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여행자의 아내>(The Time Traveler’s Wife)

사용자 삽입 이미지
(주의! 이 기사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로베르트 슈벤트케 감독의 <시간 여행자의 아내>는 오드리 니페버거의 동명 베스트셀러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제목에서처럼 시간 여행을 다루지만 이 영화는 관객에게 과학적 지식을 요구하는 SF가 아니다. 각본을 맡은 브루스 조엘 그린은 <사랑과 영혼>(1990)에서 보여줬던 장기를 되살려 판타지 요소 다분한 러브스토리로 이야기를 각색했다.

도서관 사서로 일하는 헨리(에릭 바나)에게 생전 처음 보는 아가씨 클레어(레이첼 맥아덤즈)가 다가와 아는 척을 한다. 클레어가 여섯 살일 때 둘은 이미 장래를 약속한 사이라는 것. 헨리는 기억을 못하지만 그렇다고 클레어를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 태어날 때부터 시간 여행이 가능했던 헨리는 금세 어떻게 된 사연인지를 기억해내기 때문이다. 둘은 다시 사랑에 빠지지만 헨리의 시간 여행이 본인의 뜻과는 무관하게 수시로 일어나는 까닭에 클레어와의 사이에 미세한 균열이 일어난다.

<시간 여행자의 아내>에서 시간 여행은 주된 목적이 아니다. 헨리와 클레어의 사랑을 이어주는 매개물에 다름 아니다. 영화는 헨리가 어떻게 시간 여행이 가능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같은 시공간 안에 동일인물이 함께 존재할 수 있는지 등등 과학적 설명이 요구되는 부분은 의도적으로 무시한다. 오로지 둘의 사랑에만 초점을 맞춘다. 여기에는 <백 투 더 퓨처>(1985)나 <시간을 달리는 소녀>(2006) 등 그간의 시간 여행 소재 장르에서 보았던 운명에 저항하는 인간의 불경한 호기심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굉장히 동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는 이들 영화와 달리 <시간 여행자의 아내>는 정적인 운동이 극을 지배하는 것이다. 

<시간 여행자의 아내>에는 눈에 뚜렷이 보이는 사건이 없다. 대개의 시간여행 영화들이 역사적 사실을 흐트러뜨린 후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좌충우돌하는 사건을 다뤘다면 <시간 여행자의 아내>는 정해진 운명에 복종하고 이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소박한 감정을 우선한다. 그래서 클레어 앞에 나타난 시간 여행자 헨리는 미래의 사건을 알려주는 예지자라기보다는 앞으로 닥칠 위기의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돕는 감정 치료사에 더 가깝다.

헨리가 치료로 내세우는 건 다름 아닌 기다림. 기다림은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시간으로 기능한다. 안 그래도 클레어가 헨리에게 배우는 가장 중요한 감정의 원천은 기다림이다. 이미 여섯 살 때부터 헨리를 마음에 품은 클레어는 시간여행을 하는 그를 늘 기다려왔고 지금도 기다리며 미래에도 기다릴 것이다. 헨리의 죽음 이후 슬픔을 곱씹는 클레어를 위에서 내려 보는 카메라가 초침 소리에 맞춰 시계 방향으로 이동하는 촬영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이는 <시간 여행자의 아내>가 운명론을 바탕삼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이나 세상의 모든 것은 선천적 운명으로 결정되며 이를 결코 초월할 수 없다는 세계관을 기저에 깔고 있다. 오프닝에서 어린 헨리는 엄마의 차 사고를 목격하지만 영화는 결코 이 사건을 되돌리려는 헨리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헨리 역시도 자신의 죽음을 아는 순간까지도 이를 피하려하지 않는다. 다만 본인 스스로 이를 받아들이고 주변 사람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줄 뿐. <시간 여행자의 아내>는 하늘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는 부감 쇼트(high angle shot)를 중요하게 사용하는데 그러니까 인간의 삶은 결코 하늘의 시선을 벗어나는 법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운명론은 헨리와 클레어의 사랑과 결합하면서 이상한 설득력을 갖는다. 이를 낭만적인 기운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듯하다. 헨리가 여섯 살의 클레어 앞에 나타나 운명적 사랑을 예고할 때부터, 비록 헨리는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지만 가족 앞에 다시 나타나 영원한 사랑을 암시할 때 시간 여행이라는 테마가 러브스토리와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를 <시간 여행자의 아내>는 증명해 보인다. 언제가 만나게 될 사랑을 가슴에 품고 기다린다는 설렘은 얼마나 짜릿한가! 원작소설의 SF적 설정은 시간 여행만 제외하고 모두 지워버린 탓에 SF물로써는 낙제점에 가깝지만 러브스토리의 측면에서는 꽤나 볼만한 작품인 것이다.  


QOOK 블로그사용자 삽입 이미지
(2009.11.10)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