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눈에서 건진 행운 – 양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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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조위를 만났다. 아니 양조위의 눈을 보았다. 남자에게도 보호본능을 자극하게 만드는 그의 눈이 빨아들이는 힘은 여전했다. 개봉을 앞둔 <상성: 상처받은 도시>에서도 양조위는 예의 그 눈빛으로 사람을 홀린다.

양조위는 특별하다. 특별하지 않은 배우가 어디 있겠냐마는 그는 더욱 특별하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 양조위는 눈이 특별한 배우다. 눈에도 표정이 있다면 양조위는 눈의 표정을 가장 잘 구사하는 배우다. 그 하나만으로 할리우드를 통하지 않고 세계적인 배우의 반열에 오르는 흔치 않은 사례가 됐다. 특히 허공을 응시하는 듯한 눈은, 겨냥하는 목표물은 없지만 적중률은 백 퍼센트에 가깝다. 그 눈빛은 발사되는 것이 아니라 흡수하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출연한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양조위의 연기는, 아니 그의 눈은 늘 관객의 마음을 당긴다. 역사의 소용돌이 앞에서 귀머거리이자 벙어리인 ‘문청’은 눈빛 하나만으로 개인의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줬고(<비정성시>), 이과수 폭포를 바라보는 ‘아휘’의 눈에는 연인 보영(장국영)과 함께할 수 없다는 비탄이 서려 있었으며(<해피 투게더>), 자신의 여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미리 이별연습을 할 수밖에 없는 ‘차우’는 애절한 눈길로 수 리첸(장만옥)을 바라봤다(<화양연화>). 사진 촬영을 위해 카메라 앞에 섰을 때도 양조위는 그랬다. 165cm의 작은 키와 왜소한 어깨를 가진 평범한 체구를 보고 있노라면, 주변에 몰려든 스탭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오직 하나, 사막을 홀로 걷는 듯 시름에 잠긴 눈만이 유난히 반짝일 뿐이다.

슬픔을 봉인한 눈

유위강, 맥조휘 감독의 <상성: 상처받은 도시>(이하 <상성>)는 떨치기 힘든 과거 때문에 삶의 함정에 빠진 두 남자의 시련을 다룬다. 이 작품에서 양조위는 의문의 살인사건에 말려든 경찰, 유정희를 연기한다. 경찰관 역할만 이번이 세 번째. 실연의 아픔을 이기기 위해 타월과 비누를 친구 삼아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고독한 ‘경찰 633’(<중경삼림>)과 삼합회에 잠입한 비밀경찰로 늘 불안에 떨며 복귀를 갈구하는 ‘진영인’(<무간도>)을 기억한다면 <상성>의 유정희가 평범한 경찰과 거리가 먼 캐릭터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번에 양조위가 맡은 역은 실력 있는 경찰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끔찍한 범죄와 연관된 인물.

이중적인 생활을 보여준 <무간도>의 진영인이 처한 상황과 비슷하지 않느냐고? 그의 생각은 좀 다르다. “진영인은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는 인물이지만 그 속에서 여유를 찾는다. 그에 반해 유정희는 건강한 삶을 살아도 될 정도로 여유로운 선택의 가능성을 지닌 캐릭터다. 하지만 그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냉정하다” 양조위의 말처럼, 진영인이 상관의 부탁에 자신의 감정을 일시적으로 포기하는 따뜻한 가슴의 소유자라면 유정희는 자신을 위해서라면 가족도 과감히 내칠 수 있는 차가운 인물로 그려진다. 천성적으로 감정을 잘 표출하지 못하는 내성적인 성격의 양조위는, 그래서 <상성>의 시나리오가 좋았다. 연기를 감정 표출의 대체물로 삼는 그에게 유정희란 인물은 새로운 도전, 즉 ‘자연인’ 양조위의 가슴 속에서 꾹꾹 눌려진 채 연기로 발산될 날만 기다렸던 또 하나의 감정을 드러낼 좋은 기회였다. “처음으로 시도하는 역할이라 도전 의욕이 생겼다. 그런 기대감은 연기에 임하는 배우에게 호기심을 자극한다. 특히 이와 같은 연기는 어릴 적 우울감에서 비롯된 내 성격을 극복할 수 있게 만들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는 그는 “또 하나의 내 자신을 찾은 것 같다”고 덧붙인다.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연기를 이용했듯 양조위의 필모그래피는 껍질을 까야 비로소 그 속을 알 수 있는, 모순으로 가득 찬 인물들로 채워져 있다. <첩혈가두>(1990)의 ‘아비’는 사람을 좋아할 정도로 정이 많지만 친구를 위해 살인을 저지르기도 하고, <씨클로>(1995)의 ‘시인’은 갑갑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한 여인에게 매춘을 알선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선 그녀를 사랑했기에 고통스러워하며, <2046>(2004)의 ‘차우’는 여러 여자의 육체를 탐닉하지만 그런 방탕함은 옛 여인을 잊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에 불과하다. <상성>의 유정희는 또 어떤가. 아름다운 부인과 재산, 끝까지 함께하는 동료까지 부러울 것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걸 포기하는 쪽을 선택하는 인물인 것이다. 하지만 그런 모순된 성격은 자신의 의지와는 별개로 거역할 수없는 운명으로부터 기인한다. <해피 투게더>의 아휘, <화양연화>의 차우, <무간도>의 진영인, 그리고 <상성>의 유정희까지. 이들은 애당초 운명을 이기고자 하는 마음 자체가 없다. 그래서 감정을 쉬이 드러내지 않는다. 운명을 거스르지 못해 세상과 인연을 끊고자 하는 이의 눈은 차갑게 깊어지고 그 속에서 슬픔은 떨어지지 않는 눈물로 봉인될 수밖에 없다.

