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뉴 시네마가 소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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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시대는 새로운 영화(의 사조)가 꽃을 필 수 있는 좋은 토양이 되었다. 세계 2차 대전 이후 사회, 문화적으로 피폐했던 이탈리아에서는 ‘네오리얼리즘’이 태동했고, 타락한 부르주아의 도덕성이나 안이한 사회 시스템의 반발로 생긴 프랑스의 68혁명은 ‘누벨바그’를 불렀다. 또한 명분 없는 전쟁으로 무고한 희생자를 낳았던 1960년대 후반의 미국에서는 기성세대와 공권력을 조롱하고 공격하는 ‘아메리칸 뉴 시네마’가 탄생해 큰 파장을 일으켰다.

세계 영화사의 굵직한 사조가 출현했던 당대의 시대적 배경과 비교해 지금 현재의 상황도 만만치 않다. 99%를 지배하는 1%의 탐욕이 금융 대위기로 나타나면서 세계 경제의 근간이 흔들리는 가운데 노동자들은 가족을 부양할 돈이 없어, 젊은이들은 일 할 직장이 없어, 서민들은 살 집이 없어 거리로 내몰리고 있는 실정이다. 과거의 경우를 감안하면, 세계 곳곳에서 들불처럼 번지는 대규모의 결핍이 예술적으로 승화될 때 이전의 패러다임을 흔드는 ‘뉴웨이브’가 몰려올 가능성이 높은데 영화계에서는 아직 구체적인 기운이 목격되지는 않는다.

과감한 시도보다 안전한 수익 보장을 지향하는 현재의 상업영화 시스템이 견고한 담을 두르고 있어 쉬워 보이지 않지만 그런 시도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 시도라기보다는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정도가 더 맞는 표현일 듯하다. 몇몇 할리우드 영화가 아메리칸 뉴 시네마를 소환해 현실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애스게르 레스 감독의 <맨 온 렛지>(2012)와 앤드류 니콜 감독의 <인 타임>(2011)이다. 개봉과 함께 관객의 기억에서 사라질법한 그렇고 그런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인데 아메리칸 뉴 시네마와 연관 지으면 꽤 흥미롭게 읽히는 것도 사실이다.

<캐시디 온 렛지>? <인 보니 앤 클라이드>?

<맨 온 렛지>는 루스벨트 호텔 23층의 난간에서 시위를 벌이는 한 남자(샘 워딩턴)의 사연을 다룬다. 생활고를 비관해 자살하려는 것 같지만 실은 억울한 심정을 밝히기 위해서다. 전직 경찰 출신의 그는 어느 기업의 귀한 다이아몬드를 호송하던 중 이를 훔쳤다는 누명을 쓴 후 25년 형을 선고 받았다가 탈옥을 감행했다. 문제는 기업과 공권력의 유착이 견고하다보니 누명을 벗기가 쉽지 않다는 것. 그럴 때 방법은 하나! 강탈과 같은 불법으로 다이아몬드를 찾아 무죄를 증명하는 수밖에 없다. 하여 난간에 올라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한 편으로 동생(제이미 벨)이 아수라장을 이용해 문제의 기업에서 사라진 다이아몬드를 찾기에 이른다.

즉, <맨 온 렛지>는 인질극과 강탈극을 접목한 크로스오버 장르물이다. 장르간의 이종교배야 그다지 새롭진 않지만 이 둘의 접합을 위해 소환하는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정서를 운용하는 이야기 방식은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난간 위의 남자 때문에 도로가 폐쇄되고 보행이 통제되자 쿨한 뉴요커들은 왜 빨리 뛰어내리지 않느냐며 냉소를 퍼붓는다. 하지만 추악한 금융기업의 희생자로 언론이 여론을 형성하면서 사람들은 그와 동생의 범죄(?)를 향해 환호하기 시작한다. 범죄자에 환호하고 공권력에 야유하는 일련의 광경은 아메리칸 뉴 시네마를 대표했던 아서 펜 감독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Bonnie and Clyde>(1967)와 조지 로이 힐 감독의 <내일을 향해 쏴라 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1969)와 같은 작품을 연상시킨다.

실제로 <맨 온 렛지>의 그의 이름은 닉 캐시디다. <내일을 향해 쏴라>에서 폴 뉴먼이 연기한 부치 캐시디의 성()과 같다. 캐시디라는 성을 공유하는 아버지(윌리엄 새들러)도 아들이 누명을 벗는 것에 한 몫 하는데 공교롭게도 이를 연기한 배우는 <내일을 향해 쏴라>에서 선댄스 키드로 등장했던 로버트 레드포드와 무척이나 닮았다. 그럼 애스게르 레스 감독은 왜 <맨 온 렛지>를 <내일을 향해 쏴라>와 한 핏줄로 연결하려는 걸까? 은행털이범 부치와 선댄스는 선량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공권력을 괴롭히길 즐겼던 일종의 양심적인 악당이었다. 조지 로이 힐은 이와 같은 의도적 설정을 통해 수많은 젊은이들을 베트남에 파병, 사지로 몰아넣었던 당시 미국 정부의 도덕적 해이를 비판했다.

