국에서 쥐약을 주문하는 그녀. “이 약은 뭘 죽이는 데 사용하는 거죠?”, “쥐죠.” 결국 이리스는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무늬만 사람인 ‘쥐’들을 심판하는 것이다.

사랑과 연대

<성냥공장 소녀>에서는 좀 과격한 방식으로 묘사됐지만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바라는 혁명은 더욱 인간적인 형태다. ‘사랑’과 ‘연대’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기계화와 디지털화에 따른 차가워진 이 세상에서 그것이야 말로 사람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가장 따뜻한 형태라고 보기 때문이다. 다만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에 따르면, 사람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은 보이지 않는 창살처럼 하층민을 가두고 노동자를 압박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탈출하는 것이다.

예컨대, <황혼의 빛>의 사람 좋은 코이스티넨은 그 자신이 경비를 맡고 있는 회사의 보석을 훔치려고 접근한 미모의 여자에게 알면서도 계속 속아 넘어간다. 자신의 선한 의지로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만 자본주의에 완전히 종속된 ‘쥐’들을 교화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지 않았다면 변하지 않는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적 스타일이 지금까지 유효하지는 않았을 터이니 이 사회의 지배 시스템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다. 하여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를 보면 액자 속에서 마치 박제된 것처럼 바다 위를 항해하는 배의 그림이 종종 등장하고는 한다.

이 그림을 등장시켜 전하려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액자가 없어져야 그림 속 배가 앞으로 전진할 수 있듯 인간적 쓸모도 자본주의 시스템이라는 감옥을 탈출해야 비로소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가 있다. <아리엘>은 그와 같은 메시지를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낸 영화라고 할 만하다. 코이스티넨은 광부였지만 폐광이 된 이후 무직자 신세로 전락한다. 여기저기를 전전하던 중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지만 살인사건에 휘말리면서 그는 범죄자로 오인 받는다. 이에 코이스티넨은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예루살렘’을 의미하는 밀항선 아리엘을 타고 멕시코로의 탈출을 감행한다. 이때 이들의 탈출을 축복하듯 <오버 더 레인보우>가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온다.  

이처럼 무정부주의적인 태도로 일관하면서 사랑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화법은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1960) <미치광이 삐에로>(1965)와 같은 1960년대 영화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고다르처럼 비극적인 결말 대신 좀 더 희망적인 쪽으로 선회하는 이야기는 찰리 채플린의 작품과 같은 할리우드 고전영화의 따뜻함이 짙게 배어있기도 하다.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향한 유일한 저항선으로 사랑과 연대를 강조하듯 그 자신이 사랑하는 영화를 인용하고 차용함으로써 영화적 연대를 실천하기도 한다.

<나는 살인청부업자를 고용했다>의 앙리가 죽음을 결심한 후 꽃 파는 아가씨와 사랑에 빠져 삶에 대한 의지를 회복하는 설정은 찰리 채플린의 <시티 라이트>(1931)를 연상시킨다. <과거가 없는 남자>(2002)에서 기억상실에 걸린 남자가 온몸에 붕대가 휘감겨져 사망선고를 받은 후 갑자기 의식을 회복하는 장면은 제임스 훼일의 <프랑켄슈타인>(1931)에 대한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애정 표현이라 할 만하다. 그뿐인가, 프랑수아 트뤼포의 ‘앙투안 드와넬’ 연작의 장 피에르 레오를 <나는 살인청부업자를 고용했다>와 <르 아브르>에 캐스팅해 낭만이 사라진 시대를 풍자하기도,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에 단역으로 짐 자무쉬를 등장시켜 세계관을 공유하는 동료 감독에 대한 동지애를 과시하기도 한다.

그런데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보여주는 사랑과 연대의 메시지는 실현 가능성보다는 판타지에 더 가까운 것이 사실이다. <르 아브르>에서 난민 소년을 공권력의 감시로부터 구하기 위해 지역 주민들이 총동원되는 극 중 상황은 영화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종의 허구성이 강하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시침 뚝 떼고 그와 같은 설정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영화의 결말 앞에서 웃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하지만 한편으로 숙연해지는 이유는 법을 어겨가면서 못 가진 자들의 유토피아를 완성하는 극 중 상황이 과연 현실에서 가능할까 의문이 생기는 까닭이다.

동화란 게 그렇다. 사람의 마음을 끝내 움직이는 것은 현실에서 이뤄지기를 바라지만 웬만해서 실현 가능성이 미비한 사연을 동화라는 허구의 형태로 완성하기 때문이다. <성냥공장 소녀>의 이리스가 매일 저녁 바를 찾아 맺어지지 않을 남자를 머릿속에 그리며 기다리는 심정이랄까. 그 때문에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가 한계를 갖는다는 얘기가 아니다. 현실을 매정할 만큼 쌀쌀하게 묘사하는 그의 연출력을 두고 차갑다고 말하지만 그의 영화에 대한 합당한 평가로 보기 어렵다. 오히려 인간에 대한 애정을 전제하기에 우리가 사는 현실에 대해 더욱 엄격한 태도를 취한다. 노동자와 소수자에 적대적인 자본주의 시스템을 비판하면서도 가슴을 따뜻하게 만드는 것은 비록 동화의 형태일지언정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품고 있는 사람다움이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아키 카우리스마키 특별전
(2013.11.21~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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