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Arirang)

사용자 삽입 이미지
<비몽>(2008) 개봉 2년쯤 지났을까. 김기덕 감독이 외진 산골에 처박혀 직접 집을 짓고 있다는 소문이 영화기자들 사이에서 파다했다. 그 즈음, 그가 키운 장훈 감독(과 송명철 프로듀서)의 배신으로 폐인처럼 살고 있다는 기사가 각종 포털 사이트의 대문을 장식하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기덕의 열여섯 번째 영화 <아리랑>이 칸영화제에 초청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하지만 칸 현지에서 전해지는 국내 언론의 <아리랑> 관련 기사는 영화와는 별 상관없는 속보성 가십 기사라는 인상이 짙었다. ‘”장훈은 기회주의자” 폭로 파문’, ‘”개xx” 원색적 韓 영화계 비판 파문’, ‘영화 <비몽> 촬영 중 이나영 죽을 뻔 고백’, 모 신문의 논설위원이라는 사람은 <아리랑>을 두고 ‘위험한 복수’라며 문화․예술로 복수를 감행하는 김기덕의 행보가 섬뜩하게 다가온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다 헛소리다.

<아리랑>은 한국영화계를 표적삼은 비판의 영화가 아니다. 김기덕의 처절한 자기고백이자 <비몽> 이후 3년 동안 영화를 만들고 있지 못한 자신을 향해 자기쇄신을 강력히 요구하는 영화, 혹은 셀프카메라다. 김기덕은 디지털 카메라를 세워두고 그 앞에서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아리랑>은 연출과 촬영과 배우와 편집을 모두 김기덕이 담당한, 말하자면 원맨 시스템 영화다.) 그 모양새는 흡사 거울을 바라보며 자신을 점검하는 태도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이 영화에서만큼은 뭔가를 숨기거나 꾸미고 싶은 마음이 한 톨도 없어 보인다. 그런 의도는 <아리랑>을 만들 당시 그가 가지고 있던 패(?)를 영화 시작과 함께 벌거벗듯 공개하는 태도에서 어렵지 않게 파악된다. 인가가 드문 산 어귀에 직접 집을 짓고, 땔감이 없으면 난방이 힘든 집 안에 텐트를 쳐놓은 후, 물이 나오지 않아 쌓인 눈으로 물을 대신해 밥을 해먹는 야인의 생활이 전시되듯 펼쳐지는 것이다.

세계적 명성의 감독이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게 됐을까. 오랫동안 김기덕의 신작을 기다리던 팬들의 의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감독 본인이 먼저 해결해야할 문제였다. 해결이 쉽지 않았던 것은 그를 괴롭히는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탓이었다. <비몽> 촬영현장에서의 여배우의 사고, 제자와의 갈등, 메이저 배급사의 횡포, 기타 등등. 영화 만들기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품게 된 김기덕은 영화판과 연을 끊고 강원도 산골에서 칩거하기에 이른 것이다. 지속되는 무기력과 침체의 꼬인 끈을 풀기 위해 <아리랑>에서 김기덕은 (영화의 상상 선을 이용해) 여러 명의 김기덕으로 자아 분열한다. 질문하는 김기덕과 답변하는 김기덕, 냉소하는 김기덕과 고통에 찬 김기덕, 꾸짖는 김기덕과 울부짖는 김기덕, 화면 속의 이들을 지켜보는 제3의 김기덕까지.  

이 분열적 양상은 또 다른 창작의 영역으로 넘어가기 위한 김기덕의 이전 열다섯 편의 영화와 이를 둘러싼 평가와 환경에 대한 허물벗기처럼 비친다. 이 말은 필모그래프에서 전작과 관련한 모든 것을 지우겠다는 김기덕의 비극적 결단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의 영화적 세계로 나아가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이해해야 타당하다. 실제로 김기덕은 극 중에서 <비몽> 당시의 사고를 두고, 죽음이란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는 신비의 문인 줄 알았지만 흰색이 검은색이 되는 무(無)의 세계였다며 얼굴을 파묻고 괴로워한다. 또 다른 깨달음을 얻게 된 그 지점에서 김기덕에게는 무로 화한 뒤 새롭게 출발할 계기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계기는 <아리랑>에서 보듯 솔직하고 고통스럽고 처절한 자기 고백을 통한 내려놓기에 있다.

이때 김기덕의 심정이란 일종의 한(恨)에 가깝다. (이 영화의 제목이 <아리랑>인 이유 중 하나!) 영화감독이 되기 전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받았던 인간적인 수모, 세계적인 영화감독이 되고 나서도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좌절 등 이를 떨치지 않고서는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김기덕에게는 그래서 극 중 상징적인 죽음, 즉 자살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강조하지만 한국영화계가 아닌 김기덕 그 자신에게로 향하는 총구인 것이다. 그 자살은 유용했던 것일까. 그 다음 순간 김기덕이 <아리랑>으로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의 상을 수상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그는 수많은 관객 앞에서 수상 소감 대신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아리랑을 부르며 미소를 짓는다. 이는 마치 성공적인 새 출발을 자평하는 제스처로 해석된다.

물론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김기덕은 <아리랑> 말고도 벌써 열 일곱 번째 영화 <아멘>을 완성했다. <아멘>은 김기덕이 칸에 초청된 이후 유럽 각지를 돌며 촬영한 작품으로 남자친구를 찾으려는 한국 소녀의 미스터리한 여행기로 알려진다. 짧은 줄거리를 제외하면 알려진 정보는 없지만 이전과는 다른 김기덕의 영화가 될 것임은 확실하다. <아리랑> 이후 김기덕은 새로운 출발점에서 ‘이미’ 달리기 시작했다.

KBS저널
2011년 10월호

4 thoughts on “<아리랑>(Arirang)”

  1. 오. < 아리랑> 보고 싶어졌어요. 전 이 영화를 봐야겠어요.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 아리랑> 지금으로선 볼 수 있는 기회가 드물어서 아쉬워요.

  2. 유튜브에 영화가 통째로 올라와 있어서 깜짝 놀랐는데요, 이렇게 보는건 아니다 싶어서 말았죠. 정말 곧 개봉하겠죠…? 부산에서 아멘.도 보고싶었는데 히잉… 저도 글 잘 읽었습니다~

    1. 대단하네요, 어떻게 극장 개봉도 안 한 영화가 유튜브에 올라가 있는 거죠 컥! 디케님은 클린 관객이십니다 ^^b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