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지위를 복권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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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탁구를 치는 시간이 늘었다. 운동을 좋아해 재밌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아버지와 함께 하니 그 시간만큼은 어느 때보다 소중하게 느껴진다.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아버지를 찾아뵙고 그때마다 2시간씩 치는 편인데 내 평생 이렇게 아버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눠봤나 싶다.

생각해보니 참 우연하게 이뤄진 자리였다. 자주 찾아뵙는다지만 별 대화도 없는 상황에서 집 앞에 탁구장이 생긴 걸 알게 됐고 무료한 시간도 죽일 겸 아버지를 모시고 탁구장을 찾은 것이다. 당신께서는 초등학교 이후 처음 쳐보는 탁구라고 하는데 생각보다는 꽤 실력이 괜찮으셨다. “탁구는 언제 배우신 거예요?” “초등학교 때 쳐보고는 처음인 것 같은데” “그럼 거의 60년 만에 처음 치시는 거잖아요?” “그렇지. 생각 외로 몸이 잘 반응을 하네” “이렇게 자주 쳐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그렇게 해서 시작된 아버지와의 탁구가 벌써 6개월째다. 서로의 실력에 감탄하기도, 각자의 장기를 서로에게 알려주기도, 상대방이 랠리를 맞추지 못하면 화를 내기도, 그러다가 다시 화해하기도 하며 그동안 꽤 많은 얘기를 나눈 셈이다. 몇몇 분들은 그런 부자(父子)의 광경이 생소하기도 그래서 부럽기도 하셨나보다. 관계가 어떻게 되냐는 둥, 부자가 어떻게 함께 탁구를 칠 수가 있냐는 둥 질문해 오시는 경우가 많다. 그 심정 충분히 이해가 간다. 나 또한 내가 아버지와 이렇게 살갑게 얼굴을 맞이하고 오랜 동안 탁구를 칠 줄은 몰랐으니까.
 
혹시 탁구장에 가보신 적이 있으신지. 내가 학교에 다닐 때만해도 또래 친구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분위기가 많이 바뀐 듯하다. 젊은 친구들은 극소수고 아버지, 어머니뻘 되는 어르신들이 대부분이라 사랑방 같은 분위기가 넘쳐난다. 그런데 어느 순간 보면 이들에게서 뭔가 부재한 감정이 감지된다. 어느 분께서 아버지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행복하시겠어요, 아들하고 탁구를 다 치시고. 제 아들 녀석이 저와 탁구를 쳐준다면 난 백 만원이라도 줄 수 있는데 말예요.”

대부분의 부자, 부녀 관계가 이럴 것이다. 실제로 내 주변에 아버지와 탁구를 친다는 얘기를 할라치면 반응들은 대개가 거기서 거기다. 그게 뭐 자랑이라고. 또는, 칠 사람이 없어서 아버지랑 탁구를 다 치냐. 혹은, 탁구 쳐드리면 아버지가 돈이라도 주냐. 나도 탁구를 치기 전까지는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해 못할 반응은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아버지의 존재를 부러 그렇게 무시하면서도 <아프니까 청춘이다>와 같은 어른의 위로에 목말라하는 지금의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말이다.

2008년이었을 거다. 미국에서는 코맥 매카시의 소설 <로드>가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오프라 윈프리가 자신의 토크쇼에서 이 책을 추천했고 스티븐 킹은 그해 최고의 소설이라며 입에 침이 튀도록 극찬했다. <로드>는 회색빛 폐허로 변한 지구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위험을 피해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동하는 단순한 여정이 내용의 전부다. 1시간 정도만 투자하면 다 읽을 수 있을 정도로 페이지가 많지는 않다. 비교적 짧은 분량에도 미국인들은 물론 전 세계 독자의 마음을 움직인 건 이 험한 세상 아무리 힘들더라도 자식만큼은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게 하여 희망의 불씨를 살리자는 아버지의 마음을 지구 멸망이라는 은유의 설정을 통해 절실히 전달하는 까닭이다.

개인적으로 우리의 청춘들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건 위로와 위안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법, 즉 생존법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갈수록 첨예해지는 경쟁 구도 속에서 상대방을 밟고 일어서는 약육강식의 생존이 아니라 그 어떤 위험과 시련이 닥칠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삶 그 자체를 긍정하고 희망 삼는 생존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삶의 진리를 깨닫기에 우리의 청춘들은 경험과 연륜의 폭이 현저히 부족하다. 아버지의 역할이 필요한 건 그래서다. 아버지들은 그 자신들의 삶을 지식삼아 자녀들이 아직 채우지 못한 인생의 우물에 조언과 같은 가르침의 형태로 물을 길어다줄 수 있는 존재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아버지의 역할은 무용에 가까워진 지 오래다. 사회적 모범을 보여야 하는 지도층의 아버지들은 뭔 욕심이 그렇게 많은지 자신들의 배만 불리느라 아예 소통은 뒷전이고 보통의 아버지들은 개발 시대를 거치면서 ‘잘 살아보세’ 오로지 부만 좇았던 까닭에 대화하는 법 자체를 익히지 못했다. 기러기 아빠들의 예에서 보듯 많은 수의 우리의 아버지들은 자녀들의 학업을 위한 돈벌이 기계로 전락하고 말았다. 응당 있어야 할 위치에서 부재하다보니 대화는 실종되었고 자식들은 아버지의 존재를 지우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다시 나의 탁구장 얘기로 돌아가 볼까. 탁구장을 방문하는 아버지들 중 몇몇은 자신들의 가족들 사이에서 앉을 자리를 찾지 못한 경우다. 저녁식사 시간이 끝나갈 즘이면 탁구장은 하나둘 아버지들로 탁구 테이블이 채워지는데 집에서 겪은 소외감과 외로움을 그 자리에 모인 또래들과의 운동과 대화로 해소하려는 이들이 꽤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탁구장에 젊은 친구가 찾기라도 하면 집에서와는 다르게 먼저 말을 걸며 관심을 보인다. 그리고 탁구라는 공동 관심사가 있어서인지 의외로 말도 잘 통하고 쉽게 공감대가 형성되고는 한다.

