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근래 운이 좋게 한국과 미국을 대표하는 SF작가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배명훈과 테드 창이었다. 배명훈은 그의 이름을 단독으로 내건 첫 번째 소설 <타워> 출간에 맞춰, 테드 창은 게스트 자격으로 참가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이하 ‘부천영화제’) 방문에 맞춰 인터뷰를 진행했었다. 두 사람은 한국 대중들 사이에서 낯선 이름이지만 장르 팬들에게는 거의 신적인 존재로 추앙받는 작가다. 배명훈의 경우, 소설가 박민규의 표현을 빌자면, ‘아마도 100년 후, 한국 문단은 작가 배명훈이 이 땅에 있었다는 사실에 뒤늦은 감사를 표해야 할’만큼 독보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는 작가이고, 테드 창은 장편 하나 없이 단편소설 발표만으로 이미 전 세계적으로 SF소설계의 거장 대접을 받는 작가다. (한국에 출간된 단편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2004년 1쇄 출간 후 지금까지 SF로는 이례적인 8쇄 판매를 기록했다!)
사실 배명훈과 테드 창은 SF를 다룬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공통점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판이한 작가들이다. 1990년 데뷔한 이후 단 12편의 단편을 발표한 과작의 테드 창과 달리 배명훈은 한 달에 한 편 이상의 단편을 쓸 만큼 다작의 작가다. 또한 테드 창은 소설쓰기를 부업으로 삼은 컴퓨터 프로그래머인 것에 반해 배명훈은 현재 전업 작가다. (그는 조만간 직장을 얻을 계획이란다!) 그러다보니 이 둘은 작품의 스타일도 참으로 상이하다. 테드 창이 과학현상 혹은 수학공식을 풀어나가는 듯한 건조한 문체를 선보인다면 배명훈은 사람 사는 이야기에 집중하며 따뜻함을 자아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배명훈과 테드 창이 비슷한 부류의 SF작가로 기억되는 것은 둘의 작품이 모두 영화화하기 힘든 구조로 되어있다는 점 때문이다. 안 그래도 이들과의 인터뷰에서 영화화를 염두에 둔 소설 쓰기에 대해 질문을 던졌는데 돌아온 대답은 이러했다.
“영화화를 염두에 둔 소설이 각광을 받는 것 같은데 나는 그걸 피한다. 영화에 종속되는 서사가 아니라 텍스트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미학을 끌어내보려고 한다. 영화에서 잡아낼 수 있는 미학과 글에서 잡아낼 수 있는 미학은 다른데 영화를 염두에 든 글쓰기를 하다보면 글의 미학이 점점 사라진다.” (배명훈)
“몇 년 동안 소설쓰기를 완전히 포기한 적이 있었다. 대신 창조적인 에너지를 발산할 다른 방법으로 저예산 공포영화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다. 그 작업으로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결국 나는 다시 소설 집필을 하게 됐다.” (테드 창)
한때 영화기자를 업으로 삼았던 사람으로서, 장르소설 애호가로서 이들의 작품을 스크린을 통해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진한 아쉬움을 느꼈더랬다. 내가 알고 있는 장르 지식 범위 안에서 SF문학은 많은 이들이 영화화를 바라지만 실제로 영화화가 가장 힘든 장르로 평가받는다. 대표적인 작가가 바로 알프레드 베스터다. 그의 대표작인 <파괴된 사나이> <타이거! 타이거!>는 많은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들이 스크린으로 옮기겠다며 호방하게 달려들었다가 금방 꼬리를 내린 ‘비운의 프로젝트’로 유명하다. (<타이거! 타이거>의 경우, 박찬욱 감독이 해외로 진출하게 되면 가장 먼저 연출하고 싶은 작품 중 하나로 꼽기도 했다. 이와 관련한 에피소드는 조만간 다룰 예정이다!) 속마음을 간파당하지 않기 위해 ‘음악’으로 심리를 조작한다는 설정(<파괴된 사나이>), 소리를 시각으로, 움직임을 소리로 지각한다는 설정(<타이거! 타이거!>)을 영화의 이미지로는 어떻게 묘사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알프레드 베스터 역시 배명훈이나 테드 창과 같은 입장과 다르지 않아서 소설 자체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욕망으로 절대 영화화되지 않도록 구성하는데 많을 공을 들인 것으로 유명하다.
나는 이들의 발언에서 영화매체의 보수성을 읽는다. 영화는 대중들이 가장 즐겨 찾는 오락일 뿐 아니라 문화의 전위(前衛)를 자처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보수적인 매체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백년의 역사가 넘는 영화가 기술의 발전을 통해 진보하고 있다지만 그것은 단순히 관객들이 보고 경이감을 느낄만한 시각적인 측면에만 제한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영화가 자본의 힘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밖에 없는 막강한 산업으로 군림하면서 보다 안전한 수익창출을 위해 새로운 시도를 지양하고 오로지 관객들이 좋아할만한 볼거리에만 치중하는 풍토가 영화의 보수성에 가속도를 붙이고 있는 것이다.
테드 창은 그날 인터뷰에서 영화 시나리오 집필 경험에 대해 이런 얘기를 했다. “내가 시나리오를 쓰면서 얻은 단 하나의 깨달음이라면, 말이 되는 소재와 보기에 좋은 소재 사이에서 선택이 주어졌을 때 영화를 찍는 사람들은 후자를 선택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곧 시나리오 작업을 접고 소설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그래서일까, 문학 쪽에서는 흥미로운 SF소설이 계속 등장하는 것에 반해 영화 쪽에서는 국내외를 통틀어 인상적인 SF영화를 보기가 힘들어졌다. (한국의 SF영화는 신태라 감독의 <브레인웨이브>(2006) 이후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 제작이 거의 유일하다!) <스타트렉: 더 비기닝> <터미네이터: 미래 전쟁의 시작> <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 등이 등장하긴 했지만 SF라는 장르적 특성만 사용됐을 뿐 실제적으로 변화하는 시대를 담지 못했기 때문에 진정한 SF라고 부르기엔 어딘가 부족한 모습이었다.
테드 창은 이번 부천영화제가 마련한 강연회에서 “SF는 반드시 변화하는 것을 다뤄야한다.”고 말했다.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변화를 담아내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보여줘야 좋은 SF”라면서 “진보야말로 SF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했다. 장르는 소위 시대의 산물이다. 마치 살아 숨 쉬는 생물과 같아서 적극적으로 시대를 반영하고 내부 규칙을 업데이트하면서 진화해온 까닭이다. 그중에서 SF는 시대의 변화에 가장 민감한 장르다. 그래서 좋은 SF를 발견하기 힘든 요즘 극장가에서 시대를 반영한 영화를 찾기가 하늘에 별 따기만큼이나 힘들다. 관객의 취향에 영합한 오락영화도 분명 필요하지만 시대를 외면하고 반쪽짜리 역할만 하는 영화계가 급격히 보수화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 전 세계적으로 시대가 하수상하기 때문일까. 시대를 반영한 장르영화가, 특히 잘 만든 SF영화가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무비스트
(2009.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