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연기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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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이 한국문화를 먹여 살리는 건 이제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가요에서 시작된 아이돌 문화는 한류의 최전선에 위치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를 활용하려는 문화 각 분야의 쟁탈전(?)도 치열하다.

영화도 예외는 아니다. 이제 웬만한 한국영화 치고 아이돌이 등장하지 않으면 그게 오히려 생소해 보일만큼 당연한 것이 됐다. 한창 개봉 중인 <관능의 법칙>에는 극 후반부에 보아가 깜짝 등장해 또 하나의 재미를 선사했고 <수상한 그녀>에는 ‘B1A4’의 진영이 비중 있는 조연을 맡아 누나들의 눈을 즐겁게 해줬다. 또한 <조선미녀삼총사>에서는 ‘브라운 아이드 걸스’의 가인이 세 명의 주인공 중 한 명을 연기해 주연으로서 화려한 스크린 신고식을 마쳤다.

개봉을 앞두거나 촬영 중인 영화는 또 어떤가. <관능의 법칙>으로 연기 맛을 살짝 본 보아는 이정재, 신하균과 함께 <빅매치>를 준비 중에 있다. ‘f(x)’의 설리는 <해적: 바다로 간 산적>에 이어 <패션왕>에서 주원과 짝을 이룰 예정이고 ‘JYJ’의 박유천은 봉준호 감독이 제작자로 참여한 <해무>를 통해 스크린 데뷔한다. 그리고 아이돌 중에서도 연기 경험이 많은 축에 속하는 ‘빅뱅’의 탑(최승현, <포화속으로><동창생>)은 <타짜-신의 손>을 차기작으로 확정했다.  

아이돌을 경쟁적으로 캐스팅하는 이유는, 한국영화계의 입장으로 한정한다면 우선적으로 흥행에 어느 정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검증됐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변호인>에 출연해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인 ‘제국의 아이들’의 임시완은 아이돌 출신으로 최초 천만 관객을 동원한 배우의 타이틀을 획득했을 정도다. 또한 구정 연휴 동안 한국영화 삼파전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수상한 그녀>의 진영은 대중에게 자신의 이름을 확실하게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  

영화제작자나 아이돌 서로에게 윈윈 게임임이 증명된 상황에서 아이돌 캐스팅은 이제 그리 특별한 이슈는 아닌 셈이다. 확실히 작금의 아이돌 캐스팅은 전과 다르게 진화하는 양상을 보인다. 최종 목적은 흥행에 있다는 점에서 다를 바 없지만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 좀 더 ‘전략’적으로 이뤄지는 추세다. 과거의 아이돌 캐스팅이 젊은 관객을 겨냥한 단순한 ‘수’였다면 지금은 이들의 취향이나 성향은 물론 행동 패턴까지 예측한 캐스팅 전략을 선보이는 것이다.

이제는 천만 관객 영화 대열에 합류한 <변호인>이지만 언론 시사회 당시만 하더라도 흥행 여부는 차치하고 개봉관이나 제대로 잡을 수 있을지 걱정하는 기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제작사 측에서는 모티브만 얻었을 뿐이라고 애써 의미를 축소했지만 누가 보더라도 고(故)노무현에 대한 영화가 확실한 상황에서 정부의 눈치를 보는 대기업 계열의 멀티플렉스가 극장을 열어줄지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나는 임시완의 캐스팅이 일종의 신의 한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임시완이 맡은 역할은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며 체포된 후 모진 고문을 당하는 대학생이었다. 국가가 불온서적으로 지정한 책을 읽었다고 빨갱이로 매도되는 등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든 연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멋지게 소화해 <변호인>이 거둔 최고의 성과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영화를 연출한 양우석 감독은 임시완 캐스팅에 대해, 극 중 대학생과 같은 20대였고 부산 출신이라 부산 사투리를 완벽하게 구사했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밝혔다. 감독의 말이 순수하게 배역만을 염두에 둔 캐스팅 이유라면 마케팅적으로 접근할 때 임시완의 존재는 극 중 정치적 사건의 무거움을 경감하는 영화 외적 효과로 작용한다.