유위강, 맥조휘의 페르소나

양조위가 품고 있는 ‘슬픔’을 가장 잘 활용한 감독은 왕가위와 유위강, 맥조휘 콤비다. 육체를 앞세운 연기 대신 감정의 언어를 선호하는 이들 감독에게 양조위는 페르소나 같은 존재였다. <아비정전>(1990)을 시작으로 <2046>까지, <열혈남아>(1987)를 제외한 왕가위의 모든 작품에 출연했으며 유위강, 맥조휘 감독과는 <무간도> 시리즈 이후 <상성>에서 다시 한 번 호흡을 맞췄다. 왕가위는 양조위의 본 모습을 가장 먼저 알아본 감독이었다. 왕가위는 액션이나 코미디에서 보여줬던 모습 아래 침전한 그의 내성적인 성격들을 끄집어냈다. 언제 왕가위 영화에서 활짝 웃는 표정으로 등장한 양조위의 모습을 본 적이 있던가.

양조위는 촬영 전까지 아무 대본도 준비하지 않는 왕가위의 방식을 선호한다. “왕가위 감독은 요구가 많은 사람이다. 그는 나를 깊은 수렁 속에 빠뜨리고 캐릭터 자체로 변화시킨다. 나는 그 방식이 좋다”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양조위의 연기는 말 그대로의 연기가 아닌 자신을 드러내는 제2의 감정. 자신의 필터를 통과할 만큼의 정보만을 원하는 그에게 완성된 시나리오를 던진다는 건, 곧 양조위 자신이 아닌 제3자를 연기하라는 주문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감정 발산이 익숙하지 않은 그는, 몸과 표정의 동선이 화려한 영화보다 미묘한 감정 변화에 초점을 맞추는 왕가위 영화에서 유독 빛을 발할 수 있었다.

그와 달리, 유위강과 맥조휘는 현장의 즉흥성보다 안정성을 중시하는 철저한 준비로 유명하다. 왕가위의 방식을 절대적으로 믿는 양조위에게 이들의 방식은 언뜻 상극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속의 인물이 양조위를 모델로 한 것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상성>의 유정희가 처한 상황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비슷하다. 선과 악이 모호하고 적과 친구가 애매한 삶을 살고 있다”는 유위강의 말처럼 양조위가 맡은 인물들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자기 세계에 갇혀 고독을 곱씹었다. 배우로서 양조위의 이력도 마찬가지였다. 홍콩에서 활동했지만 그는 홍콩배우와는 다른 행보를 보여줬다. 성룡과 이연걸이 아크로바틱한 몸놀림을 선보일 때 그는 감당할 수 없는 무게의 감정을 추슬렀고, 주윤발과 유덕화가 남자들의 의리를 위해 숨을 거둘 때 그는 맺어질 수 없는 사랑에 눈물을 흘렸다. 그래서 유위강, 맥조휘 감독은 <상성>의 첫 캐스팅이 확정된 4개월 후 양조위를 유정희 역으로 바꿀 수 있었다. 원래 그가 맡기로 했던 역할은 금성무가 연기한 사립탐정 아방. 유정희는 상반된 두 개의 가치 사이에서 애매하게 줄타기를 하느라 삶의 뒤편에 숨어버린 인물이다. 가슴에 뚜렷하게 남은 멍 자국과 눈 속에 깊이 각인된 슬픔을 연기의 동력으로 삼는 양조위만큼 유정희 역할에 어울리는 배우가 있을까. 데뷔 후 처음으로 예전의 이미지를 거스르는 인물로 그려지지만 양조위의 눈을 빌린 유정희의 악함은 이상하리만치 설득력을 발휘하며 보는 이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자신을 아주 잘 아는 감독을 만난다는 건 놀라운 행운이다. 양조위 역시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나는 연기자로서 행운아다. 드라마로 데뷔한 이래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났다. 허우 샤오시엔, 오우삼, 왕가위, 유위강, 맥조휘, 이안, 지금 생각해봐도 난 정말 운이 좋은 연기자다. 이들과 함께하는 작업을 통해 새로운 행복감과 즐거움을 자주 반복하니 이 얼마나 놀라운 행운이란 말인가.” 양조위가 웃었다. 이런 모습을 본 게 얼마 만인가. <상성>의 한국 개봉을 앞두고 이안 감독의 신작 <욕망, 신중(色, 戒)>에 참여 중인 그의 눈에는 오랜 만에 슬픔 대신 기쁨이, 절망 대신 행복감이 어렸다. 양조위는 그날 인터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활짝 웃음 지으며 자리를 마무리했다. 창문 틈을 파고드는 햇살을 받아 그의 눈도 빛났다.

필름2.0 336호
(2007.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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