지금은 어떤가. 대표적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연일 월가에 모여 금융기관의 탐욕을 규탄하고 있지만 미국 정부는 시위대를 저지하느라 급급할 뿐 사태를 바로잡지 못하고 있다. 안 그래도 <맨 온 렛지>의 주요 배경인 루스벨트 호텔은 월가가 자리한 뉴욕의 맨해튼에 위치하고 있다. 난간 위의 닉 캐시디를 구경하기 위해 모여든 일군의 사람들은 월가의 탐욕에 항의하는 작금의 시위대를 떠올리게 한다. 이렇게 <맨 온 렛지>가 은유의 방식으로 현실에 발언을 한다면 앤드류 니콜의 <인 타임>은 좀 더 직접적으로 월가를 겨냥한다. <인 타임>의 윌(저스틴 팀버레이크)과 실비아(아만다 사이프리드)는 현대판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의 보니와 클라이드다.

시간이 화폐인 시대, 고로 돈으로 거래되는 인간의 수명. 부자들은 영생을 누릴 수 있게 된 반면 하루 노동으로 하루를 버티는 빈자들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마지막 수단으로 은행털이에 나선다. 그 선두에 선 인물이 바로 윌. 부조리한 시스템에 대해 각성한 윌은 대기업의 딸 실비아를 인질 삼아 교화(?)시킨 후 함께 은행 강도가 되어 현상수배에 오르고 훔친 시간을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시간을 거래하는 미래 배경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인 타임>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의 재래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요컨대, 보니(페이 더너웨이)와 클라이드(워렌 비티)에게 자식이 있었다면 윌 같은 인물로 성장하지 않았을까. 아닌 게 아니라, 앤드류 니콜 감독은 윌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실명을 밝히지 않은 채 의적이었다는 사실만을 영화 내내 상기시키는데 그 의도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에 이어져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과거의 영광을 꿈꾸다?

사회 지도층의 입장과 입맛에 따라 맞춤형으로 전락한 법과 정의, 그에 발맞춰 박스오피스의 수치로 영화적 가치가 변모한 이때, <맨 온 렛지>와 <인 타임>은 정면으로 부딪히기보다 우회하는 방식으로 사회에 대해 발언한다. 이와 같은 은근한 화법의 방식은 최근 할리우드에서 두드러진 경향 중 하나다. 올 여름 시장의 최고 기대작인 <다크 나이트 라이즈>가 월스트리트에서의 폭동 장면을 주요하게 다룰 것으로 알려졌고 (배트맨이야말로 의적을 대표하는 아이콘이 아니었던가!)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의 경우, “보다 현실적인 스파이더맨 영화”라고 강조한 마크 웹 감독의 말을 단서 삼는다면 현실에 저당 잡혀 미래를 꿈꾸지 못하는 미국 젊은이들 이야기가 될 것으로 강하게 추측된다. (아르바이트 때문에 학업에 충실하지 못하고 집세를 내지 못해 쫓겨날 위기에 처한 <스파이더맨2>(2004)의 피터 파커는 정확히 미국의 88만원 세대가 아니었던가!)

결핍의 시대가 새로운 영화를 부른다는 서두에서의 언급은 사실 지금 이 시대의 관점에서 보자면 향수할만한 과거의 낭만처럼 느껴진다. 네오리얼리즘, 누벨바그, 아메리칸 뉴 시네마가 발현했던 각각의 시기는 적어도 영화가 관객을 선도하는 풍토가 강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관객의 취향이 (그리고 이를 방패삼은 제작사가) 영화에 대한 투자와 이야기를 결정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영화적 운동이 세계 영화사를 뒤흔들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게 느껴진다. 이와 같은 시스템의 견고함 속에서 그나마 빈틈처럼 활용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라면 창작자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와 정서를 하위 플롯에 숨겨놓고 운용하는 것이다. <맨 온 렛지>와 <인 타임>이 아메리칸 뉴 시네마를 소환하는 방식은 보수적인 할리우드 시스템 하에서 저항하고픈 창작자들의 고민을 잘 보여준다.

이는 바꿔 말해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고픈 이들의 욕망이기도 하다. <맨 온 렛지>와 <인 타임>의 사례 외에도 1920년대의 무성 영화를 도입한 <아티스트>(2011), 존 포드의 수정주의 서부극으로 돌아간 <워호스>(2011), 마릴린 먼로를 부환시킨 <마릴린 먼로와 함께한 일주일>(2011), 가족 영화를 빙자(?)해 조르주 멜리아스에게 애정으 고백하는 <휴고>(2012) 등은 하나같이 가장 화려했던 과거 영화사의 유산을 자신들의 작품에 적극 끌어들인다. 이것이 과연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현대 영화가 취하고 있지 못한 ‘어떤’ 허기에 대한 반증이 아닐까. 다만 이것이 과거로의 퇴행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현재 영화와 고전 영화의 만남 속에서 새로움에 대한 모색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맨 온 렛지>와 <인 타임>은 그런 모색의 한 과정 속에 있는 작품인지도 모르겠다.

월간 CINEMA THEQUE사용자 삽입 이미지
2012년 3월호

2 thoughts on “아메리칸 뉴 시네마가 소환됐다”

  1. 소식지를 여기서 먼저 보네요 ㅠ ㅋㅋ 저는 한때 게으르고 무식한 고전영화 애호가였어서 할리우드 영화를 좀 등한시하다가 요즘에서야 할리우드 영화 정말 우습게 볼 거 아니다 그러고 있었는데, 마침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다음 호에도 좋은 글 써주세요. ^^

    1. 소식지 아직도 안 나왔나요? 우와, 위에 글 넘긴 지가 2주가 넘는데 역시! 누구 때문인 거죠? ㅋㅋ 할리우드 영화 정말 최고죠. 오락 영화에도 정치적인 메시지가 숨겨져 있는데 한국 영화는 이런 걸 배워야 해요. 근데 다음 호도 써도 되는 건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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