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씬 시티 2> 프랭크 밀러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할리우드의 황금기로 불리던 1950~60년대에는 영화의 제목 앞에 감독의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감독의 유명세를 상업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였는데 알프레드 히치콕의 경우, ‘알프레드 히치콕의 <현기증>’으로 표기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지금은 그런 식의 표기가 거의 없어졌지만, 창작자가 일종의 브랜드처럼 기능하는 경우, 이례적으로 제목 앞에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프랭크 밀러가 그중 한 명이다. 그는 영화를 연출한 적도 있고 각본도 썼으며 직접 단역으로 출연도 하지만 그 이전 그래픽 노블의 작가로 더 유명하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영화로 옮겨졌을 정도로 탁월한 이야기를 뽐낸다. 하지만 밀러가 할리우드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은 상당 부분 시각적인 면에서 기인한다.

그래픽 노블 계의 거장

프랭크 밀러는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펼치지만, 최고 전성기는 1970년대부터 80년대까지였다. 마블 코믹스에서 경력을 시작한 그는 <데어 데블>에 작화가로 참여 후 스토리까지 맡으면서 오랜 연재 동안 이름을 날렸다. 특히 매력적인 여자 암살 캐릭터 ‘엘렉트라’를 창조하고 이의 스핀 오프를 제작하면서 작가로서의 역량을 인정받았다. 슈퍼히어로물을 다루되 주인공이 품고 있는 마음속 어둠에 더욱 주목하는 한편으로 반(反)영웅 적이고 비주류적인 면모를 부각하는 이야기가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이다.

그와 같은 프랭크 밀러의 특징이 대폭발한 작품은 DC코믹스로 옮기면서 1986년에 발표한 <다크 나이트 리턴즈>였다. 이 작품에서 묘사되는 브루스 웨인은 배트맨 활동을 접은 지 10년, 이제는 60대가 되어 의욕만큼 따르지 않는 노쇠한 신체로 예전 같은 압도적인 힘을 발휘하지는 못한다. 더욱이 배트맨의 출현이 그에 상응하는 악당들을 불러내고 자경단을 양산해 오히려 도시에 혼란을 부추긴다는 설정은 슈퍼히어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며 그래픽 노블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영웅의 마음속 어두운 우물을 파고드는 접근 방식은 <로닌>에서 이미 구축된 프랭크 밀러 특유의 세계관이었다. 21세기 뉴욕에서 부활한 13세기 사무라이라는 설정이 눈길을 끄는 <로닌>은 사무라이의 덕목을 극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물론 800년 동안 간직했던 복수심이 일으킨 대혼란을 극적인 배경으로 삼는다. 주군을 잃은 후 실추된 명예를 되찾은 주인공 로닌이 자결로 생을 마감하는 결말은 반영웅 미학의 극치를 선사하며 주인공이 품고 있던 장시간의 복수심은 이 세계가 끝나지 않는 혼란 속에 지탱되고 있음을 은유한다.

결국, 프랭크 밀러의 세계에서 비주류의 반영웅을 만드는 것은 주변 환경이다. 안 그래도, 프랭크 밀러는 작품 속 세계가 왜 이렇게 어둡고 비관적이며 타락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나는 그와 같은 세계에서 태어나 자랐고 지금도 살고 있다. 이 세계가 ‘씬 시티’와 다를 바가 없다. 나는 어릴 적부터 이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상상하고 그림을 그리고는 했다.” <다크 나이트 리턴즈> 이후 밀러가 작업한 <배트맨 이어 원>은 어린 시절 부모를 잃은 브루스 웨인이 집 앞 동굴에 빠져 어둠의 세계와 맞닥뜨린 후 박쥐로 상징되는 공포를 이겨내고 배트맨이 되어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브루스 웨인이 목격하고 공포를 느낀 어둠은 곧 프랭크 밀러가 어릴 적부터 겪었던 경험에서 파생된 것이었다.