잘 알려졌듯 <변호인>은 ‘부림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고 다시는 발생해서는 안 되는 사건이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마케팅 했다가는 대중의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상당한 걸림돌로 작용했을 터다. 특히 정치라면 질색을 하는 젊은 세대를 끌어들이기 위해서라도 우회적인 마케팅은 필수였다. 그런 점에서 임시완의 캐스팅은 영화의 소재가 가져올 젊은 세대의 거부감을 상당 부분 줄이는 효과로 작용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애초 관객 타깃을 30~40대를 겨냥했던 것을 감안하면 10~20대 관객도 움직였기에 예상 밖의 천만도 가능했던 것이다.

이건 과장된 분석이 아니다. 극 중 주인공의 모델인 실제인물의 정치적인 좌표 때문에라도 <변호인>은 반대 진영으로부터 공격받을 가능성이 다분한 영화였다. 실제로 그와 같은 위험이 감지되자 가장 적극적으로 이 영화의 보호막 역할을 자처했던 것은 임시완의 팬들이었다. 일베 쪽의 공격이 개시될 움직임이 보이자 임시완의 팬으로 추정되는 이가 모 커뮤니티의 게시판에 남긴 글이다. ‘제국의 아이들 안티카페가 있기는 한데 일단 예방차원에서 즈려 밟을 필요가 있음. 임시완 덕분에 곧 일베 멀티가 될듯함. 일베 멀티는 생기는 족족 밟아야죠. <변호인> 꼭 봐라. 두 번 봐라.’

이런 게 바로 전략적인 아이돌 캐스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효과다. <변호인>은 비상식에 분노하고 이를 개선하려 노력하는 어른의 사례를 제시함으로써 젊은 세대에게 올바른 사회의식을 심어주려 노력한다. 이에 화답하듯 많은 젊은이들이 이 영화를 관람했고 또한 비상식에 맞서는 행동을 실천하기까지 했다. <변호인>은 천만 관객이라는 수치상의 성과 말고도 아이돌 캐스팅이 가져올 긍정적인 효과를 가장 극적으로 증명해 보였다. 이것이 한국영화계에 시사하는 바는 예사롭지 않다.

최근 한국영화의 경향 중 하나는 사회비판물의 급부상이다. TV의 뉴스, 시사물이 비판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서 영화가 이를 대신하는 추세다. 그래서 나온 용어가 다름 아닌 무비저널리즘이다. 문제는 이들 사회비판물의 비판 대상이 주로 국가권력이나 대기업이다 보니 멀티플렉스가 극장의 절대 다수를 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상영관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 가까운 예로 삼성반도체 노동자의 아픔을 그린 <또 하나의 약속>은 대기업에 부정적인 사연을 다뤘다는 이유로 상영관을 잡는 데 애를 먹었다.

그런 거대 권력에 맞설 수 있는 유력한 방법은 관객들이 뭉치는 것이다. 이때 가장 필요한 건 다수를 하나로 묶는 공통의 관심사인데 <변호인>의 예처럼 아이돌 캐스팅은 좋은 전략이 될 수 있다. <카트>라는 영화가 이에 해당하는 경우다. <카트>는 대형마트의 계약직 직원 들이 부당 해고를 당한 이후 이에 맞서는 사연이 전면에 나선다. 여기에 염정아, 문정희, 김영애, 김강우 등이 캐스팅됨으로써 다소 무거운 영화라는 인상을 주지만 ‘엑소’의 디오가 출연한다면? 이미 디오 등장분의 스틸컷이 공개되자 엑소 팬들은 넷 상에서 이를 퍼 나르는 데 여념이 없고 그런 효과 때문인지 관객 모금을 통한 제작비의 일부 조달도 예상보다 빠르게 목표치를 달성했다.