사실 탁구를 치며 나누는 대화란 별 다른 것이 없다. “탁구 잘 치네요?” “그냥 치는 정도죠. 아저씨야말로 잘 치시는데요?” “탁구장에 나와서 꾸준히 치다보니 실력이 늡디다.” “언제부터 치신 거예요?” “계속 나오실 거죠?” 이런 식이다. 아버지와 나 사이의 탁구장에서의 대화도 그렇다. 별 게 없다. 그런데 별 게 없는 가운데서도 똑딱 똑딱 공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으면 어느 순간 묵직하게 다가오는 무언가가 있다. 아버지가 탁구대 반대편 그 자리에 계신 것만으로도 많은 걸 느끼게 하는 것이다.

올해 아버지의 연세는 71세이신데 작은 공을 따라 노구를 움직여 탁구라켓을 휘두르시는 모습을 보면 일단은 마음이 짠하다. 그러다가도 나도 저런 아버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어디 나의 아버지에게서만 느끼는 걸까. 탁구장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아버지들에게서 똑같은 감정과 감동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격렬한(?) 게임을 마친 후 이들과 시원한 음료수를 마시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보면 우리 아버지들과 자식들 간에는 그동안 참 말이 없었구나 아쉬움이 드는 한편으로 이렇게 한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한 느낌을 갖게 된다.

조언이라고 표현을 했지만 그와 같은 도움말은 꼭 아버지가 직접 입으로 전해야 알아들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얼마 전 <올 이즈 로스트>라는 제목의 영화가 작은 규모로 개봉한 적이 있었다. 왕년의 할리우드 스타 로버트 레드포드가 출연해 이목을 끌었는데 그를 제외하고는 이 영화에 나오는 이가 단 한 명도 없다. 대신 영화는 요트를 끌고 나왔다가 불의의 사고로 전복을 당해 나 홀로 거친 풍랑에 맞서는 극 중 로버트 레드포드의 수난에 상영시간 전부를 할애한다.

운이 없게 부유하던 컨테이너와 부딪혀 요트가 전복되고 그 안으로 물이 새 통신장치가 먹통이 된다. 때 맞춰 불어 닥친 폭풍우와 거대한 파도, 요트를 버리고 비상용 보트에 몸을 싣지만 배안으로 물이 새고 또 그 주변으로 상어가 득시건 거리니 밖으로 탈출하기도 요원하다. 그래도 이 남자는 구조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채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갖은 수를 동원한다. ‘모든 걸 다 잃더라도(all is lost) 삶을 포기하지 마라!’ 그 자체로 감동적이지만 더욱 심금을 울리는 건 극 중 사투를 펼치는 로버트 레드포드(1936년생)가 77세의 어른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레드포드는 단 한 마디 말도 없이 행동으로써 어른의 존재감, 즉 이 시대가 요구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영화로 한정지어서 말하자면, 경향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최근 들어 방황하는 아버지에게 제 자리를 찾아주고 그럼으로써 존재를 긍정하는 작품들이 심심찮게 등장하는 추세다. 앞서 예로 든 <로드>나 <올 이즈 로스트> 외에도 자식을 소유물이 아니라 서로 살을 부비고 사는 인격체로 인정하는 한 아버지의 깨달음을 그리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도 이에 포함시킬 만하다. 전 세계적으로 갈수록 살기가 척박해지는 상황에서 우선적으로 아버지의 자리를 복권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점점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아버지의 자리를 마련하고 그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꼭 아버지를 위한 것만은 아니다. 가족구성원 각자가, 그리고 사회구성원 모두가 제 자리를 지킬 때 세상은 잘 굴러가는 법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세대가 분열되어 서로 반목하고 갈등하는 불통의 양상을 보인다. 그러다보니 청춘들은 그들의 고민과 불안을 누군가에게 호소할 길이 없어 점점 개인으로 고립되고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제 역할을 하지 못해 인정을 받지 못하니 자식세대들을 마뜩찮게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아버지의 자리를 찾아주는 것이 중요하다. 아버지의 조언이 ‘꼰대’의 잔소리로 들리지 않고 소통으로 이해될 때 이 사회는 좀 더 건강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toon 허남준

arena homme
2014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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