할리우드가 사랑한 작가

그래픽 노블 계에서 프랭크 밀러의 명성이 높아지자 할리우드는 자연스럽게 그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밀러의 입장에서 마다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 그의 작품에 바탕을 이루는 것은 할리우드 영화를 비롯한 각종 팝 문화였기 때문에 경험을 쌓을 좋을 기회라고 생각했다. 예컨대, 그의 작품에서 일관되게 목격되는 남성적이면서 선이 굵은 필름 느와르적 필체는 대실 해밋, 레이먼드 챈들러, 미키 스필레인 등의 하드보일드 소설을 읽고 이를 원작으로 한 영화들을 보면서 체화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공식적인 첫 번째 할리우드에서의 작품은 그래픽 노블을 영화화한 것이 아니었다. 프랭크 밀러 본인이 직접 참여한 <로보캅2>와 <로보캅3>의 각본이었다. 프랭크 밀러는 그 누구보다도 창작자의 권리를 주장하며 자신의 오리지널 스토리와 작화를 고수하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당시 그는 검열 문제에 인해 <올스타 배트맨 앤드 로빈 더 보이원더>를 끝으로 DC코믹스와 결별을 선언한 터였다. 프랭크 밀러는 <로보캅2>와 <로보캅3>를 기획한 오리온 픽쳐스 측으로부터 오리지널 각본을 영화에 그대로 적용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각본에 참여하였다.

결과적으로, 그 약속은 깨지고 말았는데 밀러가 작업한 <로보캅> 시리즈의 이야기는 너무나 어둡고 비관적이어서 메이저 영화로 구현되기에는 애초 한계가 있었다. 이에 분노한 프랭크 밀러는 자신의 그래픽 노블이 영화화되는 것에 완고한 반대 의사를 밝혔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게 <씬 시티>로 1991년 발표 이후 숱한 영화화 판권 제의가 들어왔지만 번번이 거절했다. 메이저 영화사에서 제작될 경우, 원작이 담고 있는 어둠의 세계가 제대로 구현되지 않을 거라는 염려가 컸다. 프랭크 밀러의 말에 따르면, “<씬 시티>는 그 어느 작품보다 내게는 소중하다. 누구에게도 전적으로 영화화를 맡길 수가 없었다. 나만큼 <씬 시티>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밀러에게 <씬 시티>는 필생의 역작과 같은 성격을 갖는 작품이라 더욱 각별했다. 매 작품 목격되는 필름 누아르의 색채를 이번에는 흑과 백이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구현했다. 게다가 DC코믹스를 떠나 다크호스 코믹스에서 그 어떤 견제나 검열도 받지 않고 만든 순수하게 독립적인 작품이었다. 이 작품을 위해 프랭크 밀러는 자료조사와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기 위한 작업을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가졌고 <씬 시티>의 발매와 함께 코믹스 시장에서 슈퍼히어로물에 밀려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하던 범죄물이 다시 한 번 주목을 받는 계기를 만들었다. 할리우드의 구애가 물밀듯 몰려왔지만 프랭크 밀러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기존의 방식대로 영화화가 됐다가는 정교하게 구축된 <씬 시티>의 세계관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할리우드에 불어 닥친 혁명

할리우드가 프랭크 밀러의 그래픽 노블을 영화화하기 위해서는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 필요했다. 원작으로 삼은 그래픽 노블을 영화에 맞게 각색하는 작업이 할리우드에서는 일반적이었다. 로버트 로드리게스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반대되는 개념으로 접근했다. 영화가 그래픽 노블의 세계에 맞춰 각색되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프랭크 밀러는 그냥 이야기꾼이 아니다. ‘시각적 이야기꾼 visual storyteller’이다. 밀러의 작화는 철저히 이야기의 성격을 반영해 결정된다. 이를 영화화하기 위해서는 다른 식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었다.”

프랭크 밀러의 세계는 삶과 죽음이 극단적으로 대립한다. 살기 위해 누군가를 죽이고 누군가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의 삶이 보장받지 못하는 ‘소돔과 고모라’의 세계다. 프랭크 밀러는 이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배트맨 다크 나이트 리턴즈>에서 처음으로 밤 시간대의 뉴욕시를 지칭할 때 ‘고담’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스무 살 시절 뉴욕으로 상경했던 프랭크 밀러는 이 도시에 대해, “사람들이 숨도 쉬지 못하게 할 만큼 억압한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회고한다.