아이돌로서도 이와 같은 사회비판물의 출연은 별로 손해 볼 것이 없는 장사다. 한 번 터졌다하면 워낙 파급력이 센 게 영화이니만큼 인지도를 알린다는 면에서나 연기로의 재능 확장은 말할 필요도 없고 연기돌이라는 수식 외에 ‘개념돌’이라는 부가 가치의 이미지까지 획득할 수 있으니 배우 생활을 염두에 둔 아이돌의 입장에서는 전혀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단, 이 글이 정치적으로 오해받을 수 있거나 사회 쟁점화가 불 보듯 뻔한 영화의 안전핀 역할로 아이돌을 활용하자는 의도로 읽히지 않으면 좋겠다. 어디까지나 영화계가 어떻게 하면 아이돌을 전략적으로 활용할지, 또한 아이돌의 입장에서 활용 가치가 무한한 영화 쪽에서 어떻게 포지셔닝하는 게 유리할지 서로 윈윈할 수 가능성에 대해 모색하는 글이니까 말이다. 그런 맥락에서 난 최근 한국영화계에서 목격할 수 있는 중요한 변화 중의 하나가 바로 아이돌 연기의 진화라고 생각한다. 지난해 개봉했던 영화 중 <변호인>의 임시완과 더불어 주목해야 할 아이돌의 연기는 <배우는 배우다>에 출연한 ‘엠블랙’의 이준이었다.

대중이 아이돌에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대체적으로 모범생에 가깝다. 언제 어디서나 밝은 웃음을 잃지 않고 예의 바르며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친근한 인상을 주지만 한편으로 예측 불가능한 면이 없어 톡톡 쏘는 매력을 느끼기에는 아쉬운 면이 없지 않아 존재한다. 이준은 그런 이미지를 탈피한 최초의 사례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톱스타였다가 지저분한 사생활 때문에 몰락하는 배우 역할을 맡아 쌍욕을 서슴지 않고 전라의 베드신도 마다하지 않는 등 아이돌의 이미지를 역행하는 파격적인 연기를 선보인 것이다. 그리고 이준은 차기작인 <보톡스>에서 42세의 노처녀를 사랑하는 스무 살 학생이라는 또 한 번의 파격 캐릭터를 준비 중에 있다.  

아이돌은 확실히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문화다. 젊고 멋진 연예인에 대중이 열광하는 건 동서고금을 통틀어 공통적인 현상이지만 이를 등에 업고 문화 전 분야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건 한국이 유일하다. 그 때문에 아이돌의 폐해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끊임없이 이어지지만 이왕 한국의 지배적인 문화가 된 상황에서 이를 인정하고 좀 더 생산적인 쪽으로 활용하는 것이 더 현명해 보인다. 예컨대, <은밀하게 위대하게> <동창생> 등 ‘꽃미남 간첩물’로 명명된 첩보물의 등장은 비록 판타지이긴 해도 젊은 세대가 거부감 없이 북한 사람을 인간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지 않았던가.  
아이돌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긍정적인 문화 역량이라는 건 꽃미남 간첩물 같은 거다. 아이돌의 영향력을 활용해 얻을 수 있는 생산적인 효과는, 그래서 무궁무진하다. 아이돌 문화라는 금맥 앞에서 한국영화계는 단순한 흥행 효과를 넘어 좀 더 다양하고 긍정적인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아이돌 캐스팅의 전략을 고심 중에 있다.  

ARENA HOMME
2014년 3월호

2 thoughts on “아이돌 연기학”

  1. 나뭉님 오늘 글 잘 읽었습니다. 팬이예요 .^^

    오늘 글, 풀어내기 쉽지 않은 글인데, 정말 훌륭합니다.
    시간 많이 남으시면 정말 딴진공에 방송한번 하세요. 이런 소재 따로 손 볼거 없이 너무 좋아요. 바쁘시면 하는 수 없지만요. ^^

    허남웅닷컴도 이제 거의 1000꼭지에 다가가네요. 슬슬 미리 축하드리고요.

    허지웅정도는 근처도 못 올만큼 훌륭한 허남웅기자님 만세!

    1. 버디형 꾸준히 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 항상 좋은 말씀 해주셔서 감사해요. 그러게요, 벌써 1,000꼭지가 다 되어 가네요. 그럼 무슨 이벤트로 해야 할까요 ㅋㅋ 딴진공 방송은 제가 좀 힘들 것 같아요. 죄송해요 ㅜㅜ 저는 외곽에서 조용히 응원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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