<씬 시티>의 배경이 되는 도시의 정식 이름은 ‘베이씬 시티 Basin City’다. 하지만 ‘죄악 sin’이 창궐하는 이 도시를 부를 때 사람들은 언제부턴가 앞의 두 글자를 빼고 ‘씬 시티’라 불렀다. 밤의 세계가 낮을 지배하고 선한 사람이 악한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착취당하는 씬 시티는 흑이 백을 압도한다. 그래서 프랭크 밀러는 흑백으로 전체 이미지를 그린 다음 화이트로 아웃 라인을 주는 방식을 고안해 그래픽 노블 <씬 시티>를 완성했다. 악이 창궐하는 씬 시티에서 희망이란 한 줄기 빛처럼 희박하다는 작가의 세계관이 작화에서 그대로 전해진다.

로버트 로드리게스는 원작의 이야기와 특유의 이미지로 구현된 세계를 훼손하지 않으려는 목적으로 프랭크 밀러에게 공동감독을 제안했다. 필름의 검은 부분을 탈색하는 방식으로 흑백 이미지를 강조하는 한편, 피와 같은 일부 대상에만 색을 부여함으로써 전에 본 적 없던 이미지의 영화를 만든 것이다. 이는 프랭크 밀러의 고유한 세계를 무너뜨리지 않고 접근하려는 감독들에게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그래픽 노블의 이미지 자체가 극 중 세계를 상징하고 이야기를 반영하는 프랭크 밀러의 작품 특성상 영상에 대한 고민 없이 이야기만 단순히 스크린에 옮기는 것은 자살 행위와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씬 시티> 이후 프랭크 밀러의 작품을 영화로 만든다는 것은 곧 새로운 영화의 출현을 의미했다.  

이질적 세계의 결합

<씬 시티>가 관객과 평단으로부터 완벽에 가까운 성공을 거두면서 또 다른 프랭크 밀러 원작의 영화화는 그 어느 때보다 신속하게 이뤄졌다. 배트맨 만화를 읽어본 적이 없다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새로운 배트맨 삼부작 영화화를 맡으면서 기존에 나온 배트맨 그래픽 노블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에게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준 작품은 프랭크 밀러의 <다크 나이트 리턴즈>와 <배트맨 이어 원>이었다. 이를 원작으로 삼은 건 아니지만, 만화라기보다 현실에 가까운 프랭크 밀러의 배트맨은 크리스토퍼 놀란으로 하여금 기존의 슈퍼히어로물의 만화적인 느낌을 완전히 배제한 사실주의적인 작품을 만들게 하였다. <배트맨 비긴즈>의 전례 없던 시도에 대해 프랭크 밀러는 “최고의 슈퍼히어로 영화”라며 찬사를 보냈다.

잭 스나이더의 <300>은 <씬 시티>와는 성격이 또 다른 시각 혁명이었다. 잭 스나이더가 프랭크 밀러의 원작을 대하는 자세는 로버트 로드리게스와 다르지 않았다. “억지로 그래픽 노블을 영화화하겠다고 목표를 세운 건 아니다. 내가 추구하는 미적인 부분과 상당 부분 부합하는 면이 있었다. 관객들에게 그래픽 노블을 읽는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 이미지를 원작과 비슷하게 가는 것이 개인적 취향이다.”

<300>에서 프랭크 밀러는 기존의 그래픽 노블이 실리는 책의 세로 형태를 벗어나 가로를 강조한 형태로 획기적인 구성을 취했다. 단 300명의 스파르타 병사들이 수만의 페르시아 병사를 물리치는 이야기의 스펙터클이 가로 컷에 더 적합하다는 판단이었다. 1950년대 미국의 가정에 TV가 보급되면서 인기가 떨어진 영화가 와이드 스크린을 도입해 재미를 봤던 것처럼 단순한 이야기와 적은 수의 병사가 주인공인 작품에서 ‘와이드’ 하게 펼쳐진 가로 컷은 수만의 적군에 동등하게 맞서는 스파르타의 의지를 강조하고 또한 피가 튀고 살점이 날아다니는 살육의 스펙터클을 극대화하는 장점을 있다.

역시나 이야기와 컷의 형태가 오목과 볼록처럼 맞물린 원작을 영화로 살리기 위해서는 또 다른 형태의 촬영 방식이 필요했다. 잭 스나이더는 먼저 실사로 촬영한 후 그 위에 애니메이션의 형태로 색감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300>의 영화를 완성했다. 햇빛 찬란한 날에 절벽에 내몰린 페르시아 병사들이 그림자가 되어 저 아래로 떨어지는 영화 속 이미지는 컷 속의 움직이는 동영상이자 스크린 속에 피어난 그림이라 할 만했다. 그 정도로 영화와 만화라는 존재 방식이 상이한 매체가 완벽하게 결합한 예였다.

그와 같은 이질적 세계의 결합은 프랭크 밀러의 그래픽 노블을 지탱하는 구조이면서 할리우드의 시각 혁명을 불러온 결정적인 요소였다. <로닌>에서 봉건시대의 사무라이를 21세기의 뉴욕으로 불러왔던 프랭크 밀러는 <엑스맨>의 스핀오프 시리즈인 <울버린>에서 울버린을 일본으로 보내 동서양 문화의 결합을 시도했다. 또한 <데어 데블>처럼 남자들이 득시글거리는 슈퍼히어로의 세계에 엘렉트라라는 강력한 여자 캐릭터에 주목했으며 <씬 시티>에서는 1940~50년대를 풍미했던 필름 누아르의 세계를 현대에 되살렸다.

그와 같은 밀러의 현대성은 작금의 할리우드가 보이는 특징이기도 하다. 온갖 문화를 잡식성으로 소화하는 할리우드에서 이질적인 것의 결합을 시도해 미학적인 경지로 이끄는 프랭크 밀러의 작품은 최적의 콘셉트인 셈이었다. 그의 원작을 취했거나 기반으로 한 작품 중 <씬시티>, <300> <배트맨 비긴즈>가 할리우드의 영상 혁명은 물론 슈퍼히어로의 화법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건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여전히 유효한 마초의 매력

<씬 시티> 이후 9년 프랭크 밀러는 다시 한 번 로버트 로드리게스와 손잡고 속편 <씬 시티: 다크 히어로의 부활>을 공동 연출했다. 전편에서 빠졌던 ‘목숨을 걸 만한 여자’ 에피소드 등에 더해 프랭크 밀러가 새로운 이야기를 추가했다. 그리고 부제처럼 마브와 같은 마초 캐릭터는 물론 낸시와 같은 치명적인 매력의 여인들을 부활시켰다. 전편의 시각 효과를 답습하는 까닭에 감흥은 덜한 편이지만 프랭크 밀러가 창조한 세계의 매력은 유효하다. 씬 시티의 남자들은 여전히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 폭력을 권력으로 삼는 와중에도 한 번 마음에 품은 여자에 대해서는 순애보적 마인드를 웬만해서는 거둬들이지 않는다. 여자 캐릭터도 단순한 눈요깃감이 아닌 것이 씬 시티 올드타운의 여성들은 마누트 일당을 일망타진 했을 정도로 자신들의 몸을 지키는 싸움의 기술이 뛰어나다.

그러니까, 밀러의 세계에서 주먹은 법을 압도하고 총은 경찰력의 동의어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굳이 씬 시티를 지탱하는 도시의 규칙을 이해하려 들지 않더라도 밤의 네온사인을 에너지 삼아 검은 코트를 입고 컨버터블을 몰며 총질을 해대는 남자들은 이 세계의 롤 모델로 삼을 법하며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선을 유독 강조하는 여자들에게서는 눈을 떼기가 쉽지 않다. 여기에 바로 프랭크 밀러의 필름 누아르 세계가 곳곳에 처 놓은 치명적인 매력의 덫이 놓여 있다. 프랭크 밀러는 <씬 시티> 이후 단독으로 메가폰을 잡았던 윌 아이즈너 원작의 <스피릿>을 영화화했다가 흥행에서 아주 곤혹스러운 경험을 한 적이 있다. 그의 세계가 점점 빛을 잃어간다는 반증일 것이다.

<씬 시티: 다크 히어로의 부활>은 그 정도는 아니겠지만, 전편의 호응을 능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쩌면 그의 이름은 서서히 어둠에 파묻힐지 모르겠다. 하지만 악의 창궐에 따른 배트맨의 출현을 이제나저제나 매일 같은 고대하는 고담시의 시민처럼 그의 작품이 가진 영향력은 앞으로도 영원할 것이다. 프랭크 밀러의 그래픽 노블은, 그리고 이를 영화화한 작품은 이미 우리 시대의 고전의 반열에 올랐기 때문이다.  

맥스무비 매거진
2014년 9월호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